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26
구염상은 마주한 익숙한 모습을 보았다. 산만한 눈빛에, 전처럼 밝고 아름다운 표정도 아니었다. 시간은 한 순간에 그에게서 활력을 빨아들이고 그를 망연자실하게 만든 듯했다.
당시 구염상은 어쩌면 자신이 주소유를 미워한 탓에 원수의 아들인 그조차도 미워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조금의 후회도 없이 부부의 정을 저버린 채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헌원사사를 첫 번째 장기 말로 삼아 마음 편히 이용했다.
‘하지만 헌원사사가 내게 잘못한 적이 있던가? 만약 어마마마가 헌원사사를 죽이려 했다면, 나는 그의 편에 서서 어마마마께 대항할 수 있었을까?’
구염상은 고개를 숙였다. 알 수 없는 적막함이 수년간 즐겁게 지내던 그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헌원사사의 최후를 예측했던 걸까? 내가 죽은 뒤 헌원사사가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무엇 때문에 내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던 거지?’
당시 구염상은 자신의 무덤 앞에서 목숨을 끊은 헌원사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큰 원한을 갚았다는 고통이 마음을 뒤덮은 탓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내가 냉정한 걸까?’
구염상은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신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고, 때문에 모든 사람의 동기를 의심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서 발버둥치며 고통스러워 하던 헌원사사를 외면한 채 결연히 보복을 단행했다. 그렇게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그 순간의 행복을 누렸고, 계속해서 주소유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고개를 든 구염상은 하늘에 걸린 밝은 달을 쳐다보며 마음에 깔린 어둠을 몰아냈다. 그녀는 서늘하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머리를 냉정히 하고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나는 매우 냉정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헌원사사 당신은 평생 다시 나를 알아서도, 만나서도 안 돼요. 당신이 소중히 여길 만한 가치가 있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요.’
고개를 돌린 구염상이 결연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결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가장 기댈 곳이 없던 시절, 아무리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고 사랑을 주었다 해도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안 들려요? 앞쪽에서 관병들이 사람을 잡고 있으니 어서 피하세요! 어서!”
헌원사사는 초조한 표정으로 길 한가운데 서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참을 소리쳐도 상대가 멍하니 움직이지 않자 그는 급한 마음에 그녀를 찻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찻집은 문과 창문을 닫았다. 밖에서는 요란하게 창문을 내리는 소리와 앞다투어 관병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다들 당황하지 마세요! 당황하지 마세요! 진정하세요! 진정하세요! 노부老夫가 조금 전에 봉 대인이 대열을 인솔하는 걸 봤어요! 분명 야간 통행금지 전에 돌아가게 해 줄 거예요! 그러니 진정하세요!”
찻집의 떠들썩한 소리는 바깥에서 들리는 돌격 소리보다 더 격렬했다. 구염상은 멍한 표정으로 헌원사사의 뒤를 따라갔다. 깊은 곳에 숨어있던 기억이 조금씩 새록새록 되살아나 눈앞이 흐릿했다.
헌원사사는 구염상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풀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란한 인파에 부딪히지 않도록 그녀를 등 뒤에 보호했다. 조금 전 거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찻집 안으로 대피해 뛰어 들어왔다.
다행히 저녁때라 사람이 많지 않아 찻집 안은 붐비지 않았다. 그저 대피한 사람들 중 나쁜 사람들이 섞여 있는 데다, 감정이 격앙된 상태이기에 헌원사사는 그녀에게 악인이 부딪힐까 걱정할 뿐이었다.
헌원사사는 사람들이 밀치고 붐비는 틈을 타 비틀거리는 할머니를 빠르게 자신의 등 뒤로 밀어낸 뒤, 조금 전 소녀와 함께 서 있게 했다.
헌원사사는 소녀의 표정이 안 좋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당황한 것도 아닌, 그저 멍하고 안색이 창백했다. 소녀의 외모에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감춘 헌원사사가 초조하게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놀란 마음을 진정한 헌원사사가 생각했다.
‘설마 바보는 아니겠지?’
“아가씨, 아가씨…….”
상황을 지켜보던 할머니는 힘겹게 긴 숨을 몇 번 내쉰 뒤, 나이가 들어 굼뜬 동작으로 옆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젊은이가 말을 걸고 있잖수.”
구염상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헌원사사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괜찮으면 됐어.’
하지만 까만 겉옷이 감춘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본 헌원사사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누구지?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외출을 한 건가? 조금 전 그 돌격 소리를 듣고도 어째서 피하지 않은 걸까?’
헌원사사는 결국 묻지 않았다. 남녀가 유별했고 상대방은 여인이었다. 조금 전 경솔하게 그녀를 건드린 것도 따지고 보면 무례한 행동이었고, 그녀가 왜 나왔는지는 더더욱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금씩 조용해지는 인파에 주의를 기울이는 헌원사사를 보며 구염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채 겉옷이 덮고 있는 발등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세상일이 참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기양양한 소년의 묵직함이 줄어든 헌원사사에게는 묵직한 성장의 상처가 더해져 있었다.
‘어마마마께서 헌원상의 벼슬길을 막고, 또 주소유를 망가뜨리면서 집안이 시끄러워진 걸까? 연경에서 제일가는 세도가의 후계자라는 자부심이 사라진 뒤 그는 저렇게 신중하고, 망설이는 사람으로 변한 걸까?’
구염상은 나쁜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들 모녀가 합심하여 오늘날 그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걸 헌원사사가 알게 된다면 그는 달려들어 자신을 죽이려 할까? 아니면 음흉하고 독한 계집이라며 욕을 할까?
어쩌면 예전처럼 영원히 말로 다할 수 없다는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구염상은 자신을 잡아당긴 노파를 바라보았다가 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억지로 등을 곧게 편 채, 고귀한 자태로 눈앞에 서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번 생에서 더는 그를 밟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돌이킬 수 없이 피 터지게 싸우는 고통을 겪지는 않을 테니, 그것만으로 자신에게 고마워할 터였다.
고개를 돌린 구염상은 공주의 위엄을 갖추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이미 벌어진 일은 어차피 만회할 수 없어. 기껏해야 앞으로 더 이상 얽히지 않고, 헌원씨 가문에 살길을 마련해 주는 정도가 되겠지!’
밖에서 들리던 소리가 멈췄다. 이어 관아의 북소리와 함께 어문의 검거가 끝났으니 거리는 안전하며, 자유롭게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찻집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사람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서로 상대방만 쳐다보고 있었다. 문은 여전히 닫힌 상태였다.
찻집 주인이 식은 죽 먹기라는 듯 문을 살짝 열었다. 그저 살짝 머리를 내밀고 상황을 살펴보려던 그의 반대편에서 갑자기 누군가 문을 밀어 젖혔다. 달빛 아래 은백색 장포를 입고, 보석이 달린 옥대를 맨 남자가 신선한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찻집 주인이었다. 다급히 대문을 연 그가 몸을 숙이며 읍揖(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며 하는 인사)을 했다.
“봉 대인, 고생하셨습니다. 봉 대인께서 왕림해 주시니 저희 가게의 무한한 영광입니다. 봉 대인, 안으로 드시지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주인은 뒤쪽을 쳐다보았다. 밖이 평온해진 틈을 타 그는 서둘러 점소이에게 문을 열고 계속 영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주문하지 않는 사람들을 내쫓으라고 덧붙였다.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사람들은 봉 대인에게 예를 갖추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관리와 백성 사이의 현격한 격차로 인해 관리를 본 백성들은 잘못을 저질렀는지와는 상관없이 멀리 숨고 싶어 했다. 따라서 선심을 쓴 주인이 채 내쫓기도 전에 용무가 없는 사람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봉익은 차갑고 굳은 표정으로 곧장 헌원사사에게 다가왔다. 말투는 표정보다 약간 따뜻했다.
“그렇잖아도 그대인 것 같아서 들어와 봤네. 이리 늦은 시간에도 바쁜 건가? 예부 일로 많이 바쁜 게 아니면 차나 한잔하지.”
헌원사사의 태도는 침착했지만 보이지 않는 약간의 서먹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두 사람은 나름 신분 격차를 극복한 상태였기에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처럼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그것도 좋지. 위로 올라가세. 어쩌면 택진도 아직 있을지 모르니.”
“오, 택진도 여기 있는 줄은 몰랐군.”
말을 하는 봉익의 시선은 내내 헌원사사의 뒤에 선 검은 옷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범인을 심문하는 것처럼 차가운 눈빛은 상당한 압박감을 주었다.
구염상은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그녀 역시 조금 전 사람들을 따라서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찻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봉익의 눈빛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 전 사람들과 함께 나갔더라도 문 앞에서 그에게 막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봉익은 구염상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저 어렴풋이 낯익은 모습이라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게다가 눈에 띄는 검은색 겉옷은 그녀를 도둑질을 하는 부류처럼 인식하게 했다. 봉익에게 낯익은 사람이라면 그건 범인, 혹은 강도였다.
친구의 곱지 않은 눈빛을 발견한 헌원사사가 갑자기 부드럽게 웃었다.
“봉익, 뭘 보는 겐가? 어찌 다른 집 아가씨를 노려보는 거야. 그쯤 하고 누구든지 그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고, 위층으로 올라가세.”
봉익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흉악범을 마주한 양 그가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호적을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구염상은 깨진 은자가 든 허리의 주머니를 봉익의 얼굴에 냅다 던지고 싶었다. 대체 무슨 원수가 졌다고! 심지어 그는 줄곧 자신을 노려보며 계모처럼 악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옹졸한 사람인 주제에 백성을 위해 횡포한 사람을 제거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인 척 하고 있다니!
“아가씨, 호적을 보여 주시지요.”
봉익의 말투가 자기도 모르게 단호해졌다. 그는 반박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머리 위에 쓰고 있던 모자를 젖힌 구염상이 봉익을 향해 더럭 화를 냈다.
“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길을 지나가는 것도 안 되나요? 즐겁게 길을 걸었을 뿐이니 절대 안 보여 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