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36
한편,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서풍엽은 구염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째 관문에 현천기를 올려 보내다니, 무슨 뜻이지?’
이건 참가자 모두를 전멸시키겠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들 중에는 적지 않은 나라의 유망주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현천기와 비교하면 계략이나 능력 면에서 모두 한참 모자랐다.
미간을 살짝 찡그린 서풍엽은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구염락을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구염락의 이런 장난이 못마땅했다. 만일 두 번째 관문에서 참가자 전원이 탈락한다면 상 공주를 위해 열린 연회는 웃음거리가 된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소동을 피우고 있군!’
소리자의 말은 거의 끝나 있었다.
“…따라서 무대에서 떨어진 자는 탈락입니다.”
첫 번째 시험 결과가 아직 공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째 무예 시험은 모든 이가 참가해야 했다. 이미 번호는 정해져 있었고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현천기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무대에 오른 그는 지금까지 황제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간 황제의 아우 노릇을 하며 암묵적인 관계를 맺어온 그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구염락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하, 이런 건 일도 아니지!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무대에 올라오는 족족 따끔한 맛을 보여 주면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참가자는 한림원 편수 권택진입니다!”
현천기는 잠시 멈칫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권택진은 현천기와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눈 형제의 아들이었다. 모두 불쌍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니던가. 순간 동정심이 발동한 현천기는 권택진을 한 번 걷어차는 것으로 손을 떼기로 했다.
하지만 시작을 알리는 징과 북소리가 울린 후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을 때, 현천기는 즉시 마음을 고쳐 먹고 손에 온 힘을 실어야 했다. 백 년을 이어 내려온 권씨 가문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 미움 따위가 샘솟았던 것이다.
과연 백 년간 확고부동한 자리를 지킨 집안답게 권택진 역시 내실이 튼튼한 건 당연했다. 권 씨 가문 소년들의 실력이라면 혹독한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도 살아남을 터였다. 그들은 황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두려움이 없으니 공포심도 없었다. 또한 황권을 두려워할 정도로 자신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권택진의 공격은 매우 특이했다. 이는 현천기의 신출귀몰한 권법과 막상막하로, 여러 권법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어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간 오직 문관으로 권세를 다투었던 권씨 가문은 현천기를 대표로 한 어둠의 세력의 코를 순식간에 납작하게 만들었다.
현천기는 은연중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권택진이 자신의 공격을 50수나 버틴 것에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권택진이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현천기는 갖은 힘을 쓴 공격에 권택진이 완강히 저항하는 것을 보았을 때, 순간 이 녀석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권택진은 정말로 진지하게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연회에 참석한 것이다.
현천기는 다시 한 번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심성은 이렇게 두려움을 몰랐다. 현천기는 구염락이 승리자에게 그의 보물 같은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를 바랐다. 소년이 괜히 헛물만 켜는 꼴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현천기는 별안간 손의 힘을 거둬들인 뒤, 퍽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동시에 그는 몇 번 경련을 일으키다가 혼자 구르고 굴러 무대 아래로 떨어졌다.
권택진이 손을 거둘 틈도 없이 현천기는 스스로 쓰러진 게 분명했다. 입안의 피비린내를 삼킨 권태진은 현 숙부의 괴이한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권 공자의 승리입니다. 다음은 신현의 현윤(관직명) 도도, 도 대인입니다!”
현천기는 이미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있었다. 순간 수많은 대신들이 눈알을 번뜩였다. 특히 시합에 참여하는 소년들의 눈알은 거의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방금 굴러 떨어졌잖아! 다쳤잖아? 그런데 어떻게 또 올라갔지?’
설마 반칙을 쓴 것이라면 황제는 마땅히 현천기의 심사 자격을 박탈하고, 시합에서 물러나게 해야 했다.
잘 모르는 이들은 현천기가 별 대수롭지 않은 인물이라 생각해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현천기를 잘 아는 이들은 감히 사람을 교체하라는 간언으로 황제의 노여움을 살 수 없었다. 이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섭영진은 고개를 들고 무대를 바라보면서 쉬지 않고 기침을 해댔다. 곁에 있던 소태감이 이를 보고 얼른 따뜻한 차를 올렸다.
섭영진 뒤에 있던 고원은 또 차를 마시는 섭영진을 보며 마침내 참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차를 많이 마시는데 어떻게 한 번도 화장실을 안 가냐?’
섭영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원은 답이 없자 더욱더 끈덕지게 굴었다. 고원은 ‘적’이 한 명 사라지면 자신의 승산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라 여겼고, 특히 섭영진이 물러나면 무예 대결만큼은 자신이 패권을 거머쥘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를 위해서는 문무를 두루 겸비한 섭영진을 먼저 제거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고원은 음모를 꾸미면서 드는 죄책감을 이겨내고 다시 형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영진아, 있잖아… 내 생각에는 네가 상 공주와 다정한 시간을 보낼 때 기침이 나오는 건 정말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다 혹시 공주에게 옮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러니까 그냥 물러나!”
결연하게 말을 마친 고원은 단순무식한 눈을 깜빡이면서 열심히 섭영진을 바라보았다. 마치 진심으로 그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양.
‘그러니까 얼른 이 형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당장 꺼져. 왜 아직도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한참 동안 고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섭영진은 다시 한 번 쇠약한 기침을 두어 번 한 후, 고원에게 손짓해 고개를 숙이고 귀를 가까이 대도록 했다. 고원이 어쩔 수 없이 고귀한 고개를 숙이자 섭영진이 말했다.
“다음에 외출할 때는 머리를 더 많이 달고 다니세요. 콜록콜록…….”
고원은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머리는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더 많이 달고 다니라는 거지?
“섭영진,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앞으로 이 몸이 널 상대하나 봐라!”
그러나 다음 순간 고원은 또 섭영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의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 두 사람은 왜 안 싸우고 가만히 서 있는 거야? 젠장! 설마 사제 관계라고 봐주는 건 아니겠지!”
섭영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고원이 방금 한 다짐을 지켜 자신을 상대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대 위에서 도도는 졸음을 이겨내며 사부께 얼른 손을 쓰라고 눈짓했다. 조금 전 그는 뭐에 홀린 양 첫 번째 관문의 시험 답안을 열심히 써냈다.
‘역시 미색에 홀리면 판단력을 상실하나 보군.’
그러나 지금은 그저 졸려 죽을 것만 같을 뿐인 도도는 일찍 패하고 무대에서 내려가 마냥 자고만 싶었다.
‘그러니까 사부님 어서 덤비세요!’
현천기는 제자가 빨리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아는 도도는 채 삼 분을 깨어 있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오늘은 어째서 사식간四息間이 지났는데 아직도 잠들지 않은 거야? 설마 어린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현천기가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도도, 천국이 눈앞에 있는데 왜 하필 문이 없는 지옥으로 달려드는 게냐. 네 뒤에 어떤 나부랭이들이 있는지 좀 봐라. 네가 달려든다고 되겠느냐? 됐고, 알아서 무대 아래로 굴러라.”
차마 제자를 가혹하게 대할 수 없던 현천기가 진심으로 충고했다. 그러나 원래 굴러 떨어져 얼른 잠이나 자려 했던 도도는 순간 갑자기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는 걸 느꼈다. 조금 전 금 연주가 떠올랐던 것이다.
도도는 인과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이왕 가고 싶지 않아진 거, 속전속결로 끝내고 돌아가서 자기로 했다.
순간 현천기는 도도의 조상 무덤을 파내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이 썩을 놈은 방금 스승에게 먼저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현천기는 이 세상 모든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아무런 반격 없이 곧바로 무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장내에는 적지 않은 소란이 일었다. 그러나 황제가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세 번째로 무대에 오른 사람은 황후와 매우 친분이 있는 소년이었다. 당자의 아들 당승운은 구염상보다 한 살이 어렸다.
장서열의 얼굴에 살짝 총애하는 빛이 어렸다. 그러나 소년의 실력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그 순간 당승운은 이미 발길질에 차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현천기는 전력을 다했고 상대에게 조금도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인정사정없는 주먹질과 치명적인 발길질이 이어졌다.
어린 당승운은 잘 부탁드린다는 말조차도 할 새 없이, 잔혹한 현 대인에게 채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맞았다. 당씨 가문의 실력과 도도함을 뽐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힘이 풀린 당승운의 손과 입가에는 선혈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결국 헌원가는 참지 못하고 조금도 반격할 힘이 없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런 그녀를 당자가 꽉 붙잡으며 전에 없이 매서운 어투로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그러나 당자의 눈빛은 부인보다도 더욱 걱정스러웠다. 그는 바닥에 누워 쉬지 않고 내팽개쳐지는 아들을 보며 마음을 졸였다. 동시에 당자는 점점 요망해지는 현천기의 기세에 한탄하고, 자신의 아들과 권택진이 다른 차원에 있다는 사실에 유감을 느꼈다.
당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노는 데 신이 난 현천기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현천기는 손안의 애송이를 즐겁게 괴롭혔다. 도도를 대할 때와 달리 명백한 차별 대우였으나, 이는 그의 제자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마음 없이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연회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조금 전 도도가 왜 올라오자마자 무대 아래로 구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이따가 다시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현천기는 당승운처럼 부마 선발을 위한 연회를 잘난 척하기 위한 무대로 여긴 애송이들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고자 했다.
게다가 현천기는 특히 당자 일가와 그들이 키워 낸 어린 패왕霸王을 싫어했다. 과거에는 당자가 뻔뻔한 성격을 내세워 장서열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더니, 이젠 그의 아들이 아버지보다 한 술 더 떠 어린 공주에게 집적거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이런 물건이 시합에 참여하러 와서 상 공주를 아내로 얻겠다고?’
현천기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더욱더 매섭게 당승운을 패대기쳤다.
장서열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손안의 손수건을 꼭 쥐었다. 앞에 있는 쟁반을 현천기의 얼굴에 던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그러나 정말로 현천기의 얼굴에 물건을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녀는 불쾌한 얼굴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대체 현천기를 무대로 올려 보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