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35
자리에 앉아 말없이 잔을 들던 현천기는 문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만일 과거 그가 모든 것을 걸어 서풍엽과 황제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저 사랑스러운 아이는 자신의 딸이지 않았을까?
어쩌면 현천기에게도 가족이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몽글몽글하고 귀여운 딸이 그를 아버지라 부르고, 그 역시 딸의 성년을 맞이하여 성대한 연회를 열어 사람들 앞에서 딸을 선보이지만 아무도 딸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또한 장서열의 딸을 업신여기고, 자신이 최고로 잘난 줄 아는 자들의 머리를 떨구게 만들어 세상에는 아무리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것이다.
현천기는 문득 이 연회가 정말 상 공주를 위해 열린 것인지, 아니면 황실의 권위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인지 헷갈렸다. 주국은 지난 스무 해 동안 여러 나라를 정복했고 이기지 못한 전투가 없었다. 풍윤제 시절 아홉 명에 불과했던 고위급 장군은 그 수가 점점 늘어나 지금은 서른 명에 달했고, 장군 개개인은 모두 그 위세가 대단했다.
장군들은 대체적으로 건방지고 남을 업신여기며 함부로 행동하기를 좋아했다. 물론 그들의 자신감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젊은 관원들 중에는 분명 조정의 융숭한 대우 아래 지나치게 의기양양하여 안하무인으로 구는 이가 존재했다.
현천기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여기 있는 수많은 문무관 가운데 스스로를 우월하다 여기는 자가 얼마나 많을까? 그들은 자신들을 서로 겨루게 만든 황제의 결정을 얕보았고, 심지어 상 공주를 위한 부마연조차 경시하고 있었다.
상 공주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들의 눈에는 일개 아름다운 여인일 뿐, 그녀 자체는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상 공주를 쉽게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거로 믿었고, 그녀를 황실의 공주로서 대우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현천기는 다시금 황제에게 탄복했다. 구염락은 정치적 승자일 뿐만 아니라 악랄한 부친이었다. 아마 오늘이 지나면 공주를 안중에도 두지 않던 저 사내들은 더는 상 공주를 무시할 만한 면목이 없게 될 것이다.
현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손에 든 차를 들이켠 그는 저 애송이 녀석들이 망신을 당하기만을 한껏 기다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저 핏덩이들이 무슨 자격으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은 부모님께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망신을 당하고, 다시는 감히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게 혼쭐이 나야 마땅했다.
다시 사람들 앞에 선 소리자가 불진拂尘을 팔 위에 늘어뜨렸다. 그의 높고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첫 번째 문제! 신하가 보고하면 천자께서는 들으십니다. 그렇다면 신하는 마땅히 어디까지 직언을 올려야 하는지요? 향 하나가 타는 시간 안에 답안을 적으십시오!”
백여 명의 준수한 사내들 앞에 순식간에 붓과 먹, 벼루와 종이가 놓였고, 시중과 감독을 겸하기 위해 궁녀와 태감이 한 명씩 따라붙었다. 주어진 시간까지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향 하나가 모두 타고 나면 손안의 답안지는 회수된다.
주변에 앉은 고관들과 그 가족들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시험에 참가한 모두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자리에서 답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보자 돌연 숙연해지며 함께 긴장하기 시작했다. 장내는 이미 단순히 부마를 선발하기 위한 연회가 아닌, 중요한 각축을 벌이는 장소로 변해 있었다.
그곳에는 규방의 소녀들도 있었다. 부모님 뒤에서 답을 써 내려가는 남자들을 몰래 바라보는 눈빛에는 실망과 질투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연경의 좋은 남자들은 모두 상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녀들의 마음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녀들은 공상에 잠겨 자신을 속이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남자는 두려운 황제의 권력과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시험에 참석하게 된 거라고,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자신일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그가 왜 이따금씩 자신을 쳐다보고, 조금도 공주를 언급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여태껏 마음에 둔 이가 저렇게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소녀들은 순간 초조함과 찌를 듯한 마음의 통증을 느꼈다.
소녀들의 원망 섞인 시선이 높은 자리에 앉아 홀로 차를 마시는 상 공주에게 집중되었다. 본래 소녀들은 단지 높은 지위 때문에 돋보이는 것일 뿐인 상 공주와의 비교를 통해 역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려 했지만, 공주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얼른 시선을 돌려야 했다.
열등감이 솟아올랐다. 조금 전 훌륭했던 공주의 금 연주 솜씨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소녀들은 어느 모로 보나 공주의 발끝에도 못 미쳤다.
어머니의 곁에 앉아 있던 구염상은 쉬지 않고 자신을 건드리는 오라버니를 향해 가끔 눈을 부라릴 뿐, 아래에서 답을 적는 사내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구염황은 대담하게도 부모님을 지나 죽간으로 누이동생을 콕콕 찌르면서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상아… 상아.”
짜증이 난 구염상이 눈을 부릅뜨고 오라버니를 흘겨봤다.
“뭐 하는 거예요……!”
구염상은 당장이라도 체통을 생각하라고 소리 치고 싶었지만 이미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인 오라버니를 생각하며 그만두었다.
구염황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 있어?’
구염상은 어쩔 수 없이 아래를 한 바퀴 훑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실망한 구염황은 순간 아래 있는 신하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저 멍청한 것들이 내 누이동생의 마음 하나 움직이지 못하다니! 정말이지 사람 구실 할 자격도 없는 것들!’
그러다 또 무슨 생각이 났는지 몰래 숨겨두었던 긴 죽간으로 구염황이 다시 누이동생을 콕콕 찔렀다. 구염상이 차가운 눈빛으로 죽일 듯이 쏘아보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답했다.
‘또 왜요!’
구염황은 화를 내는 누이동생을 무시했다. 좋은 오라버니는 누이동생의 불만에 당연히 반격하지 않는 법이다.
‘너 혹시 저런 늙은이들 좋아하는 거 아냐?’
구염황은 아버지를 연모하는 소녀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구염상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식솔들을 거느리고 온 ‘늙은’ 신하들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오라버니에게 묻고 싶었다.
‘만일 내가 저들 중 마음에 드는 이가 있다고 하면, 오라버니는 그들을 이혼시키고 자식들을 몰살하기라도 할 거예요?’
구염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과 동시에 구염황은 자세를 바로잡고 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누이동생이 권서함이나 서비절, 혹은 류소경 같이 중년임에도 불구하고 매력이 느껴지는, 외모가 번지르르한 신하들을 좋아할까 봐 두려웠다.
류소경을 떠올린 구염황이 자기도 모르게 그의 자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일전에 어머니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류소경은 과거 ‘류절후柳絶后’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암암리에 ‘류무후’라고 불리고 있었다. 아마도 40세가 다 될 때까지 혼인을 하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성정 때문일 터였다.
놀라운 건 비록 류소경에게 아내가 없어도 그간 류씨 가문이 계속해 상승일로를 걷고 있다는 점이었다. 류소경이 혼인을 하지 않자 이들 가문은 류소경 세대의 사촌과 서출 자녀들을 끌어들여 가문의 새로운 세력을 만들었고, 고관대작의 우두머리로 도약했다. 그 예로 류소경의 사촌 형인 류소양은 이미 정3품 벼슬에 올라 있어 품계가 류소경보다 1품이 낮을 뿐, 현재는 류씨 가문 후부의 자타공인 후작 나리였다.
즉, 류씨 가문에서 류소경 다음 서열은 류소양이었다. 또한 류소경은 처자식이 없지만, 류소양은 자손이 많은 데다 아들딸 모두가 인재였기에 오히려 비공식적으로는 류소경보다 한 수 위였다. 장래의 잠재력 또한 류소경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비공식은 비공식일 뿐, 류소경은 황제의 동기이자 권 승상과의 우정 때문에라도 여전히 고관대작이었고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류소경이 죽지 않는 한 류소양은 아무리 뛰어나도 류소경에게 기대어 살아야 했다.
류소경을 바라보던 구염황이 그 옆에 앉은 류소양을 힐끔 보았다. 그 역시 봐줄 만한 중년이었으나 번잡한 가족 관계와 나이가 들어도 줄지 않는 방탕한 행동은 봐줄 만하지가 못했다. 구염황은 그의 정실부인 자리에 앉은 묘령의 소녀를 바라본 후 놀라움에 시선을 돌렸다.
구염황은 저런 아버지에 의해 장자로 보내진 적녀嫡女(정실부인의 딸)가 생선을 고르고 농사를 지을 줄 아는 것 또한 그리 놀랄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본처가 일찍 죽어 다행인지 모른다. 아니었다면 류소양이 정실부인을 바꾸는 속도에 맞춰 장자로 보내진 그 류씨 가문의 아가씨 또한 적녀라는 신분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소리자의 고양된 목소리에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구염황이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되었으니 모두 작성을 멈추십시오!”
구염황은 즉시 눈빛을 반짝이며 장내를 바라보았다.
첩첩이 쌓인 답안지가 황제와 태자의 손에 빠르게 전달됐다. 그러나 황제는 검토 없이 곧장 답안지를 한림원 대학사大學士에게 넘겼다. 동시에 한림원 대학사의 뒤로 여섯 명의 백발 노인들이 나타나 답안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여섯 명이 노인이 누구인지 알아본 관리들은 놀라서 작지 않은 비명을 질렀다. 어떤 이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몸소 스승을 뵈러 가려 했다.
그러나 소리자는 사람들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곧이어 노인들과 한림원 대학사 앞에 펼쳐진 병풍 세 개는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했다. 다시 불진을 휘두르는 소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번째 관문은 무武입니다! 현천기 대인을 모시겠습니다.”
막 차를 마시려던 현천기는 별안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흥분이 솟구쳤다.
‘하하! 애송이들을 혼내 줄 기회를 주다니!’
현천기는 송구한 척 이미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목판으로 만든 무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엄숙하고 근엄한 그에게서는 나이를 앞세워 소년들을 학대하려는 옹졸한 모습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대 위를 지키는 강직하고 올곧은 협객 같았다.
시합에 참여한 젊은 인재들은 현천기가 나오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두 번째 관문은 어렵지 않겠구나.’
현천기는 문관에 속했다. 비록 권법을 조금 할 줄 알긴 해도 신통치 못했고, 고문하고 자백을 받아내는 데만 능통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간 현천기의 활약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은 유감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중에서 고원과 섭영진, 그리고 도도가 가장 유감스러워했다.
도도는 괴로워하며 생각했다.
‘그래도 사부님이 나는 너그럽게 한 번 봐 주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