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29
창을 등지고 선 권서함이 침묵을 지키는 아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설득을 시도했다.
“아직 마지막으로 번복할 기회가 있다. 공주는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신분 차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주의 자식이 태자의 자식과 동등할 것이라는 소문만으로도 이미 아들에게는 앞길이 끊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제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즉시 미간을 찌푸린 권서함이 고개를 돌려 어린 시절 자신과 똑같이 고집스러운 아들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그가 사실을 이용해 아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네 신분이 적합하지 않은 데다, 상 공주는 구속을 받지 않는 성격이라 네 어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남편을 돕고, 자녀를 교육시킨다’라는 아녀자의 모습과도 맞지 않는다. 어찌 스스로를 괴롭히려는 것이냐.”
“아버지.”
권택진이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빛은 미동도 없었다.
“그건 저의 일입니다.”
안색이 어두워진 권서함은 처음으로 예를 갖추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권택진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는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도전해 보고 싶었다.
* * *
“형님, 공주는 분명 형님을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형님이 머리에 비녀 열 개를 꽂는다 해도 공주의 마음에 차지 않을 거라고요. 하하하!”
소년은 공작이 꼬리를 편 듯한 형님의 머리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형님, 어서 떼세요. 정말 형님하고 안 어울리고, 너무 웃겨요. 곰의 몸에 국화를 달아 놓은 꼴이라고요! 하하! 악! 형님, 부끄럽다고 화를 내시면 안 되죠! 어머니, 살려 주세요!”
표범 같은 속도로 달려간 곰 같은 남자가 몸집이 작은 아우를 손쉽게 제압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뭘 알아! 공주는 분명 나처럼 건장한 남자를 좋아할 거야! 분명 나를 선택할 거라고!”
그러나 고함을 친 그는 정작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섭영진摄榮陣도 참가한다고 하던데, 그 녀석은 미소년이잖아. 만일 공주가 외모에 미혹되면 어쩌지?’
고원高遠은 그럴 리 없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남성적인 모습을 좀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전장에서는 이렇게 절대적인 남성미가 최고였기에 오히려 기개가 없어 보이는 섭영진의 외모를 자주 비웃었지만, 지금은 그가 너무나 부러웠다.
“셋째야, 나… 분을 좀 바르면 어떨까……?”
고 씨 가문의 셋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형님, 부디 우리 집안을 살려 주세요!”
* * *
부인은 가운데 단추가 달린 감청색 옷을 입고 있었다. 매서운 눈빛을 한 그녀가 이제 막 들어오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를 보자 더욱 기가 막혔다.
‘서출인 주제에 고귀한 척을 해? 천한 어미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믿고 고귀한 줄 아는 게로군!’
부인이 성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말하거라! 연沿이의 서방에서 기린 받침대가 사라졌다는데, 네가 가져간 것이냐?”
소년은 당당하고 의젓한 태도로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저는 아우의 서방에 출입한 적이 없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구나! 조금 전 연이가 분명 오전에 네가 복습을 도와줬다고 했거늘! 여봐라! 당장 쳐라! 저 녀석이 인정할 때까지 쳐라!”
“그만 두시오!”
바깥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엄숙한 표정의 남자가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들어왔다. 한 눈에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찌 소란을 피우시는 게요! 내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시오? 근언이를 때려서 큰일이라도 나면, 내일 상국연에는 당신이 참여할 것이오?”
즉시 의기소침해진 부인의 목소리가 약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 연沿이가 못 가는 자리를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천한 놈이 가게 되었다는 말인가?
‘대관절 국자감에서는 무슨 시험을 그리 개떡같이 냈기에 서출인 놈이 일등을 한단 말인가! 정말 황당무계하군!’
“예, 근언이가 아주 좋은 일을 했으니 벌하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대신 어미를 오라고 하면 됩니다.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건 다 어미의 잘못이니까요! 경 이랑에게 아들을 대신해서 책임을 지라고 하는 수밖에요!”
“그만하시오! 끝이란 걸 모르는 것이오? 내일이 지나면 당신 마음대로 괴롭히게 해 주겠소!”
부인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못 한 채 매섭게 서자를 노려보았다. 그를 찢어 놓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초근언은 피곤한 듯 원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위로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누웠다.
공주의 연회가 아니었다면 벌써 국자감을 떠나 주모의 뜻에 따라 손재주를 배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셋째 형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었겠지. 더는 밤에 촛불을 켜고 책을 읽지도, 사람들과 도를 논하지도 않으면서…….
* * *
화려하고 부귀한 전각 안, 환한 등불이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궁녀와 태감들은 바쁘게 저녁 식사의 흔적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린 주인은 느긋한 자태로 봉탑 위에 엎드려 내일 연회에 초청된 이들의 목록을 뒤적였다. 작은 다리를 흔드는 모습은 유달리 한가로웠다.
후궁에서 멀리 떨어진 은밀한 뜰 안, 용포를 걸친 구염락은 차가운 눈빛으로 아래쪽에 꿇어앉은 암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딸이 손수 이름을 붙여 준 그 암위였다.
아버지의 옆에 선 구염황은 평소의 한가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미동도 없이 꿇어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이동생이 이자에게 시집갈 생각을 했다니. 구염황은 당장 그의 목을 졸라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세 사람은 벌써 두 시진 가까이 대치하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주로 두 사람이 무릎을 꿇은 남자를 줄곧 노려보고 있었기에 대치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 사이 미녀 하나가 왔다 갔지만 암위는 숨 한 번 크게 내쉬지 않았다. 유혹에 맞서는 훈련을 받아 온 일등공이라 전혀 효과가 없었던 건지, 여인이 그만큼 아름답지 않았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구염황이 돌연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이렇게 감정이 없는 자라면, 상아가 앞으로 생과부가 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구염락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죽이는 게 어떠하냐?”
구염황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하지만…….
“만일 상아가 이자를 찾는다면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지 않습니다. 차라리… 지난 번 계획한 대로 거세시킬까요?”
구염락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약 상아가 시집을 가겠다고 굳게 결심하면 그가 태감이라 해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구염황은 난감했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화제는 원점으로 돌아왔고, 세 사람은 계속해서 침묵했다. 두 사람은 눈에서 차가운 빛을 발하며, 무릎을 꿇고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잘 구워진 새끼 돼지처럼, 그는 어디부터 칼을 댈지 상의가 끝나는 대로 그 즉시 그릇 위로 직행할 운명이었다.
또 다시 한 시진이 지났다.
구염락은 노려보다 지칠 지경이었따. 그는 좀처럼 딸의 유별난 안목에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딸이 반드시 그와 혼인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니, 모든 것은 아직 논의할 여지가 있었다.
구염락 역시 이상한 이름이 붙여진 이 암위를 경멸할 의도는 없었지만, 이자의 신분이 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저 딸이 그와 혼인할 생각을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를 비틀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많은 부모들처럼 구염락 또한 어쩔 수 없이 누구든 성에 차지 않았고, 누구든 딸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수만 번 고심하여 골라낸, 곧 상국연에 참석할 남자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구염락은 애써 화를 참으며, 상대를 죽여 버리고픈 마음 속 욕망을 누른 채 위엄 있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짐의 딸인 상 공주를 좋아하는가?”
구염황이 즉시 귀를 쫑긋 세웠다. 무릎을 꿇고 있던 소시가 마침내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말하거라! 좋아하면 좋아한다, 싫으면 싫다 똑바로 말을 하란 말이다! 뭘 꾸물대는 것이냐!”
깜짝 놀란 구염황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바마마, 말씀이 끝난 지 채 몇 초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든 바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인데 입을 열려던 소시가 오히려 고함 소리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잖아요. 욕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소시는 소리 내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탓에 암위들은 언어 기능이 약간 퇴화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목소리를 가다듬은 소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 전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순간 몸을 날린 구염락이 마침내 소시를 걷어찼다. 온몸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진작부터 때리고 싶었고, 이 대답이 절호의 기회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소시는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억지로 피를 삼키면서도 그는 공손한 태도로 조금 전 자세를 유지하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구염황은 자신까지 나서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미 때린 마당에 다시 자신이 나선다면 마치 남은 음식을 먹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차라리 상아에게 가서 일러바치는 게 나았다.
구염황은 현명하게도 아버지와 모자란 시종을 두고 창문을 통해 재빨리 사라졌다. 문으로 걸어 나가지 않은 것은 문은 막혀 있어도 창문은 막히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구염황은 창문에 걸렸다. 그가 즉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 망할 창문 좀 뜯어 주세요!”
* * *
구염황은 진지하게 누이동생을 탑에서 들어 올렸다.
“소시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다른 부마를 선택하라고 했다.”
구염상은 약간 야윈 오라버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주 약간이었다.
“오라버니, 여기는 후궁이에요. 그렇게 자꾸 후궁으로 뛰어오지 않을 수는 없어요?”
“나는 지금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야. 소시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아니면 오라버니가 암위를 바꿔 줄까? 내 암위는 눈치도 있고, 감사할 줄도 아니까 분명 네 마음에 들 거야.”
“오라버니 옆에 두고 쓰세요.”
구염상은 다시 눕고 싶었다.
“그자를 어디에 쓰라고!”
구염황은 다시 누이동생을 일으켰다.
“아니면 둘 다 너에게 줄게. 두 사람과 좀 지내보다가 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건 어때? 아니면 둘 다 옆에 둘래?”
구염황이 누이동생을 옆에 앉혔다.
“스스로를 억울하게 만들 필요 없어. 그들도 쉴 때가 있으니 둘 다 옆에 두면 이렇게 한 명이 쉴 때 다른 한 명이 네 옆에 있을 수 있잖아. 그럼 영원히 너와 놀아 줄 사람이 있는 거니 얼마나 좋아.”
구염황은 부드럽게 눈을 깜빡이며 마치 유혹하듯 구염상을 쳐다보았다. 구염상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이 열려 있다면 오라버니부터 한 열 명쯤 아내로 맞이하세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