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15)화 (415/449)

외전 구염상 2-38

음악은 이미 흘러나오고 있었다. 긴 두루마리처럼 펼쳐진 붉은 비단이 바람을 따라 등장했다. 맹렬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붉은 비단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여인이 춤을 추고 있었다.

구염상은 기다란 무지갯빛 비단을 손에 쥔 채 전쟁터의 거대한 파란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비단 물결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표현했다. 강렬한 물결은 국토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란이었고, 잔잔한 물결은 핏빛으로 물드는 흐느낌이자 가족이 흩어지는 슬픔과 홀로 살아남은 생명의 막막함이었다.

구염상은 매 동작에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격앙되어 있는 모든 동작에서 그녀는 마치 천군만마를 이끄는 장군과도 같았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냉정하고 결단력 있게 전사들을 통솔하는 춤사위를 유감없이 발취했다.

마치 통곡하는 전사가 없다는 걸 표현하듯 구염상이 든 붉은 비단이 피바다 속에서 용솟음쳤다. 후회와 후퇴가 없는 전사의 기백이었다. 겹겹이 둘러싼 붉은 물결은 공중에 치솟은 춤사위와 함께 점점 높게 올라가 붉은 바다가 되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속 믿음이 되었다.

주국은 승자였다. 쓰러진다 해도 지치지 않았다. 주국의 백성은 우는 법을 몰랐다. 이들이 쓰러지는 건 남은 이를 위해 몸을 던질 때뿐이었다.

큰 물결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구염상이 든 붉은 비단은 연회에 있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모란화가 되어 쉼 없이 피어나고 또 피어났다. 눈부시게 웅장한 모습은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노래와 춤이 끝나자 활짝 핀 모란 한 송이가 나풀나풀 춤을 추는 고운 빛깔의 나비를 불러들였다. 춤을 추던 이의 모습은 어느 새 보이지 않았다.

소리자는 여전히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 역시 거대한 전율을 느낀 듯 말투에는 조금 전 춤사위로 인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격앙이 묻어났다.

“두 번째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 영토를 굳건히 지킬 방법에 대해 논하는 것입니다. 시험 시간은 마찬가지로 향 하나가 타는 시간입니다. 그럼 모두 시작하시지요.”

사람들은 기이한 분위기에서 깨어나 마치 칼에 찔린 것처럼 반응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전쟁’이라는 글자밖에 없었다. 마음속에서 격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오로지 승리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이긴 자만이 물어볼 자격이 있다. 조금 전 그 춤이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그런 자격도 없이 춤의 의미를 묻는 건 상 공주에 대한 모독이었다.

다시 엄숙해진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절박하게 앞으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함께 은은한 불길이 가슴속에 타올랐다. 세상을 놀라게 한 춤과 마음을 움직인 금 연주 때문에.

종이와 벼루, 붓과 먹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향초에 불이 켜지자 오직 먹을 가는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만이 들렸다.

호흡을 가다듬고 옷을 갈아입은 구염상은 다시 어머니 곁에 앉았다. 그녀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춤은 그녀의 특기가 아니었다.

딸이 돌아오자 빙그레 웃은 장서열이 미리 까놓은 귤을 건넸다.

“춤 솜씨가 많이 늘었구나.”

구염상이 귤을 입에 가져다 넣었따. 매우 달았다.

“어마마마에 비할 수 있나요.”

구염상은 어머니에게서 춤을 배웠다. 그녀는 어머니의 춤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번 생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여인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선보일 만한 재주 하나는 반드시 있어야 했다. 최소한 남자가 반하여 절대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의 재주가 필요했다. 이 말은 비록 여인의 위신을 깎는 말이었지만 구염상은 나름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의 눈에 들기 위해 실력을 기르는 건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였다. 남자 역시 공을 세우고 과거에 급제해야 높은 신분의 아내를 얻을 수 있으니 결국 실력을 쌓는 모든 노력이 일종의 재주였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재주. 내가 강하면 남에게 아부할 필요도, 남의 덕을 볼 필요도 없다.

따라서 사내들 또한 여인이 재주를 익히는 행위에 너무 득의양양해 할 필요가 없었다. 여차하면 한 남자에게만 선보이는 무기가 아니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는 우수한 사내가 한 여인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피곤하면 좀 쉬거라. 두 번째 무예 시험 때 아바마마께서 네게 활을 쏘라고 하실 생각이니까.”

그 말에 구염상은 갑자기 입안의 귤이 텁텁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표정도 함께 씁쓸하게 변했다.

“어마마마… 저 피곤해요.”

장서열은 딸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 또한 구염락의 생각에 동의한 탓이었다.

“아니. 넌 두 번째 무예 시험에 반드시 나가야 한다.”

장서열의 딸은 문무 모두에서 결코 사내에게 뒤지지 않았다. 소년들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이 연회에 참석했겠지만,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고 돌아가려 한다니 어림도 없었다.

손에 쥔 귤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구염상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궁술 시험이 예정된 게 분명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는 나를 시집보내려는 게 아니라 그저 남자들에게 망신을 주려는 거야.’

구염상의 궁술 실력은 매우 뛰어났고, 심지어 구염황조차 항상 그녀를 이길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건 남부끄러울 정도의 훈련 방식 덕분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훈련으로 벌을 받아야 했다. 지난번 구염황이 천 발의 화살을 쏘게 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귤을 먹는 구염상의 아래에서 소년들이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답안 작성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첫 번째 문예 시험의 결과가 정해졌다. 답안은 이미 황제와 태자의 엄중한 심사를 받고 있었다.

첫 번째 문제인 ‘신하가 보고하면 천자께서 들으신다. 그렇다면 신하는 마땅히 어디까지 직언을 올려야 하는가’는 신하의 충심을 묻는 문제로, 부끄럽지 않은 신하의 태도를 적는 문제였다. 이에 가장 우수한 답안을 작성한 사람은 초근언이었지만, 일등은 권택진의 차지가 되었다.

관직 생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초근언의 답안은 다소 이상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권택진은 달랐다. 그는 명문가의 자제답게 신하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든 언행을 꿰뚫고 있었다. 권택진의 답안은 매우 실용적인 본보기 그 자체였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구염락과 구염황은 모두 권택진을 첫 번째 시험의 일등으로 선택했다. 초근언은 이등이 되었다. 초근언의 글은 비록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과도하게 순진한 구석이 있었으나 편파적이지 않고 근거가 타당했다. 이런 종류의 순진함은 빠르게 고쳐질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초근언은 이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구염락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초근언이라는 자를 아느냐?”

얼른 초근언에 대한 자료를 훑어본 구염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릅니다. 국자감에서 천거하였으니 아마 학문이 출중한 자겠지요. 어쩐지 서체가 우아하고 단어 사용에 정성이 느껴졌습니다. 과연 국자감은 인재를 길러내는 훌륭한 곳이군요.”

아들의 말에 구염락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겉보기에 매우 정상으로 보이는 아들을 쳐다보았다. 방금 구염황이 한 말은 왠지 칭찬보다 폄하로 느껴졌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를 시험해 보아라.”

“네, 아바마마.”

구염락은 탈락자 명단을 소리자에게 건넸다. 이로써 총 스무 명이 탈락했다. 탈락자를 제외하면 세 번째 관문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제 칠십여 명에 불과했다.

구염황은 걱정은커녕 오히려 자신감에 찬 눈빛을 보였다. 앞서 치른 시험들은 안목이 뛰어난 두 부자에게는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 이제부터 시작할 무예 시합이야말로 이번 연회의 백미였다.

구염황은 누이동생이 현천기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실력을 갖춘 자만이 이길 수 있으니, 제 잘난 맛에 살던 사내들은 이제부터 필히 조심해야 했다.

‘우리 공주에게 지고 나서 수치심에 벽에 머리를 박고 죽지나 말라고! 하하!’

아직 다 타지 않은 향 냄새를 맡으며 아래 있는 자들은 쉼 없이 붓을 놀리고 있었다.

‘영토’란 무엇인가? 왜 그것을 위해 싸우는 걸까? 아버지 세대가 이룩한 은혜를 누리고 사는 지금, 우리는 어른들이 얻어낸 이 영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토 수호는 모든 인재들이 가진 호방한 야망이었고, 그 영토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는 모든 신하가 품은 불멸의 과제였다.

고향에 있는 가족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영원히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혹은…….

조금 전 세상을 놀라게 한 춤을 보여준 공주를 위해, 마음속에 활짝 핀 불처럼 붉은 모란을 위해, 그리고 불멸의 내일을 위해!

주국의 강산은 그들에 의해 광채를 더해 갈 것이고, 더욱더 눈부신 내일을 끌어안을 것이다.

사내의 호방함과 여인의 섬세한 감정처럼 구염황이 주국의 용의龍椅라면 구염상은 그 위의 진귀한 보물이었다. 그녀는 계집아이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정계에 나아간 여인이 되어 장래 신하들 앞에서 천천히 자신만의 전설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구염상은 여인의 부드러움을 보여 주었으나 아직 강인함은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구염락은 왠지 초조했다. 황위에 앉은 이후 이토록 초조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천하의 모든 이들이 자신의 아들딸을 언급함에 있어 ‘태자’와 ‘공주’라는 단순한 호칭이 아닌, 불굴의 영웅으로 불러 주길 바랐다. 그리고 아들은 이미 오 년 전 그의 바람을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 이제는 그의 딸이 존귀한 공주의 신분과 함께 뛰어난 실력으로 뭇 신하들을 누르고, 감히 잘난 체하기 바쁜 사내들을 복종시킬 차례였다. 다시는 감히 딸의 앞에서 그 ‘고귀한’ 머리를 치켜들 수 없도록!

문신 대열의 1열에 앉은 헌원오마는 기쁜 눈길로 사내들 가운데 침착하게 앉아있는 손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들은 진작 높은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사라졌다. 그와 헌원씨 가문은 헌원사사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고, 오늘날 헌원사사는 과연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비록 헌원사사의 출발은 봉익이나 권택진보다 조금 늦었지만, 그가 부친의 영향에서 벗어나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것만 해도 이미 매우 기특한 일이었다.

손자 주변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열심히 답안을 작성하는 이들을 바라보던 헌원오마는 무심결에 높은 자리에 앉아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황제를 바라보다가 다시 손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헌원오마의 눈빛이 투지로 불타올랐다.

헌원사사와 마찬가지로 이번 연회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 신분 상승의 기회였다. 헌원오마는 손자가 그동안 어떤 노력을 해왔고 어떤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지켜만 볼 뿐, 손주의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없었다. 헌원오마는 이미 늙었고, 이제 가문의 중임은 반드시 헌원사사가 짊어져야 했다. 헌원사사가 더 빨리 뛰어야 그가 죽기 전에 은택을 베풀 수 있었다.

향초가 꺼지자 먹향이 물씬 풍기는 두루마리가 다시 한림원 관원들의 자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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