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10)화 (410/449)
  • 외전 구염상 2-33

    구염상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고원이 무심코 치거나 섭영진이 갑작스러운 시선을 보내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를 따르는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한 그녀는 사촌언니와 함께 조용히 물러갔다.

    고개를 숙인 섭영진은 찻잔 가장자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후각이 예민한 그는 구염상에게서 처음에 몇 차례 왔던 궁녀와 다른 향기를 느끼고 이를 수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객인 줄 알았던 그는 소녀를 처음 본 순간 상대가 누구인지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오로지 용모 하나로 타인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황후와 상 공주는 모두 빼어난 미모를 갖고 있다. 그리고 방금 그 소녀는 황후 만한 나이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아름다운 용모였다. 어쩐지 태자가 그들 형제에게 그토록 누이동생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있었다. 태자는 이들이 공주를 보고 돌아가지 않으려 할까 봐 염려한 거였다.

    섭영진은 조금 전 흉악한 무리 곁을 지나면서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던 공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돌연 사람들에게 과한 보호를 받는 공주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녀는 조금 전 사내들이 오만하게 큰소리로 호령할 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무례하게 쳐다봤을 때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흥미롭군.’

    꽃담 너머에서는 구염상이 새옷으로 갈아입은 두 궁녀에게 쟁반을 돌려주며 흥분한 듯 사촌 언니에게 물었다.

    “어때요, 언니? 봤어요?”

    조금 전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던 무례한 사건들을 구염상은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동생의 말에 장오월은 냉랭하게 콧방귀를 뀌며 구염상과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구염상은 뒤를 따르던 시녀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먼저 물러가거라.”

    이미 두 사람은 궁녀 복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시녀가 뒤따를 필요가 없었다. 홍석과 장오월의 유모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답했다.

    “공주 전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시녀들을 보낸 뒤, 구염상은 화가 난 사촌 언니를 다시 쳐다봤다.

    “왜 그래요?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면 예비 형부가 예쁜 언니를 보고 자제하지 못하기라도 한 거예요?”

    장오월이 별안간 이를 악물었다.

    “그가 감히 그랬을 리가요!”

    그러나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난 장오월은 문득 그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치가 정말로 자신을 눈여겨보았고, 사람을 판단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어쩌면 방금 전 궁녀가 자신이라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처음의 반응만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장오월이 따분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내 찻주전자를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꽃만 뚫어지게 쳐다봤죠. 멍하니 뭘 하는 건지, 원.”

    구염상은 탐색하듯 장오월에게 팔짱을 꼈다.

    “실망했군요.”

    장오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전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니 실망할 것도 없어요. 단지 그냥 시시하다고 느꼈을 뿐이에요. 오랫동안 기대했는데, 결국 그 사람도 두 손 두 발에 머리 하나 달린 인간일 뿐이네요. 갑자기 흥미가 떨어졌어요.”

    구염상은 이런 대답을 듣게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됐지? 그래도 상대에 대한 견해는 있을 것이 아닌가. 잘생겼다 못생겼다, 혹은 마음에 든다, 안 든다라도.

    구염상은 전생에서 헌원사사를 처음 보았을 때 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언니는 어째서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거지?

    잠시 생각하던 구염상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언니는 그가 싫어요?”

    “하, 그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환상이 사라지고 나니까… 흥미가 없어요.”

    말을 마친 장오월이 갑자기 우울하게 말했다.

    “앞으로 혼인하면 늘 숙녀처럼 굴고 외출도 못 하고, 그저 집에만 콕 박혀 있어야겠죠?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방귀도 마음대로 못 뀌고요. 심지어 그가 기분이 안 좋을 땐 왜 그러냐고 감히 묻지 못할지도 모르죠.

    매일 아침 제일 먼저 그의 시중을 들고, 다음에는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마지막으로 집안을 관리해야겠죠. 집안 관리를 잘하는 건 며느리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잘하지 못하면 무능력한 며느리라는 소리를 듣게 될 테니까요.

    지금처럼 자주 공주 전하를 찾아와 놀지도 못할 테고, 외출할 때는 시어머니와 그에게 보고해야 할 거예요. 날개 꺾인 작은 새처럼 네모반듯한 방안에 갇혀 살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거죠. 그 중에서도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내가 그에게 첩실을 들여 줘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그의 어머니라도 돼요? 왜 내가 남편을 손수 다른 여인에게 보내야 하죠? 하지만 남편에게 첩실이 없으면 현모양처가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거예요. 그러니까, 만일 이치가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난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서라도 이치에게 첩을 들이라고 강요해야 한다고요. 어때요. 전하 생각에도 내가 미친 것 같나요?”

    구염상은 입을 벌린 채 장오월의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장오월이 한 말은 구염상이 전생에서 며느리가 되었을 때 이미 몸서리치게 겪은 일들이었다. 결국 자신과 시댁 중 하나를 선택해야 안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

    구염상은 결코 좋은 며느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선택했고 시댁을 버렸다. 심지어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그곳을 망가뜨렸다. 그녀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고 모르는 척 끝내 좋은 며느리 노릇을 하지 않았다. 또한 주소유가 자신의 혼수를 원한다는 걸 알았을 때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 두 손으로 손수 이를 갖다 바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구염상은 남편에게 첩을 들여 주지 않음으로써 현모양처의 덕을 포기했고, 죽을 때에도 헌원사사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가 평생토록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다 결국 자신의 뒤를 따르게 했다. 심지어 구염상은 헌원사사가 구염예의에게 손을 대지 않은 것에 대해 한 번이라도 얼굴을 펴고 웃어준 적도 없었다.

    따라서 장오월의 물음에 구염상은 대답할 자격이 없었다. 그녀 또한 한 가문의 며느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도 없는데 어찌하여 사랑을 위해 교만을 부리겠는가.

    가장 중요한 건, 전생에서 그리 자랑스러운 삶을 살지 못했음에도 그녀는 상처를 입으면 열 배, 백 배로 갚아주었다는 사실이었다. 하물며 이번 생에서 그녀는 전적으로 자부심을 느낄 만한 삶을 살고 있으니, 아무리 단순하고 작은 문제라도 그녀는 반드시 시어머니에게 싫은 내색을 드러낼 것이다.

    장오월은 구염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애가 뭘 알겠는가. 사촌동생은 공주인 데다 태자가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 하고 싶은 건 다 하며 살 것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부마도 구염상에게 어찌하지 못할 터였다.

    장오월의 눈에 씁쓸함이 스쳤다. 그녀는 구염상과 달랐다. 바깥세상이 얼마나 근사한지 알게 됐지만, 영원히 날아갈 능력이 없었다. 이씨 가문은 그녀의 가문보다 지위가 낮기는커녕 오히려 기반이 더 확고했고, 이치는 그녀의 아우들보다도 더욱 전도가 유망했다. 만일 장오월의 고모가 황후가 아니었더라면 그녀 또한 이 씨 가문과의 혼인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지금처럼 신경질을 부리며 하고픈 대로 살 수 있겠는가.

    장오월은 아직 펼쳐보지 못한 소녀의 마음이 어이없이 흩어져 사라지는 걸 느꼈다. 미래에 대한 깊은 무력감과 함께 혼인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재미없는 일을 계속 생각해 봐야 뭐 해!’

    장오월은 복잡한 생각과 함께 이치에 대한 마지막 남은 동경마저 버렸다. 다시 사촌동생을 놀릴 기분이 된 그녀가 갑자기 구염상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

    “말해 보시지요. 누가 전하의 눈에 들었는지! 아까 그 안에 공주 전하의 목표물이 두 명이나 있었잖아요.”

    구염상이 얼른 빌었다.

    “켁, 숨을 못 쉬겠어요!”

    장오월은 태연했다.

    “말하면 놔 드리지요.”

    구염상이 서둘러 답했다.

    “둘 다 마음에 들었어요. 다 마음에 들어서 내일 혼례를 올릴 거예요.”

    그 말에 장오월이 재빨리 구염상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 줄 거예요!”

    구염상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언니, 그만 해요! 하나도 안 무서워요!”

    “너희 두 사람! 그래! 너희 둘 말이야! 어디서 뛰는 것이냐! 이리 와서 일을 도와야지!”

    노관사가 부랴부랴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얼른 가거라!”

    장오월이 슬며시 구염상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도망갈 거죠?’

    “두말하면 잔소리지.”

    노관사는 별안간 달려서 도망치는 두 계집을 보고는 화가 나서 불진拂尘(먼지떨이처럼 생긴 장신구)을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불같이 소리쳤다.

    “어찌 감히! 어느 궁에서 일하는 궁녀냐? 어느 궁이냐니까! 너희 주인에게 너희를 단단히 교육시키라 해야겠구나! 뭘 구경하느냐! 어서 빨리 일이나 하지 않고!”

    * * *

    대연회의 서막이 올랐다. 백관이 열을 지어 엄숙하고 정중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 귀청을 찢는 만세 소리에 꽃잎들도 살랑살랑 흔들리는 듯했다. 중년이 된 영덕제는 여전히 용맹하고 기운 넘치는 풍채와 준수한 매력으로 그 자리에 있는 소녀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태자는… 일단 체중을 줄이고 다시 이야기해야 했다.

    구염락은 뚱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이성의 마음을 홀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일찍부터 적응이 된 장서열은 이를 자연스레 모른 척했다.

    “경들은 자리에 앉으시오.”

    구염락은 냉정하면서도 위엄이 넘쳤다. 사람들이 모인 이유를 떠올리자 더욱 온화하게 굴 수 없었다. 하지만 국화를 감상하기 위해 연 연회이니 어찌 국화를 감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곧 문무 관원들의 다툼이 시작되면 총교두总教头를 시켜 다들 자기 주제를 알도록 기를 꺾어놓으라고 해야겠군.’

    “상 공주 납시오!”

    국화 향기가 흩날리는 가운데 장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몽환 속 선녀 같은 형체가 가을의 선율을 타고 국화꽃이 흩날리는 지면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구염상은 세상에 느닷없이 난입한 선녀처럼 속세로 낙하한 성스러운 노을처럼 고요히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쪽빛 얇은 비단은 눈부시게 넘실대고, 무릎까지 닿는 긴 머리카락은 바람에 살랑였다. 그녀는 꿈결 같은 외모로 천천히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마음을 놀라게 하고 혼란에 빠뜨렸다.

    화려하게 치장하여 구염상의 모습은 금지된 상자를 연 것처럼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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