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09)화 (409/449)
  • 외전 구염상 2-32

    이치처럼 가장자리에 앉은 섭영진이 기침을 했다. 이치는 그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 오랫동안 기침을 하면서도 아직 죽지 않은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섭영진은 황제의 사람이었고, 이치는 태자의 사람이었기에 둘은 아주 미묘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상대의 전략적인 안목을 인정하긴 했지만 외부의 적을 상대하는 전장이 아니고서는 평소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말을 하지 않는 수준이 아닌, 황제와 태자가 충돌을 일으키면 두 사람은 각자의 진영에서 죽기 살기로 대적했다. 하필 두 부자는 자주 다퉜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좋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섭영진 쪽 앞잡이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는 감히 드러내 놓고 이치를 일컫지는 못했지만, 조금 전 이치에게 아부하던 이를 공공연히 비방했다.

    “담 공자께서 한 말은 옳지 않습니다. 소위 병력이라고 하는 것은 물러설 수 없고, 탁상공론은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호국은 당초 지리적인 험준함과 백 년간 쌓아온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와 싸웠기에, 병력만 가지고 전쟁의 길고 짧음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정예 병사를 데리고 참전한다 해도 여전히 호국을 더욱 빨리 무찌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적은 영토가 아니기 때문이죠.”

    담 공자는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영토와 싸우는 게 아니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정 공자, 설마 문화와 소양이 실질적인 병력과 무기가 되어 우리의 백만 대군을 막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아무리 깊이 있는 문화라고 해도 점령 후 건설을 늦추기만 할 뿐, 출병한 뒤 승리를 거두는 속도와는 그리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갑자기 누군가가 하하 웃으면서 큰 소리로 난폭하게 말했다.

    “투항을 권할 때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해야 하지, 하하!”

    섭영진과 이치는 동시에 같은 사람을 쳐다본 뒤, 다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멋진 근육을 쓰다듬고 있는 고원은 그들이 자신의 완벽한 몸매를 질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시하는 눈빛으로 허약한 닭처럼 비실대는 두 사내를 쳐다보았다. 백성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대장군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기다니.

    고원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위풍당당함을 뽐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왜 이리 시끌벅적한가 했더니 여기 아우들이 모두 있었군.”

    장군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입을 다문 채 고 장군을 위하여 양 갈래로 길을 내주었다.

    고 장군은 아무도 선택하지 않고 공평하게 두 아우의 중간에 앉았다. 그는 어느 기생오라비에게도 아부를 떨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특별한 신분을 지닌 자신이 혹여 섭영진의 곁에 앉았다가 이치가 질투라도 하면 어찌하겠는가. 그 반대의 상황이어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일 테고.

    그래서 고원은 스스로 살길을 개척하는 외로운 영웅의 길을 걷기로 했다. 게다가 한껏 위엄 있게 차려입고 온 이상 그는 홀로 자신만의 매력을 뽐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위세 넘치고 탄탄한 몸매를 본 상 공주는 아마 첫눈에 반해 헤어나지 못하리라.

    “자, 계속 이야기들 나누시게. 자네들의 실력을 보여 줘.”

    섭영진과 이치는 과도하게 자기애에 빠진 인간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동시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각자의 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또 다시 동시에 앉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고원은 득의양양했다. 과연 자신은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두 기생오라비는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싶지만 쑥스러워서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괜찮다. 나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니 이따가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인사를 건네야지.’

    “고 장군, 오늘 입은 옷이 참 영민하고 용맹해 보이십니다. 옷의 제단비가 만만치 않으셨지요? 이 아우도 포의방에서 추천을 받았습니다만 아쉽게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해 결국 사지 못했습니다. 정말 아깝습니다.”

    젊은 후배의 말은 수준급이었다. 그는 고 장군의 무예가 얼마나 뛰어나고 용맹한지, 힘찬 외모로 어떻게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오로지 그가 걸친 옷만을 칭찬하여 혹시 모를 섭영진과 이치의 불만을 차단했다. 이러면 머리가 단순한 고원에게 잘 보이는 것과 동시에 섭영진과 이치에게는 미움을 사지 않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고원은 더욱 통쾌하게 웃어 재꼈다. 이 옷은 그의 부적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그의 작전이 성공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오로지 이 오색찬란한 옷에 달려 있었다.

    이치는 경직된 얼굴로 고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고원처럼 전투할 때 빼고 머리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이나 저런 옷을 입는 거라고 생각했다. 희자들, 혹은 스스로 재능과 외모가 비범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조차 함부로 입을 수 없는 옷을 저토록 변변찮은 외모를 가진 고원이 입고 뽐내고 있다니. 과연 그의 지능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 * *

    꽃밭 속에 몸을 숨긴 구염상은 겹겹이 쌓인 꽃 무더기를 헤집으며 그 틈 사이로 예비 사촌 형부를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눈앞에는 그저 그를 둘러싸고 아부를 떠는 사람들만 보일 뿐, 정작 사촌 형부는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화가 난 나머지 잡고 있던 꽃 무더기를 탁 놓은 구염상이 사촌언니의 뒤로 물러났다.

    “안 볼래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사촌동생이 알려줄 정보에 귀 기울이고 있던 장오월은 순간 화들짝 놀랐다.

    ‘뭐, 안 보인다고? 비켜, 그럼 이 몸이 직접 봐야겠어!’

    장오월이 숙녀처럼 싱긋 웃었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는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속마음과 달리 나지막한 목소리는 예전처럼 매섭지 않았다.

    “그러니까 얌전히 있으라니까 왜 굳이 따라오셨어요……. 그럼 비켜 보세요. 이 언니가 대신 보겠습니다.”

    구염상이 사촌언니의 성격을 모를 리 없었따. 웃긴다는 듯 장오월을 바라보던 구염상은 언니의 온화하고 예의 바른 모양을 따라 온순하고 형식적인 태도로 가볍게 절을 했다.

    “그럼 언니에게 부탁드릴게요. 언니가 저 대신 잘 봐 주세요. 이 장군이 정말 소문처럼 뭇 여인의 넋을 빼앗아갈 만큼 관옥같이 생겼는지 말이에요.”

    구염상을 한 번 톡 쏘아본 장오월이 몸을 틀어 동생을 밀어낸 후, 겹겹이 피어 있는 국화꽃 무더기를 후다닥 헤집었다. 장오월은 정혼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과연 그가 이제껏 익힌 갖가지 재주를 바칠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장오월 역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일순간 앞을 가로막고 있는 녀석들을 모두 끌어내 참수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개돼지 몇 마리가 둘러싸고 있어서 정말 감상하기 불편하네.”

    순간 홍석은 부끄러워 진땀이 흐르는 얼굴로 탄식했다.

    ‘말투만 부드러울 게 아니라 막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아셔야지요!’

    멀리서 궁녀 몇 명이 다기를 받쳐 들고 오는 모습을 본 구염상에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방법이 있어요.”

    잠시 뒤, 장오월과 구염상은 함께 궁녀복을 입고 찻주전자를 든 채 꽃밭 밖으로 나와 있었다.

    장오월은 보통의 소녀처럼 은근한 설렘을 느꼈다. 아무리 말을 거칠게 해도 그녀 역시 속으로는 장래 남편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상공이 꿈에서처럼 상냥한지, 소문처럼 세상을 압도할 만한 기개를 가진 사람인지, 또 자신의 아버지와 비교하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이제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정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쟁반을 받쳐 든 장오월은 갑자기 조금 긴장됐다.

    “그냥 가지 말까…….”

    구염상이 달콤하게 빙그레 웃었다.

    “언니, 이따가 어떻게 해야 떨지 않고 차를 잘 따를 수 있는지나 생각해 놓으세요.”

    “맞아요, 우린 지금 궁녀죠.”

    머뭇대던 장오월은 이내 걸어 나와 한 차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 그녀는 정혼자를 보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함께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사내들의 냄새가 코에 물씬 풍겨오기 시작했다. 거들먹거리는 남자들의 호기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나라를 보위하는 포부를 가진 사내들의 대화 속에서는 짙은 애국심의 열기가 흘러넘쳤다.

    문인들의 자리가 작은 다리 아래 졸졸 흐르는 조용한 시냇물 같은 분위기라면 무장들의 자리는 거대한 파도처럼 웅장하고 격렬했다. 웃음을 터뜨릴 때도 차를 마실 때에도 사나이의 호탕함과 방탕함이 느껴졌다.

    “거기! 너 말이야! 이 몸에게 차를 따라라!”

    “여기도!”

    “찻주전자가 너무 작잖아! 난 큰 사발이 필요해. 술을 가져와! 호탕하게 한 잔 마시고 취해야지. 이런 작은 찻주전자랑 찻잔으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

    맨 처음 말한 사람은 고원이었다. 여기서 그 외에 자신을 ‘이 몸’이라 부르는 습관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장오월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했다. 겹겹이 앉아 있는 사람들은 비록 많지 않았지만, 무질서 그 자체여서 밖에서 그녀의 시야를 가렸던 국화 무더기보다도 더 혼란스러웠다.

    본래 한 명씩 차를 따라 주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두 사람은 느닷없이 눈치 없는 이가 고함을 친 이후로 모든 이가 따라서 고함을 지르는 통에 꼼짝없이 차를 따르는 어린 궁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차를 따르라고 소리치는 모습에서는 조금도 사내다운 모습이나 신중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침묵을 지키는 문인의 우아함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목청을 겨루듯 우렁차고 화통한 목소리로 설창說唱(노래와 이야기가 문학 양식)과 문사文辭(문장에 나타난 말)를 대신해 그들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구염상의 손놀림은 안정적이었다. 표정에 변화가 없는 그녀는 모범적인 궁녀처럼 차례대로 차를 따라 주며 조용히 일했다.

    구염상은 갑자기 손이 무언가에 부딪치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한바탕 크게 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중한 몸을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껄껄 웃으며 한 발을 의자 위에 걸치고 당당하게 말했다.

    “과거 폐하께서 친히 군대를 통솔하실 때 그 기개가 산하를 집어삼키고 사해를 휩쓸었죠! 전쟁의 신이 뭐 별겁니까? 폐하께서 친히 이끄는 군대 앞에서는 3회합(서로 한번 교전하는 것을 1회합이라고 함)도 못 넘긴 것을요!”

    이치는 새로 따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냉담하고 무관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원이 어떤 이상한 허풍을 떤다 해도 구태여 잘못을 지적해 줄 생각이 없었다.

    고개를 들고 차를 따르는 궁녀를 힐끔 바라본 섭영진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이려다 순간 번쩍 시선을 들었다. 귀를 뚫었으나 장신구를 달지 않은 궁녀의 귓불에 시선이 멈추었던 그는 다시 시선을 돌린 후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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