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31
상대가 떠나려 하자 초근언은 귀신에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이 국화를 좋아하시나요?”
구염상의 맑고 차가운 눈빛이 그의 몸에 떨어졌다. 담담하면서도 소원한 눈빛이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저 한 송이밖에 피우지 못하니 많은 것들보다 진귀해 보일 뿐이죠. 그 자태 자체가 인상적일 뿐이에요.”
초근언은 약간 동요하는 듯했다. 겉으로는 약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은 온통 뒤집혀 있었다.
“아가씨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저는 초근언입니다.”
사실 초근언은 자신이 어째서 묻고 있는지, 물어본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알려 주기 곤란하시다면 괜찮습니다. 저의 주제넘은 행동을 용서하십시오.”
구염상은 땅 위의 상설을 한 번 쳐다본 뒤 돌아서서 떠나 버렸다. 초근언이라는 이름은 오늘 상국연에 참석한 남자들의 이름 중 하나일 뿐이었다. 구염황은 후보 명단에 쓰여진 이름들을 전부 외우라고 했었다. 지금처럼 이름과 사람이 맞아떨어지면 그저 글자가 구체적인 형상을 갖춘 것뿐이었다.
* * *
장오월章午月은 지루했다. 한동안 몰래 여기저기를 쳐다보았지만 태자와 공주는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 특히 앞으로 시어머니가 될 분이 계속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난처하면서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딸이 어색해 하는 것을 알아차린 주사섬은 놀란 딸의 손을 토닥였다.
“조금 전 네 올케가 도착하는 걸 봤으니 찾아서 이야기를 좀 나누려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장오월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예비 시어머니에게 인사를 한 그녀는 예를 갖춘 뒤 영리하게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두 어머니의 시선이 닿는 범위에서 벗어나길 기다렸다가 이내 죽을 것처럼 숨을 돌렸다.
막 치맛자락을 들고 올케가 있을 만한 곳을 향해 뛰어가려던 장오월은 뒤에 서 있던 홍석紅石에게 잡혔다.
“아가씨, 여기는 황궁이에요. 웃을 때는 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고, 걸을 때는 발을 보이면 안 됩니다. 어서 치맛자락을 내려놓으세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순간 장오월에게서 활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홍석이 자신을 따라오자 머리를 숙이면서 속으로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렇지. 어머니가 그리 후한 마음을 가지셨을 리가 없지.’
아가씨가 입을 삐죽 내미는 모습에 홍석은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장오월이 이렇게 장난기가 많은 건 다 황후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누이동생의 말이라면 껌벅 죽는 장 장군 역시 더욱 딸을 아꼈다. 덕분에 장오월은 장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꼭 사내아이들처럼 단속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장오월은 그저 장난기가 좀 있을 뿐, 요즘 아가씨들처럼 성미가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조용히 아가씨를 옆으로 끌어당긴 홍석이 귓가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 노비에게 조용히 아가씨를 데리고 가서 미래의 고야를 보고 와도 좋다고 하셨어요.”
이 말을 들은 장오월은 부끄러움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 전 사내아이처럼 거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애교를 부리는 소녀의 모습은 황후와더 약간 닮아 보였다.
“고고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보고 싶지 않아.”
장오월은 발을 동동 구르며 유모 뒤로 숨었다. 유모와 홍석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두 사람 모두 누가 보아도 아가씨를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궁으로 돌아가려던 구염상의 귀는 매우 밝았다. 게다가 사촌언니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된 그녀는 숨어서 한참을 서 있었다. 평소 괄괄한 사촌언니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며 놀리기 쉬운 때는 보기 드물었기에 구염상의 마음도 따라서 즐거워졌다.
갑자기 국화 속에서 빠져나온 구염상이 유모 뒤에 숨어있는 장오월을 바라보며 눈 한 번 깜작이지 않고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언니, 나도 가서 볼래요!”
깜짝 놀란 장오월은 사촌동생을 확인한 뒤, 갑자기 조금 전의 수줍음을 털어버리고 오라버니처럼 유모 뒤에서 걸어 나왔다.
“어찌 여기 계세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면서도 마구 뛰어다니다니요! 지금 당장 고모께 일러 공주 전하를 좀 혼내 주라고 하겠어요.”
홍석과 유모 역시 깜짝 놀랐다.
‘상 공주가 어찌 뛰쳐나온 것이지? 이 일을 어쩐다.’
구염상은 서둘러 용서를 구했다. 사촌언니는 어머니 같았고, 그녀에게는 언니가 없었다. 장오월은 구염상보다 네 살이 많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덕분에 구염상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전생에서 구염상은 매일 사촌언니를 볼 만큼 운이 좋지 않았고, 형부는 더더욱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외숙 일가가 유배되었을 때 구염상 역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존재였기에, 대마마에게 은자를 가지고 외숙을 찾아가 달라고 부탁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사촌언니도, 당연히 형부도 본 적이 없었다.
당시 구염상에게는 은자 외에 그들을 구제할 능력이 없었고, 그들 역시 구염상을 구제할 능력이 없었다. 이들은 친척이었지만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하늘 끝에 있는 것처럼 만나기 힘들었다.
덕분에 수많은 친척들의 관심 속에서 자랄 수 있었던 이번 생이 구염상에게는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안심하세요. 연회에는 제가 없어도 괜찮아요. 저는 마지막에 춤만 한 번 추면 되니까 별거 아닌 일에 크게 놀랄 필요 없어요. 가요. 저도 가서 형부를 보고 싶어요. 언니가 못 보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형부의 이름을 크게 부를 거예요!”
장오월은 어린 동생이 솔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구염상은 장오월이 저택 밖으로 외출하는 것보다 더욱 자주 출궁했기에 그녀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걱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조금 전에는 그저 언니 노릇을 통해 구염상을 놀려 주고 난처한 상황을 넘기려고 한 것인데 또 이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장오월은 정말이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구염상이 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가 가서 뭐해요. 언니가 가야 제맛이죠. 가요, 가요. 몰래 한 번만 보는 거예요.”
사실 두 사람은 남부끄러운 일을 적지 않게 해왔다. 장오월 역시 규율을 지키는 아가씨는 아닌 데다,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기에 가서 앞으로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을 보고자 했다.
장서전과 주사섬의 말에 따르면, 그는 묘회廟會(일정한 날에 절 안이나 절 부근에 임시로 설치하던 장)에서 장오월을 본 후 벌써 여러 차례 청혼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딸이 외모는 예쁘지만 성격이 좋지 않은 관계로, 아내로 맞이한 남자 쪽에서 후에 실망할까 걱정이 되어 줄곧 동의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후에 그쪽에서 장서전에게 무슨 큰 선물을 보낸 것인지 그는 혼사에 동의했다. 이 일로 인해 장오월은 한동안 기분이 나쁜 상태였고, 보름 동안 아버지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만약 혼기가 찬 자신이 계속해 정혼하지 않아도 아우들의 혼사에 영향이 없다면 그녀는 시집을 가고 싶지 않았다. 혼인을 해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내조와 양육보다는 그냥 집에 있는 게 가장 편했다.
하지만 막상 정혼을 하게 되자 평소와 크게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던 장오월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수를 놓는 시간이 많아졌고, 자기도 모르게 행동거지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거리를 걸을 때면 소리를 지르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구염황 그 뚱보 녀석이 자신을 얼마나 비웃었던지! 화가 난 장오월은 이를 갈았다. 장오월의 아우들은 감히 누님의 권위에 도발을 하는 일이 없었고, 공주인 구염상조차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오로지 구염황 그 뚱보 녀석만이 할 일이 없으면 빈정거리며 ‘이치李馳가 너에게 반하다니 정말 불행한 일이야!’와 같은 말을 해댔다.
‘정말 기가 차는군! 내가 어때서? 어디가 부족해서! 난 여계女戒에 여칙女則까지 줄줄 외우는데! 그냥 그게 그저… 그다지 쓸모가 없을 뿐이지.’
궁녀처럼 분장한 구염상은 공손한 태도로 사촌언니의 뒤를 따랐다. 머리를 숙이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녀의 이상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홍석의 눈빛은 계속해서 공주에게 머물러 있었지만, 아가씨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기에 그녀 또한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주의 뒤로 물러선 홍석이 조심스레 두 사람을 따라갔다.
병부상서의 아들인 이치는 명경明經(과거 시험 과목 중 하나)과와 무武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는 병기 제조에 정통하며 병력 배치와 진을 치는 데 능한 태자의 심복이었다. 태자보다 침착한 얼굴을 한 그는 사람을 대할 때면 언제나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가 정혼자에게 요구하는 건 딱 하나였다. 명줄이 길면 된다.
이치는 친구들과 모여 정사를 논하고 있었다. 혼처가 정해져 있었기에 그는 자연히 부마 후보에서 제외되었지만, 여전히 연회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좋은 남자였다.
비록 혼처가 정해져 있어도 이치를 마음에 두고 서녀나마 첩으로 보내고자 하는 이들은 여전히 적지 않았다. 태자의 첫 번째 심복에게 아첨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비록 여전히 황제는 건재했지만, 태자는 이미 국토의 반을 수중에 넣은 상태였기에 이치의 위세 또한 대단했다.
매일 밤 이치의 침상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하물며 이렇게 공공연하게 선을 보는 연회라니. 장씨 가문의 체면만 아니었다면 각 가문의 적녀들 또한 진중함을 버린 채 그를 향해 용감히 돌진했을 것이다. 못생긴 태자보다야 백마 탄 기사가 나을 테니까.
사람들이 앞다투어 논쟁하는 구석진 곳에서, 이치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는 많이 듣고 적게 말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차갑게 생긴 이목구비에 건방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약간 귀찮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연회에서 숨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귀를 괴롭히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 통령, 호국과의 전쟁에서 만약 지금 수준의 병력이 있었다면 승기를 잡는 게 더욱 빨랐을 거라 생각지 않으십니까?”
소년은 아주 자신만만했다. 이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비위를 맞추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리고 이치는 이런 말장난을 가장 싫어했다. 이미 잠잠해진 지 오 년이나 된 전쟁 이야기를 꺼내어 뭘 어쩌자는 말인가. 이는 아무리 증명하고 싶다 해도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찾아 주변 국가들과 다시 전쟁을 시작해 제후국을 만든다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수준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성가신 게 싫었던 이치가 책임감 없이 대충 말을 내뱉었다. 질문을 던진 소년은 자신의 말이 인정을 받자 마치 높이 평가받는 미래를 본 양 득의양양한 모습이 되었다. 사람들 역시 부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