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30
“오라버니, 저도 휴식이 필요해요. 누군가가 항상 옆에서 놀아 줄 필요가 없다고요.”
구염상은 그저 연탑 손잡이에 기대어 자고 싶었다.
“네가 몰라서 그래. 너도 잠이 잘 안 올 때가 있잖아. 다시 말해 여인은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해. 어머니를 좀 봐. 얼마나 안타까워. 평생 궁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시고.”
“아바마마 앞에서도 어디 한 번 똑같이 말해 보세요.”
구염황이 즉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실언이야, 실언. 하지만 넌 이 오라버니가 네 편이라는 걸 알아야 해. 그래, 시위와 혼인하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야. 주도권이 영원히 네 손에 있으니, 그에게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감히 서쪽으로 가지 못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오라버니는 네게 너무 억울한 일 같아. 아니면, 그냥 시위 둘 다 맞이하자. 응?”
“시위 둘과 혼인하면 억울하지 않은 거예요?”
구염황은 잠시 생각한 뒤 진지하게 말했다.
“하나를 맞이하는 것보다 손해가 적겠지.”
진지하게 대답하는 오라버니를 보며 구염상은 왠지 입가의 미소가 조금 더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알았어요. 오라버니의 제안은 좀 더 생각해 볼게요.”
누이동생의 말에 조금 전 편안해졌던 구염황의 안색이 갑자기 다시 어두워졌다. 그래도 누이동생에게 손해라는 생각에 잠시 망설이던 그가 다시 진지하게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나라에는 좋은 남자가 셀 수 없이 많아. 내일 연회에 참석하는 이들도 나라에서 손꼽히는 기둥들이고. 그냥… 다시 생각해 보는 건……?”
* * *
상국연에는 다양한 국화들이 피어 있었다. 자태가 각기 다른 국화산은 물론, 정교하게 꽂힌 둥그런 화분도 있었다. 본 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품종을 아는 것과 출처를 알 수 없는 것이 도처에 가득했다.
각양각색의 국화가 바다같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보다 높은 국화 나무부터 눈에 띄는 국화 모종까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궁중 악사와 춤을 추는 여인들이 울긋불긋 아름다운 국화에 둘러싸여 흥겹게 노래하며 춤을 췄다. 천 개의 연회석이 장관처럼 펼쳐져 있어 전시殿試보다 더 큰 연회였다. 각기 다른 모양을 지닌 사천 폭의 병풍이 돌기둥처럼 양쪽에 늘어서 있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황실의 기세를 보여 주었다.
조정 중신들은 황실의 패권에 놀라는 한편, 황실 장인의 정교하고 뛰어난 실력을 볼 수 있었다. 진열된 국화의 품종이든, 황궁 연회의 규모와 마치 살아있는 듯 멋진 작품이든 모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향기가 가득한 가운데 노래와 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국화로 만들어진 패기 넘치는 방대한 작품 ‘용이 모여 국화와 놀다’와, 아기자기한 분재 ‘가을을 다투는 두 가지 색’은 신하들의 발걸음을 사로잡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궁녀와 부지런한 태감들은 연회석 사이를 빈번하게 오가며 맡은 임무를 바쁘게 수행했다. 삼천 평에 달하는 어화원의 안과 밖, 그리고 구석구석은 모두 상 공주의 상국연을 위해 존재했다. 주국의 3품 이상 관원들은 모두 가족을 데리고 연회에 참석했다. 재주가 뛰어난 미남과 미인들은 연기처럼 자욱하고 떠들썩했다.
여인들은 눈빛을 불태우고 있었다. 공주를 위해 준비된 연회에 인재들은 차고 넘쳤고, 어차피 공주가 그들을 다 선택할 수는 없으니 남은 사내들 중 자연스레 상대를 고르려는 것이었다. 이는 어른들이 아들딸을 위해 혼사를 정하기에도 좋았다.
아들이 있는 사람들은 연회가 끝난 후 자신의 아들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 생각했기에 자연스레 각 저택의 아가씨들을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부모들의 열정에 비해 딸들은 수줍어했다. 연회에서는 사람들의 기질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각 가문의 공자들은 의기양양 하면서도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늘 높이 날고 싶은 이도, 진심으로 청혼하는 이도, 단순하게 머릿수를 채우러 온 이도, 마지못해 온 이도 모두들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와 상관없이 그저 공주의 눈에 들게 된다면 이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원해야만 했다.
어화원 한 귀퉁이에 있는 정자에는 국화가 반짝이고 호수가 출렁이고 있었다. 작은 정자 안 은은하게 피어 있는 국화의 청아한 향기는 주변의 향기가 뒤섞였지만 조금도 튀지 않았다. 호수 속에는 마치 연꽃처럼 국화가 꼿꼿하게 서 있었고, 새하얀 꽃잎은 거의 진짜 같았다.
봉익은 명문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게 하는 어머니를 피해 조용한 곳을 찾아 숨고 싶었다. 그러다 자신보다 더욱 빠르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봉익은 모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잘 차려입었군. 다른 지역에서 일하지 않았던가? 언제 돌아온 거지?”
도 현령縣令이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봉익의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가 드러났다. 모자를 거꾸로 쓴 도도의 입에는 꽃 한 송이가 물려 있었다. 눈도 아직 제대로 뜨지 못한 모습이 좋은 꿈을 꾸다 방해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도 잘 수 있다고? 임무는 잘 마무리한 것 같군. 마음이 편해지니 살도 찌고, 매일매일을 유유자적하게 보내고 말이야.”
봉익이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도는 소리를 따라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정자의 난간에 앉아 기둥에 기댄 상태였다. 그는 옷이 구겨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 연경에 사는 그대만 하겠는가. 나 같은 사람이야 초라하게 기어갔다 초라하게 돌아오는 거지. 변경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시키는 큰 임무는, 정말이지 나같이 좋은 사람에게는 잘 맞지 않아.”
도도와 함께 난간 위에 앉은 봉익이 그에게 공감하며 말했다.
“아니면 우리 한 번 바꿔 보는 게 어때. 복잡하게 뒤얽힌 연경이 그대같이 좋은 사람에게는 어떨 것 같아?”
“나는 영원히 변방에서 발버둥치면서 조국을 위해 미약하나마 공헌하도록 하겠네. 헌데 어찌 자네가 여기 있는 거지? 평소 자네 아버지가 폐하를 괴롭힌 걸 생각하면 자네만큼은 이 화를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도는 말을 하면서도 또 자고 싶은 듯 하품을 했다.
“다들 자네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네.”
봉익이 도도를 바라보았다. 잠에 취해 게슴츠레한 눈과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를 봤을 때 도도는 결코 부마가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그 역시 황제와 태자의 명을 따른 것뿐이었다.
봉익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내가 선택되길 바란다면?”
순식간에 반쯤 졸음이 달아난 양 도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 지금 농담하는 거지?”
“아니. 상 공주는 단정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니 그녀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이 자리엔 권택진도 있어. 내가 어찌 안 올 수 있겠는가?”
순간 도도는 졸음이 모두 달아나버렸다.
“권 공자가 아직도 단념하지 않았다고?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리들 중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건 그였잖아. 어찌 아직도 그렇다는 말인지…….
상대는 공주야. 아내로 맞아들이면 받들어 모셔야 하는, 그야말로 조상님과 다름없는 존재라고. 먹고, 마시고, 자는 것까지 죄다 통제 당하는 건 물론, 심지어 시도 때도 없이 태자가 나타나 놀라게 할 텐데 얼마나 공포스러워? 안 돼… 안 돼! 역시 잠이나 자는 게 낫겠어…….”
“자네가 말하는 건 공주의 외적인 조건일 뿐이네. 공주의 내면이 어떤떨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태자에게 당하는 게 두렵네!”
초혜전 시절, 누구든 감히 공주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황제와 태자가 직접 나섰다. 강보에 싸인 어린 공주를 한 번이라도 더 보는 날에는 사흘간 태양을 보는 벌을 받았으니, 누구도 두 번 다시 공주를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태자 주변을 따라다니던 반독 몇은 공주를 두려워하기에 이르렀고, 차라리 평생 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을 들은 봉익은 평소 공주를 향한 태자의 과보호를 떠올린 것이 아닌, 시위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말하던 순간 구염상의 눈에 어린 평온함과 온화함을 떠올렸다. 그녀가 그리 평온할 수 있던 까닭은 세상사를 환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 봉익을 보던 도도의 마음에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봉익은 진심인 것인가?’
자신의 형제는 자신이 아는 법이다. 봉익은 미색을 좇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외적인 요소를 차치하고서라도, 공주는 성격도 나쁘지 않던가?
도도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은 끝내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더 이상 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그는 점잖게 잠을 청하며 아무 일 없이 죽기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먹고 자고 기절했다 깨어났다, 눈을 감고 죽는 것보다 더 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구태여 사서 고민을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었다.
* * *
절반이 넘는 문무백관들과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로 인해 넓디 넓은 어화원조차 혼잡했다.
초근언은 사람들을 피해 머물 곳을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적출 누이와 아우를 데리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기에 어느 새 그는 가장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초근언은 당연하다 느꼈기에 별로 부정적으로 생각지 않았다. 더욱이 부마의 자리가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이 하물며 공주와 가까울 수 없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초근언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국화를 감상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먼저 다가와 인사하지 않았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더더욱 다가올 리가 없었기에 많은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초근언은 기이하고 독특한 모양의 국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본래 군자의 대쪽 같은 성격을 상징하던 국화는 오늘날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며 여러 가지 다양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등 황실을 장식하는 가장 일반적인 꽃이 되었다.
초근언은 넋을 놓고 국화를 바라보았다. 국화는 마치 인생 같았다. 아무리 부유하고 아름답다 한들 또 어쩌겠는가? 마음껏 허리를 굽힐 그 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데.
“이건 상설霜雪입니다. 서리 같은 미인의 아름다움을 뜻하죠. 정말 아름답죠? 수많은 국화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한 송이예요.”
구염상은 활짝 핀 꽃잎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국화의 물결 속에 단 한 송이밖에 없는 데다 이렇게나 작아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어요. 일부러 특별히 보러 왔는데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또 있을 줄은 몰랐군요. 상설도 기뻐할 거예요.”
구염상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느 때와 같은 표정이지만 부드럽지는 않았다.
초근언은 깜짝 놀랐다. 너무나 예쁜 궁녀였다. 그녀를 바라본 그 순간, 막 궁문을 들어섰을 때의 충격까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 같은 피부에 옥 같은 표정. 웃음기 없는 눈은 끝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바람에 날린 긴 머리칼에서 은은한 국화향이 났다.
본래는 특별히 눈여겨볼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궁녀 복장이었지만 그녀가 눈에 들어오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정원에 온통 가득한 국화의 빛은 순식간에 시들어버렸고, 온통 그녀의 붉은 빛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