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28
봉익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구염상의 진지한 눈빛을 보자 마음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정말 진심인가?’
애써 감정을 억눌렀지만 봉익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구염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와 황후의 유일한 딸이자 태자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이었다. 그런 여인이라면 기품 속에 조금은 유치한 구석을 가지고, 극에 나오는 사랑을 믿으며 장래 부마에 대한 동경심으로 가득차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순간, 봉익은 구염상의 눈에서 소녀처럼 보이는 그 어떠한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마치 혼사 같은 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녀는 지나치게 냉정하고, 지나칠 정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봉익은 구염상이 장난처럼 결정한 것이 아닌, 충분히 심사숙고 끝에 내린 선택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봉익은 자기도 모르게 멀지 않은 곳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남자는 순시를 나갈 때마다 황제의 곁을 따라다니는 일등공처럼 그야말로 흉기 그 자체였다.
저런 자가 상 공주에게 잘해 줄 리 없지 않은가. 그는 부드러움이라고는 모르는 거대한 칼이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체계적인 교육은커녕 아예 세상의 이치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살아가는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다. 주인을 지키는 것.
‘저런 자를 부마로 선택하다니!’
봉익은 자신이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저 남자는 공주가 자신과 혼인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저런 자가 구염상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건 정말 말도 되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구염상을 바라보며, 문득 봉익이 말했다.
“제가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저를 맞이해도 좋고요. 제가 황실에 들어가 데릴사위가 된다 해서 무슨 손해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황실에서는 보상을 위해 왕이라는 작위를 내려 주실 테니까요. 남자들이 꿈에 그리는 높은 자리가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놀란 표정으로 봉익을 바라보던 구염상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저를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공주예요. 제 말 한마디면 재산을 몰수하고 가문을 멸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동정심을 잘못 사용하지 마세요.”
봉익은 진지한 표정으로 구염상을 쳐다보았다.
“진심입니다.”
구염상의 눈빛이 담담하게 봉익에게 머물렀다. 웃는 얼굴은 여전히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봉 대인, 아무래도 오늘 도둑을 잡다가 머리를 다치신 것 같습니다. 조금 전 그 말은 본공주가 못 들은 걸로 하지요.”
“공주 전하, 저는 진심입니다! 외람되긴 하지만…….”
봉익은 약간 난처해 보였다. 생전 처음 해 보는 청혼은 결코 상상하던 것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신분상 제가 당연히 공주 전하께 어울리진 않겠지만, 적어도 제가 전하를 좋아하니 저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구염상의 웃는 얼굴이 돌연 약간 차가워졌다.
“봉익, 정말 어디가 아픈 것 같군요. 돌아가서 좀 쉬세요. 당신이 청혼하면 본 공주가 무조건 혼인해야 하는 건가요? 제가 당신을 잘 모른다고 말하지 마세요. 당신이 제 사촌 오라버니라 한들 제가 원하지 않으면 다 소용없어요. 더군다나… 혹 소시의 존재가 당신에게 이런 고백을 할 용기를 준 건 아니겠지요.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약 지금 제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소시는 순식간에 당신을 사라지게 할 수 있어요. 신분에 있어 당신이 소시보다 우월한 게 다 뭐라고요? 당신이 저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저는 당신의 청혼을 무시할 거예요.”
순간 봉익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봉 대인, 저는 혼자 돌아갈 수 있으니 일찍 돌아가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구염상의 말투는 강경했다. 고개를 떨군 봉익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어려 있었다. 다행히도 오랜 훈련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빠르게 평상심을 회복했다.
“소신, 공주 전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소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봉익이 떠난 뒤, 구염상은 혼자 고개를 숙인 채 달빛으로 뒤덮인 거리를 걸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달빛을 밟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 * *
봉익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면서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구염상이 한 말을 떠올린 그는 속으로 자신이 옳지 않았다고 자책했다.
반박할 수 없이 그녀의 말이 맞았다. 누구에게도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 권리가 없었고, 구염상은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을 아내로 맞이하라 강요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뭇 소녀들이 꿈꾸는 혼사와 사랑이 필요하지 않았다.
구염상은 이미 그 자체로 존귀함의 상징이었다.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픈 남자들은 모두 낮은 자세로 엎드려 간청하며, 그녀가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부마도 황제의 윤허를 빌미 삼아 억지로 공주를 맞이하고, 그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어린 구염상은 진작부터 자신의 혼사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는 다행인가, 아니면 불행인가?
봉익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인에게 술 한 주전자를 올리라고 명한 그는 창가에 앉아 은빛이 쏟아지는 창밖 세상을 바라보았다. 딱히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 * *
눈 깜짝할 사이 한로寒露(24절기 중 하나)가 되었다. 한 해 중 계절의 변화가 가장 뚜렷한 시기로, 따뜻한 날이 지난 후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때였다.
주국에서 가장 큰 절기인 한로가 되면 사람들은 겨울을 대비하여 논밭에 얕게 물을 대고, 두꺼운 옷을 구비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조정에서는 상반기 결산을 마친 뒤 하반기의 국무를 준비하며 일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무사히 겨울을 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로가 되면 황실에서는 대대로 사흘간 연회를 베풀어 가득한 국고를 자랑하고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최근 백여 년간 백성들은 부유했고 국가는 강성했으므로 더 이상 이런 진부한 방식으로 국력을 과시할 필요가 없었다. 한로는 이제 과거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지난 달 상 공주는 혼기가 찬 열다섯 살이 되었다. 황실에서는 올 한로에 상 공주를 위하여 성대한 상국연賞菊宴을 열기로 결정했다. 국화는 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상국賞菊은 공주가 다양하고 많은 ‘국화’들 중 마음에 드는 한 가지를 고른다는 의미였다.
반년 전부터 조용히 준비해 온 상국연에 참석하기 위하여 젊은 인재들은 벌써 보름 전부터 연경에 도착해 있었다. 학식이 풍부한 자들은 삼 년에 한 번 있는 과거가 아닌, 공주가 어느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될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마땅한 자격을 갖춘 이들은 공주의 호감을 사기 위해 말없이 집안에 숨어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 * *
사자 머리 석상이 지키는 저택 안, 평범한 외모에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가 갑자기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들었어요? 어머니께서 오라버니에게 새 옷을 열 벌이나 지어 주셨어요! 도착했으니 와서 입어보세요! 얼른 입어 봐요!”
“아가씨! 몸가짐에 신경 쓰셔야죠!”
그러나 소녀는 화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몸가짐은 무슨! 화가 나 죽을 지경인데!”
낚시를 하던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 옷이나 걸친 그는 짙은 갈색 금포 중앙에 옅은 녹색의 허리띠를 묶고 있었다. 허리띠 중앙에 있어야 할 보석 장식은 걸리적거린다고 느낀 주인에 의해 일찍이 등으로 넘겨진 상태였다. 엉망진창인 머리카락은 마치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야인 같았다.
오라버니가 움직이지 않자 소녀가 화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대체 입어볼 거예요, 안 입어 볼 거예요? 안 입으면 어머니한테 말씀드릴 거예요!”
결국 남자는 달갑지 않은 얼굴로 사랑해 마지않는 낚시대를 거둬들인 후 진지하게 하품을 했다. 세 걸음에 한 번 비틀거리고, 두 걸음에 한 번 발이 걸리는 그는 누이동생 앞에 다가왔을 때까지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산만한 말투로 말했다.
“왔어, 왔다고. 나이가 몇인데 걸핏하면 어머니한테 이른다고 하는 것이냐? 네가 혼인할 때 아예 어머니도 모시고 가면 좋겠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에게 잔소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 부드럽군. 기대서 잠깐 자야지.’
화가 난 소녀는 오라버니를 어깨에서 밀어냈다.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중요한 일을 생각하면 우선은 화를 내는 대신 옷부터 입힐 수밖에 없었다.
“공연히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이번에는 공주의 연회라서 오라버니가 제멋대로 굴어서는 안 된다고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이 없다 해도 일단은 그럴듯하게 입고 가야 해요. 어차피 공주가 오라버니처럼 불결한 존재를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으니 마음은 푹 놓으시고요. 얼른 가서 눈곱 좀 때고 씻으세요! 우리 도陶씨 가문의 체면이 다 엉망이 되겠어요! 엉망이요!”
화가 난 소녀는 씩씩거리며 화를 냈지만, 한편으로는 오라버니가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두 가지 복잡한 마음이 한 데 섞이며 그녀는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 되었다.
타고난 자질이 비범한 오라버니는 태자의 반독이었다. 하지만 게으른 게 탈이었다. 그는 누워는 있지만 절대 서 있지 않았고, 잘 수는 있지만 절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지 못했다. 초혜전에서 몇 년 동안 태자와 함께 공부한 뒤 그는 몇 년 동안 그야말로 잠만 잤다. 만약 장원급제라도 하지 않았다면, 오라버니는 도씨 가문의 체면을 완전히 구겼을 터였다.
* * *
호랑이 머리에 푸른 기와가 얹힌 고귀한 가문의 저택 안, 섭궁개는 무술 훈련을 마친 뒤 연무대에서 내려오는 손자를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 절예絶藝가 내 손에서 끝나지 않았구나.”
여위고 허약한 남자의 몸에서 조금 전 기세와는 달리 기침이 터졌다. 작고 여윈 몸만 보면 그는 섭궁개의 손자인 것도, 삼 년 전 호국과의 전쟁에서 명성이 높았던 어린 장군이라고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할아버지께서 적절히 독려해 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지요… 콜록콜록…….”
섭궁개는 손자에게 약을 가져다주라고 하인에게 지시했다. 막 돌아서서 떠나려던 그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상태가 좋지 않으면 내 폐하께 말씀드릴 테니 내일 상국연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어떠하냐?”
입술이 창백해진 섭 씨 가문의 어린 공자는 할아버지를 향해 진중하게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괜히 언급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아시면 펄쩍 뛰며 노발대발하실 겁니다.”
애제자의 성깔을 떠올린 섭궁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딸에 관한 일이라면 황제는 분명 조금이라도 용납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날씨가 차가워졌으니 돌아갈 때는 옷을 두껍게 입도록 하거라.”
“손자, 할아버지의 분부에 감사드립니다.”
섭 공자는 창백한 얼굴로 두어 번 또 기침을 했다. 전장에서 얻은 고질병이었다.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기침을 제외하면 다른 어떤 불편함도 없었다. 진맥을 한 태의는 전쟁터에서 한기가 들어 고질병이 생겼고,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라 말할 뿐이었다.
섭 공자는 이미 기침에 익숙해진 상태였고, 다행히 이는 그의 실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저 외모가 건장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창백하여 마치 오랜 기간 치료해도 차도가 없어 곧 쓰러질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혼인을 하지 않고 있던 그는 마지막으로 부마 후보를 선정하던 황제가 어찌된 일인지 그의 얼굴을 떠올린 탓에 내일 반드시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상국연에 참석하는 건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공주에 대해서는 그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