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40
한숨 자고 난 도도는 눈을 비비다가 돌연 놀란 눈을 떴다. 연무대 위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는 차라리 계속 잠을 자 버리자고 생각했다.
현천기가 황급히 제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도도는 눈 깜짝할 새 변신한 스승의 모습에 머리를 확 밀어젖혔다.
‘궁녀로 변장하고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시다니, 행여나 이 장면을 본 아버지께서 죽어도 궁녀를 첩으로 들여야 한다고 하면 어쩌시려고!’
현천기의 이런 행동은 도도의 잠에 필히 영향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현천기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미 시합이 시작됐는데도 불구하고 이 망할 제자 녀석이 잠들었다는 사실이었다. 현천기는 궁여지책으로 도도의 곁에서 차 시중을 드는 궁녀로 변장하여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제자를 위한 일은 참 쉽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잘 들어라. 연무대에 올라가면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무조건 상 공주에게 본때를 보여 줘라. 반드시 그래야 한다! 안 그러면 체면이 구겨지는 건 네 스승인 나다! 알겠느냐!”
현천기가 막 말을 마치자마자 연무대 위로 도도를 호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금 전 연무대에서 내려간 자는 이미 3전 3패로 참패한 뒤였으나, 도도는 잠을 자느라 그가 졌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 했다. 잠에서 깼을 때는 스승이 하는 이야기를 듣느라 마지막 화살도 보지 못 한 채였다.
도도는 주변 사람들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단지 조금 조용해졌을 뿐, 사람들이 조금 전 패배한 이를 일컬어 시문에는 정통하나 궁술은 별로 좋지 못하다는 둥, 이번에 탈락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는 둥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는 잘 알지 못했다.
현천기가 별안간 도도를 떠밀었다.
“기억해라. 반드시 이겨야 한다! 만일 이기면 이 사부가 네가 지난날 내게 저지른 불경죄를 모두 용서해 주마!”
그 말에 돌연 잠이 확 달아난 도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무대 위에 오른 도도는 활을 손에 쥔 채 예리한 활과 화살처럼 자신의 오만함을 펼쳤다.
구염상은 자신과 겨루기 위해 억지로 떠밀려 올라온 것으로 보이는 눈앞의 남자를 보고 흠칫했다. 앞서 올라온 몇 명은 실력이 너무 빈약해 일부러 체면을 세워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껏 따분함을 느낄 지경이었던 구염상은 방금 올라온 자가 조금 그럴 듯해 보이자 손에 쥔 활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무대 아래에서 현천기는 잠에서 깬 제자를 보며 투지를 불태웠다. 마침내 원수를 갚고 한을 풀 날이 왔다. 도도가 구염상을 이기는 건 그가 장서열을 이기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지난날의 치욕을 씻을 거라 생각하자 현천기는 하늘을 날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큰 성과를 거둘 좋은 기회였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던 장서열이 갑자기 구염락에게 물었다.
“현천기가 저기서 뭘 하는 거죠? 설마 제자를 도와 부정행위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요? 인간이 어찌 저리 매번 뻔뻔할 수가!”
순간 아래를 한 번 휙 훑어본 구염락이 언짢은 눈으로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마음이 약간 불편했다.
“저리 변장을 했는데도 알아본다고?”
연무대를 보고 있던 구염황은 아버지의 말투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얼른 아래를 쳐다보았다.
“알아보기 힘든가요? 저렇게나 확실한 특징이 있습니다.”
현천기는 파렴치하고 악랄하여 그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소란이 일었다. 그가 먼지로 변한대도 알아볼 수 있으리라. 과거 그런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도 제거할 수 없는 자였으니, 현천기의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알 만했다.
구염락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현천기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장서열이 있다고 하니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구염락이 위험한 눈빛으로 아래에 있는 현천기를 쏘아보았다. 연회가 끝나면 필시 일등공을 불러 현천기를 만나 보라고 할 참이었다. 그의 몸에 있는 모든 ‘특징’을 모조리 없애라고 말이다.
규칙은 아주 간단했다. 먼저 3승을 거두는 자가 승리하며, 과녁은 시합이 끝날 때마다 멀어진다. 최대 거리까지 멀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장애물이 등장한다. 화살은 중간에 놓인 동판 2개를 뚫어야 했고, 동판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만일 그래도 승패가 갈리지 않으면 그 다음은 힘겨루기였다. 화살촉이 과녁에 더 깊이 박힌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도도는 처음에만 의아한 눈길로 구염상을 보았을 뿐, 연무대에 올라선 뒤부터는 몸과 마음을 다해 화살과 목표물에만 집중했다.
구염상 역시 연무대에 올라섰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화살을 문지르는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장내는 엄숙한 두 사람의 모습에 점점 조용해졌다.
도도의 부친은 긴장한 얼굴로 무대를 보았다. 그는 아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지지 않은 공주를 빨리 이기기를 바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겼다가 공주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아예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오는 결과 그대로를 받아들이리라.
징과 북이 울리자 두 화살은 번개처럼 날아갔다. 화살은 의심할 여지없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과녁에 퍽 소리를 내며 꽂혔다.
아무도 잘했다고 환호하지 못했다.
과녁이 뒤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다시 동시에 활을 쏘았다. 징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두 화살이 동시에 날아갔다. 누가 먼저 화살을 쏘고 누구의 화살이 더 빠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뒤로 이동한 과녁은 이제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다. 이번에 두 사람 손에 놓인 건 쌍 화살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과녁 중심을 가늠하게 한 이들은 종이 재질로 만든 병풍 하나를 놓아 목표물을 가려 버렸다.
징과 북이 울리자 병풍을 들고 있던 태감 두 명이 쏜살같이 물러났다. 구염상과 도도는 징과 북이 울린 순간 거의 동시에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두 사람은 바로 활을 쏘지 않고 잠시 멈추었다. 한 차례 호흡을 할 정도의 짧은 시간이 지났을 때, 두 사람은 또 거의 동시에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번개처럼 쏘아져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병풍을 뚫고 지나갔다.
결과는 곧바로 나왔다. 모두 명중이었다.
사람들은 은근히 놀랐다. 도도의 실력을 잘 아는 자들은 더욱 경악했다. 도 대인은 전장의 후방을 담당하는 지현知縣(관직명)으로, 언제든지 만 명의 군사를 막아낼 수 있는 실력을 보유한 사람이었다. 그가 저런 궁술 실력을 발휘하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주는? 목표물을 가린 채 활을 쏘는 시합에서 공주가 도 대인과 함께 명중을 시키다니! 장내에 있는 장수들 중에서도 이러한 악조건에서 쌍 화살을 동시에 과녁에 명중시킬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공주를 바라보는 신하들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졌다. 여인들 역시 공주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경악한 누군가가 황후 역시 어린 시절 뛰어난 궁술 실력으로 권 승상과 우열을 다퉜으며, 황제와 당자가 그 뒤를 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시절 폐하와 당 대장군께서는 더 어리지 않았나요?”
“그럼 권 대인은요? 권 대인이 언제 누구한테 지는 것을 본 적 있나요?”
“맞아요. 그런 권 대인께서도 황후마마를 이기지 못했어요.”
과거 권서함이 졌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오히려 황제가 졌다는 사실보다 권서함이 졌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황후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더 잘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이는 황제가 현재 얼마나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권서함이 활을 잡고 있을 시기 그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황제의 지나친 위압이 주는 공포를 삭이기 위해 황제의 과거를 들먹이는 걸 좋아했다.
백구아는 놀라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모든 면에서 출중한 남편이 황후에게 패배한 과거가 있다니,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자신이 남편을 이긴 여인과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불쾌했다.
문득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백구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소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단 말인가. 나이를 먹을수록 철이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남편은 그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이 아니었고, 황제 역시 황후가 다른 마음을 먹도록 둘 사람이 아니었다.
백구아의 민감한 시선을 느낀 권서함은 단순한 표정 변화만으로 그녀의 생각을 눈치챌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갑자기 그 일이 들춰질 줄 몰랐던 권서함은 약간 당혹스러웠다.
그렇다. 그는 어린 시절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서열을 숭배했다. 그리고 심지어…….
…들추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이제 그 일은 은은하고 그윽한 과거의 추억이 되었다.
도도는 신중한 눈빛으로 상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혹이 가득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부터 떠오른 이상한 감정이 한순간에 커진 것 같았다.
구염상은 그를 쳐다볼 생각 없이 손에 든 다섯 번째 화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살 깃의 깃털이 하나 빠져 있었다. 구염상은 차분한 시선으로 살짝 화살의 각도를 틀어 보다가 별것 아니라는 듯 표정을 풀었다.
도도 손에 있는 화살 역시 깃털이 빠져 있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구염상이 어떤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련하게 화살을 살짝 돌려 잡았을 뿐, 여전히 그녀가 침착하고 차분한 눈빛을 하자 그는 갑자기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소용돌이가 몰려와 이성이 삼켜질 것 같았다.
상대가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낀 구염상은 마지못해 그를 마주보며 담담하고 예의 바르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 뒤, 그녀는 다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놓인 병풍 두 개에 시선을 던졌다. 첫 번째 병풍에는 동판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요동친 도도는 문득 더는 그녀의 몸에 있는 실오라기 하나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제는 스승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였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다시는 차갑지 않도록!
화살 깃의 깃털이 모자란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전장에서는 화살을 줍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기 때문에 도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구염상 역시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는 그녀와 오라버니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때때로 화살 깃의 깃털을 빼곤 했다. 늘 있는 일이었기에 깃털이 모자라는 건 별것도 아니었다.
징과 북이 울렸다.
두 화살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첫 번째 병풍에 매달린 동판을 지나 빠른 속도로 두 번째 병풍을 향해 쏘아져 나아갔다. 빛처럼 빠른 속도로 국화 바다 위를 지나간 화살은 단순하게 팔 힘만으로는 맞힐 수 없는 과녁 위에 탕 하고 안정적으로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