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19)화 (419/449)

외전 구염상 2-42

제자가 아무런 대꾸 없이 무대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자 현천기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는 분노가 타올랐지만 이 분노를 누구에게 터뜨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현천기는 홀로 화를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구염락은 일부러 그런 거야! 구염락 이 망할 뱀 같으니!

구염락은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바라보면서 멀리서 딸을 향해 격려의 눈빛과 자애로운 아버지의 마음을 보냈다.

징과 북소리가 울리자 세 발의 화살은 조금의 차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중신들의 안색은 결코 좋지 못했다. 상 공주는 이미 수많은 시합을 치른 뒤였지만 여전히 안정된 자세로 활을 쏘고 있었다. 그녀의 실력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기에 충분했다.

네 번째 화살을 쏠 때, 두 사람의 앞에는 두 첩의 병풍과 두 개의 동전이 놓였다. 도도가 패배한 그 방식으로, 이제 섭영진이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섭영진의 표정은 엄숙했고 눈빛은 냉정했지만 그의 동작은 그가 이번 시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 주었다. 무장 가문인 섭씨 가문에 있어 활과 검은 그들이 조정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밑천이었다.

구염상 역시 긴장하지 않았다. 징과 북이 울리자 두 발의 화살은 동시에 날아갔고, 모두 과녁 위의 정중앙을 뚫었다.

사람들은 놀랐다. 두 번째도 명중이라니! 이는 공주가 도도에게 이긴 것이 뜻밖의 행운이 아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력 때문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심지어 도도가 앞에서 패배한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려 주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는 가장 충격적이었다.

군중 속에 있던 헌원사사는 상 공주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화살을 쏘자 돌연 시합에 참가하고픈 욕망이 싹 사라졌다.

현천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황급히 제자를 위로했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라. 우리는 주력 장수가 아니지 않느냐. 이 방면에서는 섭영진보다 뒤처지는 게 당연하다. 오히려 학문에서 네가 절대적으로 한 수 위에 있으니, 무예로는 그가 너보다 한 수 위라 할지라도 이해해야 한다.”

도도는 스승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스승 현천기가 성질이 괴팍하고 미친 사람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도를 아들처럼 대해 줬고, 그 덕분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스승에게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무대 위의 병풍이 사라졌다. 대신 두 사람 앞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열두 개의 동전이 놓였다. 동전들은 일직선 위에 있지 않았고, 동전 사이의 거리 또한 매우 넓었다.

규칙은 매우 간단했다. 쏜 화살이 동전을 최대한 많이 뚫고 지나가 과녁의 중심을 맞혀야 했다.

섭영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구염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 시합이야말로 그녀의 장기였다. 화양기법花樣技法(동전을 지그재그로 매달고 화살을 쏘아 맞히는 방식)의 경기에서 그녀가 질 리 없었다. 설령 상대가 주국 제일의 사수라 할지라도 이번 경기에서는 결코 그녀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징과 북이 울리자 두 화살이 날아갔고, 경기는 순식간에 끝났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누가 이겼지? 누구야?’

‘섭영진이야, 아니면 상 공주야?’

동전 수를 센 태감이 답을 내놓았다. 상 공주의 화살촉에는 5개, 섭영진의 화살에는 4개의 동전이 꽂혀 있었다.

중신들은 놀라서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섭영진은 두 번째 시합을 요구했고, 이번에도 결과는 금세 발표되었다. 상 공주는 6개, 섭영진은 5개였다.

소리자는 앞으로 나와 섭영진에게 세 번째 시합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세 번을 이기고 절대적인 우세를 선점해야만 비로소 상 공주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소리자는 형식적인 질문을 던졌을 뿐, 누군가를 깎아내릴 뜻은 없었다. 섭 장군의 실력을 무시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섭영진이 돌연 눈을 치켜뜨자 소리자는 그가 자신의 말에 상처받았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그 외에도 섭영진은 이해할 수 없는 자괴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마치 어른에게 꾸중을 듣고,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말이다.

소리자는 섭영진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세 번째 시합을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소리자는 그대로 결과를 선포했다.

섭영진은 입술을 꾹 닫은 채 구염상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무거운 발걸음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구염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의무적으로 도도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들려줄 생각이었다.

구염상의 말을 들은 후, 섭영진은 교훈을 얻으려던 마음이 짓밟힌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그리하여 그는 순간 기침을 참으며 신분 차이에도 아랑곳없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만하시지요. 그런 말씀은 공주 전하께서 동전 한 개 차이로 소신을 이겼다는 사실보다 더욱 소신을 불편하게 합니다. 소신이 온 이유는 단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입니다. 혹시 조금 전 소신이 활을 쏠 때 공주 전하께서는 소신이 동전을 몇 개 맞힐 것인지도 아셨는지요? 그래서 공주 전하께서는 일부러 한 개씩만 더 맞히신 거고요.”

구염상은 화가 난 섭영진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네.”

섭영진은 순간 이성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주먹을 꽉 움켜쥔 그는 창피함에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동전 한 개만 따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의 노력이 무색하도록 상대는 그가 동전 몇 개를 쏘아 맞힐 것인가까지 미리 꿰뚫고 있었다. 그러니 섭영진이 무슨 면목으로 세 번째 시합을 요구하겠는가.

섭영진은 세 번째 시합을 요구하기는커녕 두 번째 시합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도도보다 오래 버텼지만, 도도만큼 상황을 꿰뚫어 보지는 못했다.

섭영진은 패배는 인정했지만, 자신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절대로 용인할 수가 없었다.

“공주 전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구염상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것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은 사람이 그래 왔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사람들이 진심으로 무릎을 꿇는지 아닌지를 매번 따졌다면 피곤해 쓰러졌을 것이다. 따라서 구염상은 지금도 상대가 무슨 이유로 무릎을 꿇는지를 따질 마음이 없었고, 적당히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뒤돌아 나가던 섭영진은 갑자기 뭔가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이를 악물고 돌아와 말했다.

“공주 전하, 불필요한 말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화양기법에 소신이 숙련이 안 됐을 뿐이고, 또 말씀처럼 소신의 연습이 부족했던 것뿐이라면 공주 전하 역시 전장의 경험이 부족하실 뿐 아니겠습니까. 공주 전하의 화살촉은 과녁에 단단히 박혔습니다. 얼마나 많은 힘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지요.”

그정도면 사람의 뼈도 충분히 통과할 겁니다.

그러나 섭영진은 마지막 말은 생략한 채 부끄럽고 분한 마음을 안고 뒤돌아 장내를 빠져나갔다.

구염상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시력이 그렇게 좋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다. 자신의 화살촉이 완전히 과녁에 박힌 것을 알아보다니.

‘알아보면 알아본 거지, 뭐. 큰일도 아닌데.’

구염상은 서둘러 궁녀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 물을 마신 후, 궁녀가 보지 않은 틈을 타 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귤을 먹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하다니, 어마마마도 정말 너무해!’

도도는 무대 아래에서 얼굴이 하얘질 정도로 궁녀를 화나게 만든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섭영진이 돌아온 것을 보고도 도도는 주제도 모르고 덤볐다고 그를 비웃어줄 생각이 없었다. 졌으면 진 거지. 어찌 됐든 그들의 궁술이 공주만도 못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특별히 섭영진을 골려 주려 다가오던 고원은 섭영진이 뭔가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을 하고 있자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곧 있으면 연무대에 오를 차례여서 고원은 갑자기 조금 긴장이 됐다. 이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친한 벗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무언의 격려를 보냈다.

섭영진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우뚝 서 있는 공주의 모습과, 자신의 말을 듣고 의아해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두 눈을 크게 뜬 그녀는 속눈썹을 깜빡이며 무방비한 표정으로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마치 이긴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는 듯.

그에 비해 섭영진은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잘난 척을 아는 어릿광대나 다름없었다. 이 점을 생각하자 섭영진은 기침하는 것도 잊고 다시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다음은 헌원부의 영손令孫입니다.”

헌원사사의 관직은 헌원오마의 손자라는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 소리자는 가끔 참가자의 신분과 사정을 고려하여 이름을 호명했는데, 이에 수긍이 되지 않은 점은 없었다.

장서열은 다시 연무대에 오른 헌원사사를 바라보았다. 경멸의 눈빛이 담긴 표정은 짜증스러웠다. 그녀는 헌원씨 일가를 증오했다. 오늘날 그들이 생존의 경계에서 몸부림치며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해도 그녀의 혐오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장서열은 그들을 살려뒀다. 그들이 전생의 자신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도록.

헌원사사가 무대에 오르자 긴장되어 있던 장내의 분위기가 변했다. 소곤대는 목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들려왔다.

“저 아이가 바로 주 씨가 낳은 큰아들이죠? 헌원상의 아들 말이에요.”

“벌써 저렇게 컸나요? 훌륭한 인재로 자랐네요.”

“인재면 뭐 하겠어요. 그런 어미 밑에서 무슨 좋은 미래가 있다고. 헌원 부인이 자기 아들은 공주에게 장가갈 운명이라고 했다죠? 혀가 베일까 두렵지도 않나 참 뻔뻔하기도 하지. 듣자 하니 얼마 전에는 자기 측근 시녀까지 죽이겠다고 소란을 피웠다더군요. 시녀가 남편의 침소에 든 것 같다고 하면서요. 호호.”

듣고 있던 사람도 작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정말 터무니없네요. 어쩐지 지난 몇 년 동안 헌원부 사람들이 주 씨를 저택 밖으로 못 나오게 하더라니, 확실히 고상한 자리에 내보내기는 힘든 재목이로군요.”

“그것보다 더 우스운 일도 있어요. 소문에…….”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헌원상의 첩실이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장자인 헌원사사를 유혹했대요. 정말 웃기지 않아요?”

“어머나, 그 천한 것들은 지조도 없는지 어째 남자만 보면 그리 사족을 못 쓴대요? 하기사 또 어떤 이는 그런 여인들을 보물처럼 떠받드니, 원!”

말을 하던 이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는지 즉시 대화를 멈췄다.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러나 헌원사사가 어떤 노력을 거쳐 이 자리에 서게 됐는지, 그의 성적이 어떠한지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의 대단한 모친, 혹은 연경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일을 이야기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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