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20)화 (420/449)

외전 구염상 2-43

구염상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이, 거리낌 없이 말하는 이. 그 중에는 여자도, 남자도 있었다. 심지어 자녀가 있는 자리에서도 사람들은 헌원씨 가문의 이야기를 떠드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물론 구염상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건 주소유가 받아야 할 인과응보였고, 지금 헌원사사가 겪고 있는 수모는 구염상 자신이 전생에서 어머니를 원망한 주소유의 수모를 견뎌야 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주소유의 아들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룻밤 부부라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한다. 전생에서 헌원사사는 구염상을 박대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에게 빚을 졌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보상이라면, 구염상은 흥미가 없었다.

탓할 건 헌원사사가 구염상을 사랑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만일 후에 헌원사사에게 다른 기회가 오거나 혹은 구염상의 신분이 다시 남보다 못하는 때가 온다면, 그때는 다시 그가 복수를 한대도 구염상은 감내할 의향이 있었다.

장서열이 긴장한 것을 눈치챈 구염락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덮었다.

“긴장하지 마. 원한다면 상아에게 저자의 가슴에 활을 쏘라고 할게.”

잠시 넋이 나간 장서열이 과거의 기억 속에서 헤어나와 의연하게 말했다.

“됐습니다. 그럴 가치도 없어요.”

연무대 위에 선 헌원사사 역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입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엉망인 모습이 그녀 앞에 솔직히 드러나는 게 괴로웠지만, 떠도는 말들은 결국 사실이었기에 그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계속해 화젯거리로 삼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게다가 헌원사사는 이미 사람들이 자신과 모친을 언급하는 것에 익숙했다. 본래 연무대에 올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기폭제가 될 게 뻔하니까.

하지만 헌원사사는 결국 올라왔고, 이왕 올라온 거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헌원사사는 담담하게 앞으로 나왔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다시 뒤를 돈 소년은 버거운 무게의 부담을 짊어지고 무대를 내려갔다. 시선을 거둔 구염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국화가 찬란하게 피어 있는 먼 곳을 응시했다.

섭영진과 도도, 봉익은 상 공주가 헌원사사 순서에서 전과 달리 침묵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심지어 이는 다음에 이어진 시합에서 그녀의 실력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구염상은 빠르게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줄곧 상 공주에게 집중하고 있던 그들은 그녀가 헌원사사를 다르게 대한다는 걸 눈치챘다.

이 사실은 세 사람의 마음을 어렴풋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헌원사사는 심지어 화살을 한 발도 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공주에게 주목을 받은 거지? 무대에 오르고 내려간 시간이 너무 빨라서?

섭영진은 정말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상 공주가 그런 인간을 더 많이 쳐다보다니, 눈이 썩을까 걱정도 안 되나?

봉익의 안색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헌원사사는 우연이라고 설명했고, 그 말은 두 사람이 모르는 사이라는 걸 뜻했다. 그렇다면…….

‘상 공주는 조금 전 사사를 생각하던 건 아니었을까? 정말 그런 걸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토록 쓸쓸해 보였을까?’

고원이 갑자기 말했다.

“내 차례야.”

섭영진과 도도의 안색이 바뀌었다. 조금 전 헌원사사가 상 공주에게 다소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 때보다 더욱 좋지 않은 낯빛이었다. 고원이라면 상 공주를 이길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만일 고원이 이긴다면 공주는 그를 과대평가할 텐데… 상상만 해도 불쾌했다.

섭영진과 도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중신들조차 고원의 설욕을 기다리며 이 혼돈에 휩싸인 이상한 분위기를 깨고 그가 무언가를 증명해 주기를 바랐다.

그 중 제일 긴장한 건 고원의 부친이었다. 이제껏 그는 아들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고원이 그의 적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당황했던가. 그는 한때 이 추문을 억누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짜 서자庶子는 몸이 병약했고, 고원의 부친은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추문을 공개하고 어린 시절부터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해 어수룩하게 자란 적자嫡子를 데리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고원은 매우 우수했지만 아쉽게도 그 우수함은 전쟁터에서만 발현됐다. 고원의 부친은 만일 처음부터 고원이 서자와 바꿔치기 되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곁에서 자랐더라면 분명 문무를 겸비한 자랑스러운 인물이 되었을 거라고, 가끔 욕심부려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고원의 부친은 이런 불쾌한 마음을 이 모든 잘못을 초래한 첩실에게 풀었다. 그녀와 병에 골골대는 서자를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하면서!

연무대 위에서 아픈 곳 없이 위풍당당한 고원을 바라보자 고원의 모친은 갑자기 언제나 자신을 향해 울고 병치레를 많이 하던 아이가 떠올랐다. 고원의 모친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남편은 더는 그 아이를 언급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 아이의 생모는 아들을 바꿔치기한 후, 그녀의 친아들에게 갖은 고생을 겪게 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리 매정할 수 있겠는가. 비록 친자식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지만 고원의 모친은 서자를 무려 십오 년이나 키웠다. 십수 년 모자의 정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그래도 고원의 모친은 차마 그 아이를 언급할 수가 없었다. 그녀 역시 서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미움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녀는 친자식인 고원이 자랑스러웠다.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고 수많은 영광을 안겨준 아들. 고씨 가문은 뒤를 이을 후계자가 생겼고, 아들은 인재가 되었다.

하지만 득이 있으면 실도 있는 법이다. 고원은 한 번도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지 않았고 그녀를 공손히 대했다. 기른 정이 없는 탓에 두 사람은 이제 와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 해도 메울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장자庄子로 보내진 아들은 갈수록 병약해지는 몸에도 불구하고 매달 눈에 하소연할 길이 없는 괴로움을 담은 채 그녀를 보러왔다. 그러나 이런 유일한 기회마저도 남편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고원은 구염상을 힐끔 쳐다봤다. 화살과 활은 이미 두 사람의 손에 놓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서 있었다. 구염상이 막 활시위를 당기며 손의 감각을 시험하고 있을 때였다.

고원이 갑자기 말했다.

“만일 이번이 첫 번째 경기였다면 공주 전하께서 저에게 1승을 거두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하께서도 많이 지치셨을 테니, 지금 저와 겨와 겨루신다면 아마 무승부일 겁니다. 제 말을 믿으십니까?”

자신의 궁술을 논하는 고원은 평소와 다르게 진지했다. 그가 무승부라고 하면 분명 무승부였고, 그건 교만을 떨거나 잘난 체를 해서가 아니었다.

그 말에 구염상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순간 소리자가 조금 전 호명했던 이름이 고원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구염상의 머리에는 즉시 서자, 적자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그 외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 했다. 그녀는 고원이 어찌 자신의 궁술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더욱이 고작 그의 말 한마디에 따라 판단을 내릴 수도 없었다.

구염상은 활을 거두었다. 그녀는 도전을 받은 것에 화를 내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한 발 쏴 보시지요.”

잠시 멈칫하던 고원은 즉시 활시위를 당긴 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화살을 쏘았다. 구염상은 그의 화살꼬리가 이제 막 과녁을 옮기려는 태감의 화령花鈴(새를 놀라게 해 꽃을 보호하는 용도로 쓰이는 방울)을 뚫고 지나가 멀지 않은 과녁에 꽂히는 걸 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구염상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원을 쳐다봤다.

“무승부를 인정하지요. 내려가도 좋습니다.”

그 말에 고원은 오히려 자신이 없어지는 걸 느꼈다.

“공주 전하, 그래도 저를 시험을 해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어떤 장애물도 없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무승부일 거라는 소신의 말을 그대로 믿으십니까?”

구염상은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빙그레 웃었다.

“제게 그런 판단력도 없다면 앞서 패하신 분들께 모욕이 아닐까요?”

말을 마친 구염상이 섭영진과 도도가 있는 방향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섭영진과 도도는 즉시 몸가짐을 바로 하고 앉았다. 마음속에 긴장이 가득했다.

‘그녀가 쳐다보잖아. 게다가 웃네? 어째서? 그녀가 왜 웃는 걸까? …이제 안 보는군.’

고원이 껄껄 웃으며 열정적인 눈길로 구염상을 응시했다.

“공주께서는 과연 승자다우십니다.”

고원은 쑥스러운 듯 두 손을 마주 비볐다. 중요한 일은 해결했으나 또 다른 생각이 드는 것 같았다.

“공주 전하… 제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하하… 다른 사람은 모두 공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저만이 가능하죠. 그러니 우리 혼사를 결정하는 게 어떻습니까?”

고원이 갑자기 조급하게 말했다.

“공주 전하를 모독할 뜻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저는…….”

고원은 몹시 부끄러워했다.

“전 정말로 공주 전하를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예전에 태자께서 공주 전하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전 그때부터 전하를 좋아했어요. 전…….”

그때, 갑자기 위엄 있는 목소리가 어안이 벙벙해 있는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했다.

“모두 넋 놓고 뭘 하는 게냐! 당장 저 녀석을 갖다 버리지 않고! 저 녀석의 참가 자격을 박탈한다! 탈락이야! 무조건 탈락이라고! 끌어내!”

화가 난 구염락이 씩씩대며 소리쳤다.

‘못된 것! 감히 내 면전에서 내 딸을 희롱해?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고원은 붙잡힌 와중에도 단념하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공주 전하! 저는 진심입니다! 정말로 진심이에요! 저 고원은 공주 전하를 좋아합니다! 좋아… 웁, 우웁…….”

섭영진과 도도, 봉익은 고원을 잘게 다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모든 관원이 모는 앞에서 다른 이들을 죽은 사람 취급하며 공주에게 청혼하다니.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이 맹추야!’

현천기는 두 눈을 번쩍이며 끌려 내려오는 고원을 쳐다봤다. 그가 생각했다.

‘바로 저거야! 내가 어째서 도도에게 저걸 시키지 않았지?’

지금이 사랑을 표현할 유일한 기회였다. 현천기가 즉시 제자를 잡아끌었다.

“봤느냐? 저게 바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도 소리치거라! 어서! 어서 ‘공주님 사랑해요’를 외치란 말이야! 아, 외치라니까! 네가 안 하면 내가 도와주마!”

“스승님! 입 좀 다무세요!”

“뭐야? 감히 스승에게 입을 닥치라고 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현천기가 구염상을 향해 크게 외쳤다.

“상 공주! 여기를 보십시오! 여기요! 훌륭한 인재인 도도가 공주님을… 윽!”

구염락이 손을 털었다. 포도알 낭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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