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41
순간 적막이 흘렀다. 아무도 도 대인의 궁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오로지 공주의 화살이 통과한 구멍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과녁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섭영진은 상 공주의 궁술 솜씨가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결과를 본 그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공주의 궁술은 백발백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궁 안에서 사치스럽고 안일한 생활이나 할 줄 아는 것으로 알려졌던 공주가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을 줄이야!
다시 한 번 공주를 쳐다본 섭영진의 눈빛이 돌연 뜨거워졌다. 손바닥을 쫙 폈다가 꽉 움켜쥐는 모습은 얼른 무대에 오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봉익은 구염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에게 준 놀라움은 이미 기대 이상의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고작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봉익은 희미한 압박감을 느꼈다.
곧이어 네 첩의 병풍이 새롭게 교체되었다. 첫 번째 병풍 위에 매달린 동전은 그대로였으나 이번에는 시선이 닿지 않는 두 번째 병풍 위에도 동전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사람들은 두 동전이 일직선 위에 놓여있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그 말은 동전 구멍과 과녁의 중심이 일직선에 놓여있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기묘하고 놀라운 장애물에 사람들은 긴장했다. 차를 마시던 신하는 찻잔을 든 손을 멈추었고, 사담을 나누던 부인들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과 경이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과연 둘 다 명중시킬 수 있을까? 만일 명중시키지 못한다면? 누구의 화살이 더 멀리 날아갈까?’
도도의 얼굴에 엄숙함이 스쳐 지나갔다. 구염상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따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징과 북소리가 울렸다.
활시위를 최대한 당긴 구염상은 앞서 쏘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활을 쏘았다. 화살은 기이하리만치 빨리 날아갔다.
도도의 화살이 그 뒤를 빠르게 뒤쫓았다. 두 화살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침없이 쏘아져 나갔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결과를 기다렸다.
이어진 구염상의 행동은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도도가 화살을 쏘는 순간, 그녀는 화살을 쏘는 단상에서 물러나 휴식처로 향해 시녀에게 물을 한 잔 요구했고 이어 몰래 귤 한 조각을 먹었다. 오히려 어린 궁녀가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귤을 먹는 건 우아하지 않다고 공주를 향해 입을 삐죽거렸다.
한입에 귤을 삼킨 구염상이 궁녀를 향해 익살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본 것은 이런 광경이었다. 하지만 금세 공주는 다시 엄숙한 표정을 한 사수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조금 전 공주가 보인 말괄량이 같은 모습에 당황할 틈도 없이 다시 깜짝 놀랐다. 공주가 쏜 화살은 그대로 과녁 중심에 명중했지만, 도 대인이 쏜 화살은 과녁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모든 이가 경악했다.
도도는 침묵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눈빛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적막감이 감돌았다. 조금 전 그는 뜻밖에도 지고 말았다.
손을 바라본 도도가 손바닥을 쫙 폈다가 다시 꽉 쥐었다. 그는 마지못해 쓴웃음을 터뜨렸다. 졌으면 끝이다. 지지 못할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는 고작 이런 일 하나로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었다.
순간 고개를 번쩍 든 도도는 자신을 이긴 상 공주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가 승자처럼 거들먹거리지 않고 있다는 걸 발견한 그는 다시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패배를 인정하라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을 때조차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대체 뭐지? 날 이기는 건 공주에게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가?’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무시를 당한 건 처음이었지만 도도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공주는 앞서 다른 참가자들과 몇 번의 경기를 치른 탓에 이미 피로한 상태였지만 거침없이 화살을 쏘았고, 궁술에 대한 자신감 역시 그보다 앞서 있었다. 그러니 그가 무슨 낯으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겠는가.
현천기는 자리로 돌아가는 구염상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구염상은 그 모친보다도 더욱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도도가 화살을 쏜 순간 이미 도도의 패배를 직감했다. 이런 자신감은 수많은 단련과 검증을 거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과연 황실에서만 길러낼 수 있는 공주였다. 구염락은 유일무이한 딸을 독하게 마음먹고 교육시킨 게 분명했다.
현천기가 입을 열었다.
“내려오너라. 네가 졌다.”
도도 역시 알고 있었다. 아직 두 발의 화살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더는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서로의 실력이 드러났으니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돌연 도도가 구염상 쪽으로 걸어갔다. 구염상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화살이 두 발 남았는데? 이제 곧 징이 울릴 텐데 왜 자리를 뜨는 거지?’
구염상의 앞에 선 도도가 한 쪽 다리를 꿇고 앉았다.
“공주 전하, 만복을 누리소서. 소신이 졌습니다. 신의 경지에 오른 궁술을 소신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구염상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기 없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가 사실에 근거해 말했다.
“도 대인은 지나치게 겸손하시군요. 대인께서는 전장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중신이나 전 그저 과녁 중심을 두 번 맞힌 사람에 불과합니다. 도 대인의 우수함에 비하면 저는 감히 잘난 체를 할 수 없지요. 도 대인께서 마천馬川 전장에서 보여준 뛰어난 궁술 실력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전 그런 도 대인께 진심으로 탄복했답니다. 물론… 조금 전 시합은 제가 확실히 이겼지요.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도도는 자신도 모르게 씩 웃었다. 스스로 뛰어나다고 여기던 그가 겨우 2관에서 탈락하다니 정말 큰 충격이었다.
“소신, 물러가옵니다.”
구염상은 손을 저은 뒤 조용히 다음 상대를 기다렸다.
중신들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음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자기 아들 차례가 오지 않기를 바라거나 혹은 아들이 너무 처참하게 지지 않기만을 바라야 했다. 결국 지긴 했지만 도도는 적어도 공주와 네 번은 비기지 않았는가. 그전까지의 상대는 모두 세 번 안에 탈락했다.
그러나 소리자는 긴장한 중신들을 위해 시합을 천천히 진행해 줄 생각이 없었다.
“다음은 여 공자입니다.”
여 공자가 아무리 봉익의 공적과 은덕을 칭송한다 해도 그건 순전히 가문을 고려한 탓이었다. 여씨 가문에서 모든 기대를 여 공자에게 걸고 있는 만큼 개인의 세력만 놓고 본다면 그는 결코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무예를 숭상하는 사람이 아닐 뿐.
몹시 어색하게 걸어 나간 여 공자는 화살 한 발을 쏜 뒤 침묵을 지키며 연무대에서 내려왔다. 심지어 그는 얼마 전 상 공주와 맞닥뜨린 남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행여나 그녀가 알게 될까 봐 감히 뒤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권서함 역시 침묵을 지키며 조그맣게 탄식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평온했다. 소년이 분발하기 위해 실패를 겪는 건 좋은 일이었다. 지난 세월 내내 승리에 젖어 있던 탓에 그들은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다음은 섭 장군입니다.”
신하들의 시선이 순간 섭영진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 속에는 심지어 절박함과 긴장감, 그리고 자신들조차 모르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섭영진이 이기기를, 그것도 반드시 이기기를 바랐다. 그가 이기면 무엇인가 증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대체 무엇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앞서 이미 그렇게 많은 사람이 패배했고, 주국의 유능한 인재들이 공주의 궁술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확고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설령 섭영진이 이긴다 해도 섭영진 개인이 유능하다는 것 외에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도도가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발견한 섭영진은 이내 고개를 돌려 이제껏 한 번도 상대를 쳐다보지 않은 상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속으로 몰래 다짐했다. 한순간만이라도 그녀가 뒤돌아보는 상대가 될 것이라고. 반드시!
섭영진이 연무대에 올랐다. 명성만큼은 그 조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소년 장군은 무대에 오르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소녀들의 은밀한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신분이나 능력에 마음이 끌린 소녀가 얼마나 많든 그가 다른 여인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구염상은 여전히 상대를 바라보지 않았다. 자만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알려진 이름이든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든 그녀에게는 그저 하나의 이름일 뿐, 전생에서 그녀는 그들을 알지 못했고 그들은 그녀의 생활과 무관했다.
이번 생에서 구염상은 여전히 공주였고 마찬가지로 미래의 생활 역시 그들과 무관했다. 그러니 기억할 필요가 있을 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닌, 오라버니 구염황이었다.
구염상은 야심이 없었다. 주국에 오직 두 명뿐인 황손으로서 뭔가를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권세에 관심이 없는 그녀는 오로지 안온하고 단순한 삶을 살고 싶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압박이나 시시비비를 따지는 다툼 없이 말이다.
구염상은 오라버니가 지고 있는 짐이 무겁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는 온 어깨에 주국의 조정과 나날이 커지는 영토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실패해서는 안 되었고, 심지어 물러설 권리도 없었다. 구염황 외에는 누구도 주국의 강산을 함께 나눠 짊어질 수 없었다. 오직 그만이 부귀한 나라에서 끝없이 나오는 호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구염황은 누구보다도 우수하고 뛰어나야 했다. 그래야만 높은 자리에 서서 횡포를 일삼는 이들을 제압할 수 있으니까.
구염상은 오라버니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무엇이나마 보여 주고 싶었다. 그녀가 무대에 오르는 이들의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콜록대다 평소처럼 기침을 멈춘 섭영진은 조금 전 무대에 오를 때 고원이 했던 말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기침하지 마, 공주에게 전염되면 어쩌려고?’
섭영진은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져도 괜찮을 테지만 그의 가문은 그럴 수 없었다. 질 수 없는 게 아니라 이길 수 있으면 반드시 이겨야 했다. 섭씨 가문은 유능한 장군 가문이자 전쟁터에서는 주국의 영혼이었다.
한편, 현천기는 다시 한번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했다. 그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잠도 자지 않고 침묵에 잠겨 있는 제자를 끌어 내어 옆에 앉히고 물었다.
“네가 보기에 섭영진이 이길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 것 같으냐?”
도도는 무대 위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문득 자신이 시합을 분석하기는커녕 상 공주가 다른 남자를 몇 번이나 쳐다보는지만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합 상대가 너무 많은 탓인지 상 공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옆에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확인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도도는 매우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쏙 들었다. 그 역시 처음으로 패배를 맛봤으니 섭영진도 지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의 체면 따위는 세우지 않아도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