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39
소리자는 첫 번째 시험에서 탈락한 자들의 명단을 들고 다시 사람들 앞에 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는 첫 번째 명사들의 명단이 붙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탈락한 이의 명단을 재빨리 읽은 소리자는 뭇 신하들에게 잡담할 시간을 주지 않고 이내 다음은 궁술 시험이며, 대결 상대는 상 공주임을 선포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탈락한 이들을 논하던 신하들은 순간 멈칫했다. 이들은 다음 시험의 대결 상대의 이름을 듣고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모든 이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대 아래 있던 권택진 역시 잠시 넋이 나갔으나 이내 즉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 역시 황후가 궁술과 기마에 정통하여 황제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보아하니 상 공주의 궁술 역시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폐하께서 상 공주를 내보낼 정도로 확신에 차 있지는 못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권택진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서 시험을 치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권서함은 아들과 달랐다. 그는 충격을 받고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 과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아들 택진과 수많은 인재들이 과연 공주 한 명의 손에 꺾이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잠시 걱정하던 권서함은 얼른 그 생각들을 지웠다. 자신의 기분이 불쾌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불쾌해야 한다는 논리에 그는 찬성하지 않았다. 또 은근히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권서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과거 상 공주의 모친 역시 냉정하고 태연하게 궁술을 펼쳐 초혜전 사내들의 콧대를 눌렀다.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사내가 유혹을 받을 것인가. 또한 품지 말아야 할 설렘에 저항할 수 있을까.
막 과실주를 마시려던 백구아는 남편이 보기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이자 마찬가지로 마음이 느슨해져 상냥하게 물었다.
“당신도 우리 택진이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백 씨의 말투에는 모친으로서의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남편과 대화할 기회를 잡은 그녀는 물론 아첨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택진이는 당신을 닮았어요. 더욱이 궁술은 당신의 지도를 받아 빈틈이 없을 거예요.”
백구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중년에 접어든 그녀는 공손하고 정중한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 찻잔을 들려던 손을 거둔 권서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대화할 마음이 없음을 밝혔다.
백구아는 뜻밖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은 본래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고 이는 그녀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리 서운하지 않았다. 가문에는 두 명의 첩실이 있었지만 백구아는 질투하지 않았다. 남편은 정방正房에도, 첩실의 거처에도 거의 가지 않았다.
백구아는 더 많은 존중을 얻을 수만 있다면 누가 자신의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른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전원前院에서 보내는 남편이 혹시 계집종과 함께 밤을 보내는 건 아닌지도 백구아는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집안의 모든 뻔뻔한 계집종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남편의 인품을 믿기 때문이었다.
지난 세월 남편이 자신에게 보여준 존중을 떠올리자 백구아는 절로 허리가 쭉 펴지고 위풍당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권 부인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꼈고, 권서함과 깊은 정으로 마주 보며 살 수 있는 것에 만족을 느꼈다. 온 연경을 통틀어 장 씨 가문의 주사섬을 제외하면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여인도, 그녀가 마음 편하고 득의양양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백구아는 이 점을 생각할 때마다 소녀 같은 자부심과 긍지에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다만 과거의 성격을 감추어 그 감정들이 옅어졌을 뿐이었다.
권서함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기울인 후 이웃하여 앉아있는 한 각로가 황제의 저의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낮은 목소리로 설명하는 것을 경청했다. 권서함은 그저 듣기만 할 뿐, 다 듣고 나서는 다시 황제의 자리를 바라보며 한 각로의 설명을 잘 들었음을 표할 뿐 자신의 견해는 밝히지 않았다.
한 각로는 익숙한 듯 끊임없이 자신이 분석한 바를 이야기했다. 때로는 말하기 적합하지 않는 상대일지라도 당신의 생각에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소통하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다. 권서함은 한 각로가 후련해질 때까지 실컷 이야기를 들어준 뒤 찻잔에 차를 따르고 천천히 차 향기를 음미했다.
일상생활에 있어 권서함은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인과 성격 차이가 크다 해도 그녀는 자신의 아내이자 아들딸을 낳아 주고, 부모님을 효성스럽게 봉양해 준 사람이었다.
권택진이 태어났을 때 권서함은 다짐했다. 목숨을 바쳐 권씨 가문의 후사를 이어준 이 여인에게 잘하고 그녀와 함께 의지하며 살아가겠다고. 그건 그녀 백구아가 마땅히 얻어야 할 것들이었고, 그녀는 어느 여인의 그림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권서함과 모친이 잘못을 물을 때에도 백구아는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고, 홀로 속상해 우는 한이 있어도 아이가 응석받이로 자라지 않도록 혼내며 교육했다. 이렇듯 백 씨는 좋은 아내였다.
다만… 가끔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백 씨는 때로 상당히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권서함이 조정에서 느꼈던 중압감을 내려놓고 정방에서 편히 쉬려 할 때도 옷을 단정하게 입고 있지 않으면 질겁하며 누차 타일렀다.
그 외에도 두 사람은 성격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 권서함은 그런 생각이 옅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조금 전 백 씨가 ‘상국연’의 심오한 목표를 간파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권서함은 반박하지 않았다. 어차피 백 씨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구아는 단지 그녀의 입장에서 크게 비난받을 만한 구석이 없는 자기 생각을 말했을 뿐, 따지고 보면 그녀의 말은 틀릴 게 없었다. 그리고 권서함은 자신의 입장에서 시야가 닿는 범위까지 문제를 고려했을 뿐이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았고, 굳이 소명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권서함은 이 점에 불만을 느껴 말 잘 듣는 기녀를 찾는 일 같은 건 더욱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만일 그런다면 백 씨 역시 흥취를 모르는 그 대신 다른 상냥한 남편을 찾아 떠나지 않을까.
권서함은 장서열이 은연중에 주입해 준 이 생각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장서열의 이 관점에 동의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이용할 수 없었고, 사적인 욕구가 도를 지나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되었다. 안 그러면 학식과 교양을 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손에 든 맑은 차를 맛보던 권서함은 백 씨의 과실주 잔이 빈 것을 보고는 그녀를 위해 물을 따라주었다.
“조금만 드시오. 아무리 양이 적다 해도 술은 술이오. 이따가 택진이의 활 솜씨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순간 달콤한 행복감에 백 씨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모습을 단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듯 그녀는 남편에게만 미소를 보인 뒤 재빨리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녀는 다시 단정하고 고귀한 권 부인으로 돌아갔다.
아래에 있던 고원은 방울처럼 눈을 크게 뜬 채 빠른 속도로 세워진 평대平臺와 산뜻한 마복으로 갈아입은 상 공주를 바라보았다. 놀라움과 기쁨이 그의 눈빛에 가득했다. 저런 조그만 팔과 다리가 활을 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 않았다.
‘하하! 정말 재미있군. 이건 대놓고 져 주겠다는 거지!’
고원은 우습다는 듯 앞에 있는 섭영진을 툭툭 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너 이따가 사정 좀 봐 가면서 활을 쏴야겠다. 공주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섭영진은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고원이 그의 어깨에 있는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래? 너도 이따가 봐주면서 해. 공주가 기뻐하도록 아예 한 발도 과녁에 맞히지 마.”
고원은 당연하지 라고 답하려 했다. 상 공주를 위해서라면 그는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발도 명중하지 않으면 탈락하게 되는 게 아닌가? 그럼 예쁜 상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고원은 깊은 고민 끝에 몰래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했다. 그녀를 조금만, 아주 조금만 이기기로 말이다.
현재 구염상은 고원에게 있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예쁜 공주이자 몹시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여인이었다. 상 공주로 인해 말랑해진 그의 마음은 활짝 열려 있었다.
섭영진은 자신과 결탁하려는 고원을 무시한 채 연무대 위에서 침착하게 손목 매듭을 묶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가녀리고 부드러운 긴 머리가 높이 묶인 모습은 명랑하고 씩씩하면서도 고귀하고 온화해 보였다.
‘저 여인은 정말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실력이 대단할까?’
섭영진은 옅은 감동을 느꼈다. 여린 몸 안에 감춰둔 화살처럼 날카로운 영혼과 겨뤄보고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섭영진은 눈빛과 온몸까지 활활 타오르는 걸 느꼈다. 이렇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한편, 봉익은 무리 밖에 있는 국화 나무에 태연하게 기댄 채 초조한 부모님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몹시 걱정이 된 봉 어사封御史는 아들을 불러내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네가 공주에게 장가를 들고 싶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이어지는 시합에서 절대 지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봉 어사는 왠지 이렇게 말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강조하며 말했다.
“영원히 지면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최소한 마지막 관문 이전까지는 버텨야지. 여러 관문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탈락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안 그러면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던 봉익은 진지하게 한 마디를 남긴 채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전 최후의 승자가 될 겁니다.”
봉 어사는 기뻐하며 채 안도하기도 전, 아들의 속뜻을 알아듣고 경악했다. 하지만 경악은 경악일 뿐 그는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차마 아들에게 달려가 왜냐고 물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런 국면에서 정말 누군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기는 하다는 말인가.
만일 아들이 정말로 그 일을 해내어 높은 신분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해 돌아온다면, 봉 어사는 너무 기뻐서 무릎 꿇고 극진히 모실 터였다.
문득 아들을 부른 진짜 목적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봉 어사가 얼른 아들이 준 충격에서 정신을 차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을 향해 달려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치껏 좀 살살 봐주면서 이기거라.”
말을 마친 봉 어사는 아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황급히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봉 어사가 이렇게 당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마 봉 어사 외에도 많은 이가 몰래 아들을 불러 같은 당부를 했을 것이다. 만일 너무 과하게 상 공주를 이기면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될 것이고, 그건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