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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14)화 (414/449)
  • 외전 구염상 2-37

    당승운이 자라는 것을 지켜본 장서열로서는 그 아이에게 애정이 있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현천기가 그 아이를 사정없이 때리고 있지 않은가. 장서열은 마음이 아팠다.

    구염락은 태연자약했다. 사람들 앞에서 장서열은 감히 자신과 싸울 수 없었다. 그는 황제의 위엄을 내세워 장서열을 완벽하게 무시할 수도, 이 기회를 틈타 제왕의 위엄을 과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구염락은 이내 의기소침해져 솔직히 답했다.

    “화내지 마. 당씨 가문의 저 아이는 혼쭐이 좀 나 봐야 해. 제 아버지처럼 유능한 것도 아니면서 총애만 받고 자라 나쁜 버릇이 생겼거든. 오늘이 저 아이를 가르칠 좋은 기회야.”

    ‘감히 상아가 외모만 예쁠 뿐 머리가 비었다고 했겠다?’

    구염락은 현천기가 당승운을 사정없이 패 주길 바랐다. 패다가 죽여도 책임질 의향이 있었다.

    ‘하찮은 나부랭이가 감히 서열이의 총애를 믿고 남들 앞에서 그런 유세를 떨다니. 그것도 모자라 감히 부마가 되겠다고 여길 와? 제 발로 맞아 죽으러 온 게지.’

    당승운 뿐만 아니라 오늘 호된 맛을 본 연회 참가자의 절반은 과거 뻔뻔하게 큰소리를 친 적이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러니 서두를 건 없었다. 천천히 괴롭혀 줄 것이다.

    이를 생각하자 구염락은 기분이 매우 유쾌해졌다. 그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사랑하는 아내에게 차를 따라주며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구염상은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장면에 갈채를 보내지도, 누가 이기고 지는지에 대해서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정말로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설사 그자가 개구리나 두꺼비일지라도 그녀는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당승운이 무대 밖으로 내던져지는 것과 동시에 현천기는 첫 번째 승리를 거뒀다. 다음으로 올라온 사람들 역시 현천기의 기분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든 안 드는 녀석이든, 현천기는 우선 한 차례 실컷 때려 준 뒤 정말로 형편없는 녀석은 무대 밖으로 내던졌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 중 현천기를 두렵게 만드는 이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다음 차례에 올라온 고원이었다.

    현천기는 무대 위로 올라온 거구를 보자 골치가 아팠다. 고원이 머리가 나쁘다는 건 주국의 신하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그동안 누구도 이 거구의 장군을 감히 낚지 못한 이유는 그의 무공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고원은 그냥 뛰어난 게 아니라 몹시 뛰어났다. 처음 시작할 때 고원은 일등공一等功의 ‘공’으로 훈련을 받았다. 후에 위풍당당한 고씨 가문이 서자庶子를 적자嫡子로 바꾸었다는 추문이 터진 후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서자로 키워져 거의 노예에 가까운 생활을 했던 공자가 실은 고씨 가문의 적자였음을 알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고원을 키운 첩은 그에게 잘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일신의 영예를 얻기 위해 고원을 죽을 확률이 가장 높기로 악명이 높은 제일군으로 보냈다. 후에 일등공이 세력을 확장하여 인재를 등용할 당시, 고원은 다시 한 번 발탁되어 비인간적인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현명한 사람들은 불행 중 행운으로 서자에서 적자가 된 대장군 고원을 건드리지 않았고, 이는 이치와 섭영진조차 마찬가지였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고원은 우둔했고, 그 결과 주국에는 무관 출신으로 왕에 봉해진 인물이 더는 등장하지 못했다.

    고원이 무대에 오르자 현천기는 얼른 사람을 매혹시키는 표정을 지으며 싱긋 미소지었다.

    “고 소장군이시군요. 이거 실례가 많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고원은 현 대인이 자신을 깍듯이 대해 주자 어쩔 줄 몰라 하며 얼른 두 손을 맞잡고 가슴까지 올려 절했다.

    “소신, 현 대인을 뵙니다. 현… 현 대인?”

    ‘어디 가셨지? 어디로 사라지신 거야?’

    현천기는 이미 아래에서 백기를 들고 있었다.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상아, 이 숙부가 너를 도와주지 않으려고 저 녀석을 혼쭐 내주지 않는 게 아니다. 이 일은 뒷사람에게 맡기자꾸나.’

    이를 본 고원은 재빨리 무대에서 뛰어내리다가 착지에 실패해 현천기의 쇠약한 허리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현천기는 하마터면 세상에 하직을 고할 뻔했다.

    감동한 고원이 현천기의 손을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현 대인. 소신이 앞으로… 앞으로 대인께 효도하겠습니다…….”

    고원이 감격에 겨운 얼굴로 뒤돌아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섭영진을 붙들고 흥분해 말했다.

    “통과했어! 내가 통과하다니! 공주 전하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일 보 전진한 거야! 우리가 다시 함께 경쟁할 수 있게 됐어! 너도 기쁘지?”

    그러나 섭영진은 현천기에게 심하게 얻어맞아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고원을 피해 멀리 달아났을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구염황이 탄식했다.

    “고원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알 수가 없군요.”

    구염락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가서 한 번 겨뤄 보고 싶으냐?”

    “다음에요.”

    현천기가 고의로 져 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고원 다음으로 올라온 어느 관원의 아들은 운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하필이면 고원 다음 순서였던 덕분에 그는 현천기에게 초주검이 될 때까지 얻어맞고 무대 밖으로 내던져졌다.

    신하들은 분노했지만 감히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현천기의 적나라한 도발에 그저 표정을 구길 뿐이었다. 물론 탈락한 친구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좋은 말로 타이르는 자도 있었지만, 그자 역시 속으로는 진작 현천기를 향해 한바탕 욕을 퍼부은 후였다.

    현천기의 검열 아래 무예 시험을 본 자는 세 종류로 나뉘었다. 한 대도 맞지 않고 바로 통과한 자와 한바탕 얻어맞고 통과한 자, 그리고 실컷 두들겨 맡고도 통과하지 못한 자. 이렇게 세 부류였다.

    실컷 두들겨 맞고 시험에 통과한 아들을 본 관리들은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 번째 관문에서 탈락한 이들은 화가 나고 피가 거꾸로 치솟아 현천기를 찢어 죽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했다.

    황제의 부마 선발은 얼핏 수녀 선발과 비슷했다. 시작하자마자 탈락했다는 건 장점이 없다는 걸 뜻하기 때문에 후에 혼인할 가문을 찾을 때도 좋은 상대를 찾기 힘들었다. 그럴 때면 꼭 어느 부인은 수녀 선발 때 첫 관문에서 바로 탈락한 여인이라더라, 형편없는 사람이라더라, 혹은 분명 어딘가 결함이 있을 거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반대로 조금 더 오래 남아 있다가 탈락한 사람은 뭇 여인들 중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다. 비록 가장 뛰어나진 않지만 많은 난관을 극복한 저력을 바탕으로 좋은 가문에 시집갈 수 있었다. 이를테면 후궁 후보가 되었던 경험과 그로 인해 배운 바가 마땅히 자랑 삼을 만한 가치 있는 일이 되었다.

    오늘 두 번째 관문이야말로 무예를 겨루는 첫 번째 시험이라 할 수 있었다. 이 관문에서 탈락한 부마 후보들은 남자로서 신체적인 결함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었다. 얼마나 허약하고 무능하면 쇠약한 문관 한 명을 이기지 못 한단 말인가. 그런 사내가 과연 앞으로 전장에 나가 우뚝 서는 군신이 될 수 있을까? 이런 남자라면 어느 좋은 규수든 혼인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당자는 화가 잔뜩 났다. 사실 아들의 품성은 예전부터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런데 지금 첫 관문에서 저렇듯 남자도 여자도 아닌 자에게 내팽개쳐지다니!

    ‘현천기! 두고 보자!’

    당자는 씩씩대며 화를 억눌렀다!

    한편, 남편 옆에 앉아 있던 초 부인은 신이 났다. 곧 서자인 초근언이 무대에 올라 한 방 얻어맞을 것을 상상하자 그녀는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쌤통이구나!’

    주제도 모르고 적자의 기회를 앗아간 자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초 부인은 안도했다. 이런 자리에 자신의 아들이 참석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아들이 맞는 모습을 본다면 너무나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초근언은 무대 위로 올라가 곧바로 맞을 준비를 했다. 그는 무공을 몰랐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처음부터 패배를 인정하고 살살 때려 주기를 빌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노력에 기대 계속 나아가고 싶었다. 설령 헛수고가 될지라도.

    그래서 초근언은 무공이 없는 몸으로 무대에 올라 아무도 뽑지 않은 병기를 뽑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명성이 높은 현 대인을 노려보며 부질없이 계속 저항했다.

    현천기는 돌연 이 아이에게 흥미가 떨어졌고, 심지어 약간 동정심까지 느꼈다.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 있는 거지? 제 발로 무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게 가장 좋은 결말이라는 것을 말이야.’

    혹은 구염상을 아내로 맞이하고 말겠다는 비장한 눈빛을 지우고, 관련 없는 자가 되어 한 대 맞은 뒤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공주를 멀리하는 게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현천기는 그들이 현실을 깨닫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바로 물러나는 것이었으나, 어떤 이는 유독 눈치가 없었다.

    현천기는 소년의 눈 속에 있는 결연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안 될 것을 알면서 노력으로 운명을 극복하려는 사람을 증오했다. 그건 현천기 자신을 매우 하찮고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느껴지게 하여 불쾌했다.

    그래서 현천기는 상대를 더욱 고통스럽고 암담한 세계로 보내주기로 했다.

    기괴하게 싱긋 미소를 지은 현천기가 별안간 발로 지면을 탁 차고 뛰어올라 무대 밖으로 착지해 초근언을 통과시켰다. 그는 초근언에게 이 무대 뒤에 있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합을 경험케 할 생각이었다.

    ‘뭣도 모르는 얼간이 주제에!’

    초 부인은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손에 움켜쥔 찻잔을 탁자 위에 쾅 내려놓은 그녀가 씩씩댔다.

    ‘천한 것!’

    무예 시합은 빠르게 마무리됐다. 현천기는 열다섯 명을 탈락시켰다. 하지만 통과한 사람 중 열 명은 중상을, 오십 명은 경상을 입었으며, 비교적 운이 좋았던 나머지는 어떠한 상해도 입지 않은 채 묘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장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했다. 더는 부마를 뽑기 위한 연회가 아닌, 누구도 질 수 없는 시합이 된 것 같았다. 탈락한 열다섯 명은 이번 연회에 참가한 사람 중 가장 실력이 형편없는 자들이었다. 이제 참가자들은 그 능력에 맞게 순위가 매겨질 것이었고, 누구도 가장 낮은 등급으로 분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구염락은 점점 엄숙해지는 신하들과 젊은이들을 보면서 갑자기 불쾌해졌다. 그들은 주제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겨우 무예 시험을 한 번을 치렀을 뿐인데 벌써 첫 번째 시험에서 상아가 준 영향력을 잊다니.

    구염락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기분이 언짢아진 그는 손을 내저으며 소리자에게 두 번째 문예 시험을 내게 했다.

    소리자가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 무예를 겨루던 무대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소리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두 번째 문예 시험의 주제는 ‘춤’입니다. 공주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황급히 각자의 상념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예를 갖춰 절했다.

    “공주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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