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11)화 (411/449)
  • 외전 구염상 2-34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후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구염상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막 꿈에서 깬 사람처럼 무릎을 꿇고 황궁이 떠나가라 외쳤다.

    “공주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구염상이 위엄 있게 고개를 돌렸다. 눈빛은 차갑고 목소리는 냉담했다.

    “일어나세요.”

    이어 유모의 부축을 받아 어머니의 곁에 앉은 그녀는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감사드립니다. 공주 전하!”

    구염락과 장서열, 구염황은 구염상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국연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빼어나고 영특한 딸은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얻을 수 있었다. 설령 가시덤불을 헤치고 죽음을 무릅쓰게 하여도 그들은 기꺼이 감수하리라.

    구염락의 거만한 시선이 아래에 있는 이들을 훑어보았다. 누구 하나 감히 고개를 들고 상아裳儿를 보지 못하자 그는 몹시 만족해하며 소리자에게 대연회의 규칙을 낭독하라고 눈짓했다.

    봉익은 조금 전 마음을 사로잡은 상 공주의 모습에서 오랫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구염상이 매우 아름답다는 건 알고 있었다. 봉익은 이미 그녀의 무수한 모습을 보아 왔다. 매번 그녀를 만날 때마다 봉익은 이번이야말로 아름다움의 한계를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매번 그의 편협한 착각이었다는 것만 깨달을 뿐이었다.

    오늘 구염상은 더할 나위 없이 위엄 있고 고귀했으며, 평소의 장난기가 지워진 채 차분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고귀한 모습 그대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다. 그저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것만이 그들이 상 공주에게 줄 수 있는 전부였다.

    봉익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모든 이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는 걸까? 역시나 그녀는 그녀답게 부질없이 사람을 유혹하지 않았다.

    소리자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고원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 그는 이제껏 단순하게도 상 공주는 태자와 같은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누이가 닮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나 고원은 일순간 그런 생각을 품고 상대를 비웃었던 스스로가 추잡하게 느껴졌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상국연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고원은 처음으로 자신을 직시했다. 갑자기 왠지 모를 열등감이 느껴졌지만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는 정서가 공포에 질릴 찰나에 있는 그를 다급히 안정시켰다.

    섭영진은 고개를 숙이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입가의 쓴웃음은 이미 옅어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놀라 있었다. 조금 전에 그는 공주 신분인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를 얻기 위해 우열을 겨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람 마음을 어지럽히는 용모와 그녀의 타고난 기세에 오늘 얼마나 많은 사내가 매료됐을지 모른다.

    문득 권택진을 떠올린 섭영진은 무심코 그를 쳐다봤다. 권택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그의 부친처럼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그가 정말 상 공주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경을 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섭영진은 처음으로 아마 전자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조금 전 상 공주가 장정들 무리 속에서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공주가 첫눈에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미모 외에도 독보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도도는 이미 소리자의 낭랑한 목소리 속에 잠들어 있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은 모습을 교묘하게 감춘 그는 머리를 꼿꼿이 세워 수많은 연습 끝에 익힌 안정적이고 굳건한 자세를 선보이고 있었다.

    봉익은 조금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도도가 공주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보다 한숨 더 자는 게 더 알찬 선택이라 믿을 것이다. 힘을 비축하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 도도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지 않을 터였다.

    무리에서 가장 먼 곳에 있던 초근언은 조금 전 아름다운 장면이 갑자기 사라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가 상 공주라니 의외였다.

    초근언은 쓴웃음을 지었다. 더는 함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적자嫡子(정실부인의 자식)가 아니라는 사실 외에도 그는 나라를 뒤흔드는 명성을 지니고, 각 방면에 재능이 있는 인물들의 적수가 못 되었다. 하물며 문무와 파벌을 가리지 않고 벌이는 경쟁에 모두가 뛰어든다면 무공이 보통 수준인 그는 첫 관문도 통과하지 못할 게 뻔했다.

    초근언은 처음으로 신분 외의 것에 깊은 무력함을 느꼈다. 그는 언제나 좋지 못한 신분 탓에 기회를 놓쳤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는 미천한 신분 외에도 그 자체가 본래 뛰어나지 못했다.

    초근언은 갑자기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자신을 못살게 구는 주모와 부친의 편애가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순간 마음속 깊이 감춰 뒀던 원망이 싹 사라지는 듯했다.

    이제껏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한결같이 기술을 익혀 왔던 그는 난생 처음 자신의 발아래 길이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 타협하며 스스로 희생이라 여겼던 것들은 실은 나약함의 표현이었다. 이를테면 헌원 상서는 일개 평민의 몸으로 고관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그리고 초근언은 지금 헌원 상서보다 더 높은 출발점에 서 있었다. 그러니 어찌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신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런 행동을 하는 건 겁쟁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길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초근언은 왼쪽 손을 꽉 움켜쥔 채 스스로에게 결연히 말했다. 오늘 최선을 다해 겨루겠다고. 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더 높이 올라갈 것이라고!

    어화원 하늘에 울려 퍼지는 소리자의 말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문무관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겨루는 경쟁의 첫 번째 관문은 글짓기이며, 두 번째 관문은 무예 시합이었다. 기권은 없고 두 번의 기회도 없다. 한 관문이라도 탈락하면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자격을 잃는다.

    긴 시험 규칙을 읊은 소리자는 냉랭한 눈빛으로 빼곡히 모여 있는 무리를 향해 높이 외쳤다.

    “첫 번째 관문은 문입니다! 우선 상 공주께서 금을 연주하시어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고 축원할 것입니다!”

    “공주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구염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비처럼 하늘하늘한 치마가 태양 아래서 살랑이고 붉은 비녀가 가볍게 흔들렸다. 일순간 모든 이의 마음속을 씻어 내린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구염상은 국화대에 있는 고금古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국화향이 물씬 풍기는 가운데 미인은 옥처럼 고왔다. 맑고 깨끗한 금 소리는 어떠한 예고도 없이 흔들리는 붉은 비녀처럼 순식간에 모든 이의 마음속에 흘러들었다.

    금 소리는 빠르지도 높지도 않았다. 높은 산과 흐르는 물처럼 청아하거나 고귀하지 않았고, 천군만마가 내달리듯 호방하지도 않았다.

    구염상의 연주는 서재에 앉은 소녀가 어른들이 없는 틈을 타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듯 신선함을 주는 동시에 또 가벼운 정서를 표현하는 것 같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마음을 휘감는 호기심을 포착할 수 없었다.

    금 연주가 이어졌다. 구염상은 마치 물길이 보이는 벽지원 연못에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와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을 마주한 사람처럼 느긋하고 근심이 없는 사람 같았지만, 또 옅은 시름과 자신을 위로하는 듯했다.

    연주는 단지 한 곡만 연주한 듯 매우 짧아서 귓가에서 금세 사라졌다. 구염상이 황후 곁으로 다시 돌아가 앉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제야 곡이 끝났음을 번뜩 깨달았다.

    모든 사내들이 순식간에 열광했다. 연주에서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마치 궁지에 몰렸다 구출된 용사처럼 호전적인 발걸음으로 모든 방해물을 격파할 듯 격앙되어 있었다.

    그러나 몇몇은 석연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쾌하고 아름다운 연주 속에 잠시 스쳐간 시름은 분명 고귀한 신분의 어린 공주가 알 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고, 세상의 모든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저 소녀는 자신이 무엇을 연주했는지 이해한 걸까?

    헌원사사가 느낀 감정은 누구보다도 강렬했다. 짧은 금 연주를 통해 그는 마치 다시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을 경험한 것 같았다. 이제야 겨우 자주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헌원사사는 연주 소리가 흩어진 그 순간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함을 느꼈다. 다시는 갑갑한 진흙탕 속에서 발버둥 칠 필요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관망하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헌원사사는 구염상의 연주 속에서 바다와 하늘을 내리쬐는 짙푸른 태양까지 포착했다. 높은 자리에 앉은 그녀가 가벼이 연주한 곡은 오로지 한 곡뿐이었지만 이는 그의 머릿속을 온통 어지럽게 만들었다. 연주에서 정신을 차린 헌원사사는 또 다시 아리송함을 느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또 어떻게 삶의 괴로움을 알고 있는 거지?’

    봉익은 단지 쓴웃음만 지었다. 쓴웃음을 짓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 공주는 아름다움으로 그를 다시 놀라게 했다. 어린 나이에 이런 탄복할 만한 재능을 지녔다니. 설마 그녀가 십오 년 동안 다른 사람의 생을 살기라도 했단 말인가. 말썽꾸러기 같은 모습 이면에 이렇듯 놀라운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니!

    ‘만일 금 연주가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거라면, 그녀의 마음은 어느 단락에 머물러 있는 걸까.’

    어쩌면 어느 단락도 구염상이 드러내지 않은 부분을 설명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시선을 받고 그 시선을 멈추게 할 자격이 있을까?’

    도도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꿈속에서 나비 한 마리가 방에 들어오려 하는 것을 보았다. 바깥에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창문을 열었지만 나비는 뒷모습만 남긴 채 황급히 빗속으로 날아갔다. 그가 막 몸을 날려 나비를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에 살랑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나비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도는 잠에서 깨어났다. 굳어 있는 낯빛과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고원은 마음이 매우 초조하고 조급했다. 그는 금 연주 속에 담긴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단지 공주가 몹시 예쁘다고만 생각했다. 국화도 예쁘고 공주도 매우 예뻤다. 또한 금 연주는 매우 듣기 좋았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그가 이제껏 들었던 그 어떤 연주보다도 좋았다. 문제는 고원이 문예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어떡하지… 설마 첫 관문에서 탈락하는 거 아냐? 말도 안 돼! 그래, 그냥 속임수를 쓰자! 속임수를 쓰는 거야! 폐하께서도 부정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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