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00)화 (400/449)
  • 외전 구염상 2-23

    송 부인은 우는 딸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바보 같기는. 그 아이가 정말로 너를 좋아한다면 네가 그만큼 기다린들 문제가 없겠지. 혹은 그 아이가 부마 후보만 아니었더라도 이 어미가 죽기 살기로 네게 첩실의 명분을 만들어 주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단다.

    만약 네가 계속 익이를 기다린다면 우리는 황실을 멸시한다는 죄명을 뒤집어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본래 우리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봉 부인이 너를 마음대로 시집보낼 수도 있어. 그러니 우리는 천천히 신중하게 의논해야지 맹목적으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 돼. 특히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두고 절대 스스로의 매력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 그럼 정말 끝이야.”

    “어머니, 알아요. 저도 다 안다고요……. 제가 어머니를 따라 눈칫밥을 먹을 시간이 얼마인데, 어찌 그걸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 송 부인이 즉시 엄격한 표정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노야께서 우리에게 기꺼이 밥 한 그릇이나마 먹게 해 주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데, 무슨 눈칫밥 타령이야! 만족할 줄 모르면 안 된다. 여인은 마음이 너무 커도 좋을 게 없어!”

    놀란 송미는 감히 반박하지 못한 채 몸을 움찔거렸다. 사람들은 모두 송 부인이 능력과 계획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송미의 눈에 어머니는 그저 처소를 지키며 군말 없이 양보를 거듭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송 부인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당황한 딸의 표정을 보고도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두 모녀는 어엿한 주인이 아니었기에 이 저택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따라서 그녀는 결단코 주인들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그들이 무슨 까닭으로 자신들을 부양해 주는지 따지려 들지 않았다.

    그간 송 부인은 딸이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여겼으나, 지금 보니 딸은 아직 너무 어린 데다 지나치게 보호하며 키운 탓인지 그리 생각이 깊은 것 같지가 같았다. 그렇다면 결국 딸을 대신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건 어머니인 자신이었다. 어쨌든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내일 내가 부인께 가서 너를 받아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마. 익이의 사촌과 혼사가 가능한지 말해보고, 안 된다고 하면 부인이 결정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구나. 하늘에 운명을 맡길 밖에.”

    송미가 즉시 당황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로지 봉익, 봉익 오라버니라고요!’

    그러나 송 부인은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확고한 모습이었다.

    지금은 어른이 적극적으로 나설 때였다. 봉 부인이 불쌍히 여겨 준다면 어쩌면 자신들에게도 선택권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만약 미운 털이 박혀 바로 쫓겨날 지경이라면 두 모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 만약 정말로 봉익에게 부마가 될 기회가 생긴다면 봉 씨 가문은 필시 이 저택에서 어떠한 화근의 씨앗이든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황실에 대한 신하의 태도였다. 그러니 송미는 반드시 시집을 가야 했고, 이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송 부인은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이를 운명이라 인정했다. 하지만 송미는 어머니와 달랐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봉익의 사촌이 아닌 봉익이었다.

    ‘어째서 오라버니에게 시집갈 수 없다는 거야?’

    송미가 보기에 봉익은 부마로 선택될 가능성이 있을 뿐, 반드시 부마가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녀는 어찌 기다릴 수도 없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 공주가 뭐가 좋다고!’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은 모두 교만하고 방자했다. 상 공주는 여 씨 아가씨를 때렸다. 그저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을 뿐인데, 스스로 시골뜨기처럼 차려 입고 사실은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욕도 하지 못하게 한다니? 대체 무슨 까닭으로 여씨 아가씨에게 손을 댄다는 말인가!

    ‘봉익 오라버니가 그런 여인을 좋아할 리 없어! 절대로!’

    송미는 남몰래 결심했다. 반드시 잡을 것이다. 무능한 어머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총명하다는 명성만 얻을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가 과연 자신의 것이 될지 아닐지, 반드시 시도해 볼 것이다.

    * * *

    편안하게 잠을 잔 구염상은 몸을 뒤척이면서도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남성南城의 공기는 옅은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연경의 경박함과 번잡함은 사라지고, 무릉도원의 그윽한 아름다움은 더해진 곳이었다.

    구염상은 이곳이 좋았고, 혼자 있기에 더더욱 좋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그녀가 조용히 자신을 감싼 침대 휘장 사이로 작은 머리를 내밀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살며시 소리쳤다.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선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염상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가끔은 악취미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소시小侍’라고 외치면 과연 그가 침대 위에서 갑자기 튀어나올지 궁금했다.

    그러나 구염상은 감히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다. 때로 여인은 자신을 속일 필요가 있었다.

    “오라버니는 갔어?”

    “가셨습니다.”

    목소리에는 조금도 기복이 없었다. 마치 고정된 것처럼 영원히 한 가지 음색을 갖게 된 것 같았다.

    구염상은 기분 좋게 침대 휘장 안으로 돌아갔다. 너무 흥분되어 견딜 수 없었다. 오라버니가 조정에 갔다는 건 앞으로 세 시진 동안은 자유라는 뜻이었다.

    구염상은 즉시 침대에서 일어날 동력을 얻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었다. 감시자가 없어진 틈을 타서 서둘러 신나게 놀 생각이었다.

    구염상은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사람은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소시’라는 이름은 구염상이 지어 주었는데, 사실 언제나 엄숙하고 차가운 얼굴을 생각하면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부르다 보니 익숙해졌다. 소시 역시 이름을 부르면 나타났고, 부르지 않을 때는 그저 공기였다.

    언젠가 구염상은 오라버니에게 그들은 혼인을 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라버니는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야? 손에 든 칼이 다른 칼을 찾아서 혼인하는 거 본 적 있어?”

    구염상은 오라버니의 비유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무기가 아니었다. 비록 그들의 존재를 쉽게 잊게 되기는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 없이 살 수 있겠는가?

    구염상은 의아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구염황에게는 그만의 처리 방식이 있고,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생각이 있기 마련이다. 동의를 얻지 못 한다 해서 굳이 부딪혀서 불꽃을 튀길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녀의 생각을, 오라버니는 그저 오라버니의 생각을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구염상이 무심코 한 그 질문으로 인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하마터면 소시를 데려가 태감으로 만들 뻔했다. 때마침 그녀가 맞닥뜨리지 않았다면 소시는 이미 태감이 되어 있을 터였다.

    이로 인해 구염상은 항상 마음에 가책을 느끼며 소시를 더 친근하게 대해 주려 했다. 비록 그녀의 친절은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구염상은 소시가 분명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시당초 구염락이 구염상에게 여공女攻을 붙여 주지 않은 이유는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결코 남공男攻의 품성을 걱정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만약 그 정도의 믿음도 없었다면 일등공은 ‘공’ 자를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구염상은 재빨리 거지로 행색을 바꾸었다. 시커먼 기름때가 모든 품격을 감춰 주었고, 풀어헤쳐진 긴 머리는 마치 수백 년간 감지 않은 것처럼 실컷 뭉쳐져 있었다.

    구염상은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모습으로 빠르게 별장을 뛰어나갔다. 그녀는 시중을 들던 대군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크게 소리를 질렀다.

    “따라올 필요 없어!”

    나는 듯이 별장 뒤로 뛰어나간 구염상은 즐겁게 군중 속으로 달려들었다.

    유모는 감히 공주를 쫓지 못했다. 공주는 황자와 달리 마음먹은 건 어떻게 해서든 쟁취해 냈다. 유모는 즉시 사람을 보내 궁에 있는 태자에게 소식을 알리고, 태자가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거나 공주를 쫓기를 기다렸다.

    * * *

    구염상은 즐거웠다. 사람은 정말로 가난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을 때 모름지기 미지의 것에 호기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녀 역시 다른 생활 방식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물론 구염상은 빈곤을 동정하거나, 약자에게 연민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강성한 주국은 거지들이 많지 않았다. 소수의 거지들은 전란이나 천재지변 때문에 형성된 것이 아닌, 대부분 조직적인 사기 집단이었다. 이렇게 안일하고 나태한 방식을 선택한 자들이라면 그녀가 구태여 더 나은 삶을 위해 분발하라고 가르치거나 인생의 의미를 연설할 필요가 없었다.

    구염상은 옆에 있는 부녀자와 똑같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깨진 밥그릇을 놓은 채 흐리멍덩한 눈빛을 했다. 눈은 너저분하고 더러운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혼자서 햇빛을 즐기러 나온 것이었고, 변장을 한 건 순전히 안전 때문이었다. 이대로 그녀의 얼굴을 보는 사람이 없다면 더욱 안전할 수 있었다.

    “새로 온 거야?”

    옆에 쭈그리고 앉은 부녀자를 바라보던 구염상이 정신을 차린 뒤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여자는 엄격한 눈빛으로 무슨 말을 하려다 구염상의 허약한 몸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벌이를 위해 진지하게 무릎을 꿇고 있던 그녀는 가끔씩 처량한 울음소리를 냈다.

    구염상은 살며시 한숨을 돌렸다. 쫓겨나지 않았으면 됐다. 구염상은 개미들을 쳐다보며 오라버니가 과연 언제쯤 자신을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못 찾도록 옷차림을 바꿀까? 그럴까, 말까… 그럴까?’

    생각에 몰두해 있던 구염상은 앞에 건장한 사내들이 설 때까지 옆에 있던 부녀자가 떠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녀자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등이 굽은 남자가 주는 은자를 들고 웃으며 뛰어가고 있었다.

    구염상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에게 팔린 것이다. 여인 가까이에 있으면 안전할 거라 생각했으나, 조금도 안전하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쓴웃음이 나오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백성을 위해 화근을 없애야 할까?’

    상황은 의지할 곳 없는 거지가 영락없이 할아버지 뻘인 노인에게 잡힌 모양이었다. 거지가 된 그녀로서는 백성을 위해 화근을 없앨 자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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