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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04)화 (404/449)

외전 구염상 2-27

구염상을 알아본 봉익의 눈 속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의아함과 의혹, 그리고 인정하지 않는 짙은 마음이었다.

‘공주가 또 혼자 나오다니!’

구염상은 눈살을 찌푸리는 봉익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제 발이 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정하려고 노력했고,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가 제 발 저릴 게 뭐 있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나는 오라버니를 찾으러 나왔는데, 그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아이 같은 구염상의 오기에 봉익의 눈빛이 잠시 반짝였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내색하지 않은 그가 즉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보지 않을 셈이었다.

“바래다드릴까요?”

“필요 없어요.”

헌원사사가 입을 열었다.

“아는 사이인가?”

‘정말 예쁘군. 봉익에게 사촌 여동생이 있다고 하던데, 이 아가씨인가?’

봉익의 미간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짧은 찰나, 봉익은 이 생각을 부정했다.

‘붙잡아야 하나?’

하지만 그는 신하일 뿐, 상대는 공주였다. 이미 구염상의 신분을 확인한 상태에서 봉익에게는 그녀를 붙잡을 어떠한 명분도 없었다.

봉익이 즉시 말했다.

“사사, 차는 다음에 마시도록 하지. 나는 아가씨를 바래다주겠네.”

헌원사사는 의식적으로 소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파 왔다. 하지만 다행히 또 바로 괜찮아졌다.

“그러지. 시간이 늦었으니 혼자서는 안전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다른 날 만나자고.”

밤이 점점 깊어지며 거리 위 행인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멀리서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궁문이 닫힐 시간이었다.

초롱과 오색 천으로 장식된 거리 위, 크고 작은 두 그림자가 조용히 걸어갔다.

기분이 많이 좋아진 구염상은 그저 우습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잠시 나왔는데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다니. 과거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봉익에게 궁으로 데려다 달라고 청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봉익은 한사코 오라버니를 찾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다. 비슷한 장면이었지만, 그때의 마음은 없었다.

구염상은 손에 든 긴 풀을 가지고 놀았다. 머리에 쓰고 있던 것을 벗자 폭포처럼 긴 머리카락이 아름답고 수려한 외모를 드러냈다. 달빛 아래 그녀는 마치 은은하게 빛을 내는 요정처럼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봉익은 벌써 세 차례나 그녀를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상 공주는 진짜 모습을 보여 주며 외모를 잊게 했다. 그는 조금 전 정말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심지어 신발 한 켤레에 의지하여 흉악범을 쫓는 자신이 상 공주처럼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서 있는데 굳이 확인이 필요했을까?

봉익은 망연자실해졌다. 그는 스스로 외모를 중시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그럼 지금 자신은 왜 그녀를 바래다주고 있는 것인가. 공주에게 호송할 시위가 부족해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봉익은 자조하듯 웃었다. 그는 천천히 공주에게서 몇 발자국 뒤로 떨어졌다.

하지만 봉익은 그녀와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친구들과 함께 가끔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술을 마신다는 점이었다.

몇 걸음 걷던 봉익은 한 발로 뛰는 구염상의 뒷모습을 보며 돌연 멈춰 서서 말했다.

“오라버니가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구염상은 봉익이 ‘공주’와 ‘태자’라 부르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굳이 그 호칭에 목숨을 걸지는 않았다.

“몰라요.”

고개를 돌린 구염상은 계속 걸었다.

봉익은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웃음이 나온 탓에 앞에 있는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애를 써야 했다. 봉익은 공주의 삶이 참으로 한가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하다는 듯 모른다 말하는 건 결국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봉익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비우고, 그녀처럼 밝은 달빛을 느꼈다.

구염상은 진지한 표정으로 바닥을 주시하고 있었다. 봉익이 준 등롱으로 발밑을 비추면 그림자가 이상하게 길어지면서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익이 귀신에게 홀린 듯 물었다.

“왜 저를 선택하셨습니까?”

“네?”

구염상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코끝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즉시 귀 뒤로 넘겨졌다. 봉익은 얼굴을 조금 붉혔지만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차분하게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자주 나오십니까?”

물론 구염상은 조금 전 그의 말을 명확히 인지한 상태였다. 그저 반응이 반 박자 늦은 것뿐이었기에 지금이라도 답을 한다면 완벽했다.

하지만 구염상은 대체 자신이 언제 봉익을 선택했다는 것인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전생에서는 봉 어사를 떠올렸기에 아들인 그에게 궁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구염상은 곧 봉익이 이걸 물어보았을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뭘 물은 거지?’

그건 너무 오래전 일이었기에 구염상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봉익은 구염상이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자 도리어 자신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야 했다. 갑자기 얼굴이 더 빨개진 그는 조금 전 말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염상은 드디어 대답할 말을 생각해 냈다.

“아바마마께서 왜 부마 후보에 봉 대인의 이름을 올리셨냐고요? 하하, 아바마마의 말은 듣지 마세요. 아바마마께서는 꼭 한 가지에 꽂히면 그렇게 집요하게 파고들곤 하시니까요. 그냥 제가 한 번이라도 만난 남자라면 전부 강제로 이름을 올린 거죠.

혹시 제 사촌 오라버니를 아세요? 이미 정혼을 했는데도 아바마마께서는 그 혼인을 불허하고 계세요. 만에 하나 제가 마음이 바뀌어서 사촌 오라버니를 좋아하게 되면 어떻게 하냐는 이유로요.”

구염상은 극성맞고 고집불통인 아버지를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아바마마께선 과정은 생각지도 않으시고 제 생각도 물어보지 않으세요. 아바마마께는 오직 결과만 있을 뿐이죠. 그러니 아바마마의 명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혼인을 하든 첩을 두든 괜찮아요.”

봉익의 안색이 일시에 나빠졌다. 고개를 숙인 그는 황제를 언급할 때 지나치게 흥분하고 제멋대로로 변한 구염상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랬다. 구염상은 사실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구염락이 딸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가 딸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저는 아주 단순한 사람을 찾아 혼인할 생각이에요.”

구염상은 갑자기 약간 쓸쓸해졌다.

“오라버니나 아바마마의 뜻도 좋죠. 하지만 그것들은 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권력을 좇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기에 누군가 권력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를 아내로 맞이하는 일 따위는 필요 없어요. 또 그럴 만큼 제가 유달리 매력적인 것도 아니니까요.”

희미하게 웃음 짓는 그녀의 얼굴이 달빛과 어울리며 밝게 빛났다.

“사실 저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요. 그러니 가장 뛰어난 사람을 고를 필요도, 아무것도 아닌 나의 혼사를 위해 모두가 분주해질 필요도 없어요. 며칠 후에 반드시 아바마마께 제 뜻을 말씀드릴 거예요. 소시와 혼인시켜 달라고요. 하하, 그러면 아마 아바마마는 놀라 쓰러지실 게 분명해요.”

구염상은 이미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본 것처럼 아주 즐겁게 웃었다. 그녀는 정말로 굳이 사랑하며 사는 삶을 원치 않았다. 그저 소시가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으면 불러내서 보고, 보고 싶지 않으면 보지 않을 수 있는 존재.

소시는 감정이 없었고, 명령에 따라 일을 했다. 이런 남편도 좋았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일 수 있게 하는 남편이라면… 그녀는 정말 소시가 좋다고 생각했다.

봉익은 순간 넋이 나간 듯한 구염상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자신도 함께 넋이 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구염상이 동정하듯 봉익을 바라보았다.

“안심해요. 제가 가능한 한 빨리 일을 처리해서 당신이 서둘러 혼사를 치르고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할게요. 이러면 제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

봉익은 왠지 모르게 구염상의 웃음이 눈에 거슬렸다. 분명 여전히 밝고 아름다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한 방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는 부마 후보에 이름이 오른 스스로가 그토록 무력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일이 그렇게 된 건 구염상의 의도가 아닌, 그녀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딸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꾸민 계획에 불과했다. 심지어 당사자인 그녀는 관심조차 없었다.

봉익은 그 속에서 발버둥치는 사내들이 너무나 우습게 여겨졌다. 웃고 싶었다. 주제넘은 스스로에게 웃음이 나왔다. 심지어 그는 만에 하나 자신이 부마가 되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공주에게 자신은 혼인 의사가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한 적이 있었다.

사실 봉익은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부마 후보들 중 절반 정도는 그만큼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치켜세워 주는 환경과 황당무계한 말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연경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스스로를 과대평가할 능력이 있었고 선택된 이후의 일을 생각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구염상은 아예 선택지에 있지도 않은 남자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순간 봉익은 자신의 우매함에 웃어야 할지, 아니면 모든 이들이 공주를 너무 쉽게 봤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다들 하늘을 찌르는 권세 속에서 길을 잃은 우매한 공주가 수많은 영웅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마음 가는 대로 하나를 고를 거라 여기고 있었다.

‘내가 어디가 못나서?’

갑자기 봉익은 약간 달갑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실은 아주 못마땅했다. 자신이 충분히 훌륭하지 않기를 한가, 생긴 게 다른 사람보다 못 하기를 한가. 성장 과정에서 자신보다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한 누군가―심지어 권택진이 서 있다 해도 봉익에게는 한 번 겨뤄 볼 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상 공주는 어찌 자신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걸까? 이미 두 사람은 세 번이나 만나지 않았던가.

마음 속 파동을 감춘 봉익이 여전히 평온한, 심지어는 더 온유하고 예를 갖춘 말투로 말했다.

“소시가 누구인지요?”

구염상은 봉익을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 베풀어 주었던 사소한 수고로움까지 기억에 생생했기에 그와는 더 가까워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이 일은 앞으로 비밀도 아닐 것이므로, 구염상은 봉익이 알게 된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생길 거라 여기지 않았다.

구염상은 손을 흔들어 소시를 불렀다. 그녀는 웃으면서 자신에게서 여섯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 소시예요. 어렸을 때부터 제 옆에 있었죠. 그런데 그는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이 부분을 언급하며 구염상은 약간 풀이 죽은 듯했다. 하지만 소시가 어떻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겠는가. 일 년 내내 한 글자도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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