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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97)화 (397/449)

외전 구염상 2-20

구염상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이 조금 전 눈빛으로 자신을 도발한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송씨 아가씨는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이내 쩔쩔매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사람이 공주였다니!

땅굴에라도 떨어진 것처럼 금세 손발이 차가워졌다. 공주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건 중죄였기에 이를 황제가 알게 된다면 구족을 멸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온몸을 벌벌 떨었다.

봉익은 비록 미동도 없었으나 인정에 호소하는 눈빛으로 상 공주를 바라보았다.

구염상은 말없이 눈빛을 거두었다. 봉익은 자신의 은인이었고, 심지어 정말로 이들을 벌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는 곧 오라버니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

맥없이 땅 위로 쓰러진 송씨 아가씨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당황했다.

‘그 사람이 상 공주였다니… 황제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상 공주였다니…….’

송씨 아가씨는 마치 꿈이라도 꾼 듯했다. 그 손에 없는 게 없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공주가 정말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었다는 말인가.

한편 여씨 아가씨는 오라버니의 품에 쓰러진 채 두려움에 흐느껴 울었다.

‘내가 상 공주를 욕했어! 만일… 만일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쩌지? 만일 폐하께서 나를 추궁하면 어쩌지? 나는 죽기 싫어… 싫다고!’

누이동생을 부축한 여 공자는 진지한 눈빛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봉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상대가 누구인지 눈치채지 못한 데 대한 걱정과 당황이 섞여 있었다.

여 공자 역시 누이동생과 비교하여 나을 게 없지 않았던가. 줄곧 공주를 똑바로 쳐다본 것 또한 큰 불경죄에 해당했다.

봉익은 한숨을 쉬며 그들에게 별일 없을 거라고 손짓했다. 두 사람이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게다가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두 전하의 기억에 남는단 말인가. 당장 이 거리를 벗어나자마자 두 남매는 바로 이들이 누구인지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봉익은 말없이 손을 등 뒤로 돌렸다. 손에는 아직 흩어지지 않은 맑은 향기가 남아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봉익은 조금 전 구염상이 떠날 때 보인 마지막 눈빛을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정말 아는 사이인가?’

그게 아니라면 흘끗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에서 그토록 낯익은 느낌이 충만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봉익은 그녀를 만난 적이 없다는 걸 매우 확신했다.

봉익은 더는 생각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두 사람은 영원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구태여 그녀를 생각하는데 많은 시간을 빼앗길 필요가 있겠는가.

“죄송하지만 여 공자께서 제 사촌동생을 집까지 데려다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일이 남아 있어서 말이지요.”

여 공자는 기뻐하며 즉시 승낙했다. 그의 가문은 비록 작위를 가지고 있긴 했으나 이미 곤궁해진 지 오래였다. 가문에는 하인도 얼마 남지 않은 데다 대문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이 입은 옷조차 대문을 나설 때에만 입을 수 있었기에 여씨 남매는 봉익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봉익이 부탁을 한 것이다.

특히나 조금 전 이들은 공주에게 죄를 지은 뒤였기에 봉익의 부탁은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봉익은 그야말로 인생의 등대 같은 사람이었다. 봉 공자가 자신들을 비호해 줄 수만 있다면 황제는 당연히 이들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고, 공주는 영원히 그들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 *

“봉익을 알아?”

이대로도 안전하다고 생각했기에 구염황은 굳이 옷차림을 바꾸지 않았다. 아무리 담력이 넘치는 자라고 해도 감히 자신들을 팔아넘길 수는 없었다. 구염황은 누이동생과 함께 인적이 드문 거리를 걸으며 속으로 의혹이 생긴 질문했다.

구염상은 옷에 걸린 실밥을 잡아당기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아니요.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낯익지 않아요? 항상 아바마마께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모자라 상소문을 잔뜩 올려 아바마마를 귀찮게 하는 봉 어사御使의 아들이잖아요.”

구염황은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네가 어찌 알아?”

구염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사람들은 전부 봉 어사가 언제 아바마마께 처형을 당할지 내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모를 수가 없죠.”

‘그렇다 해도 그 집 아들이 누군지 알 정도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누이동생을 바라보던 구염황은 왠지 이 질문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누이동생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는 혼서를 제출하지 않은 자인데, 네가 만약…….”

구염상이 놀란 표정으로 오라버니를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저 한 번 더 쳐다봤을 뿐이에요. 설마 그거 가지고 저를 팔아넘기는 건 아니겠죠? 저는 그자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저 조금 낯익어 보였을 뿐이라고요.”

물론 구염상이 봉익과 일면식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친하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후에 남녀 간의 정을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구염상은 당시 봉익의 행동이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순전히 전생에서 마냥 착했던 그녀의 성격 덕분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구염상은 여 씨를 때렸다. 세상에 포악하고 제멋대로인 공주를 좋아하는 남자는 없었다. 봉익이 미치지 않고서야 계속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지 않은가.

구염상은 봉익이 사리에 밝고 이성적인 여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그녀는 이성적이지 못한 데다 성격도 나빠졌기에 이미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낯이 익다는 건 이미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뜻이지. 정말 봉익이 싫은 거라면 아바마마께 미리 한 말씀 올리는 게 좋겠다.”

구염상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바마마와 대체 무슨 관계가 있어요?”

막 설명을 하려던 구염황의 시선이 문득 맞은편에서 장을 보고 있는 중년의 남자에게 향했다. 그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풍엽 역시 그들을 보았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구염상에게 미소 지어 보인 것에 비해, 서풍엽은 아주 잠깐 구염황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 즉시 구염황에게 무엇을 물어 보았는지조차 잊어버린 구염상이 기분 좋게 백부를 향해 달려갔다.

“백부! 옆에 호위도 없이 어찌 직접 나오셨어요? 어떤 음식을 사러 오신 거예요? 상아도 먹고 싶어요!”

서풍엽이 활짝 웃어 보였다.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하는 구염상이 그를 좋아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준수한 풍채에 성숙한 모습은 여전히 연경 소녀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구염상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서풍엽이 좋았다. 그녀는 궁 밖으로 나올 때면 충왕부에 가고 싶어 했다.

구염황은 오늘날 충왕이 된 서풍엽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는 물러난 노왕야가 세자였던 서풍엽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을 때부터 줄곧 서풍엽은 아바마마를 만족시킨 적이 없었다.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아직 후계자도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피를 본 하이에나처럼 서씨 가문을 괴롭히고 충왕부의 이익을 나눠 가지려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서풍엽은 여전히 가문에서 누구를 양자로 삼을지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상황을 끝내려면 결국 남 보기 부끄러운 쟁탈전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이따금씩 구염황은 노왕야가 서풍엽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곤 했다.

‘서씨 가문을 아예 무너뜨리려고 작정한 건가? 그렇다면 노왕야는 뜻을 이뤘군.’

어렸을 때부터 사랑스럽지 않았던 구염황을 마지못해 바라본 서풍엽이, 고개를 돌릴 때보다 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첫째도 있었군요.”

그리고는 다시 눈빛을 구염상에게 고정시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어찌 이 꼴이 된 겁니까? 또 장난을 친 겁니까?”

“아니에요.”

구염황은 누이동생이 늙은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자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보자 더욱 기분이 언짢아졌다.

‘당신이 왜 나를 첫째라고 부르는 거지? 자기가 정말 내 백부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과거 어마마마와 혼약이 있었던 걸 빌미로 계부 흉내를 내는군. 젠장! 이렇게 낯가죽이 두꺼운 자가 있다니!’

“상아, 그만 돌아가야 해.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거야.”

중년의 아저씨가 누이동생을 꼬여서 딸로 삼으려 하다니 아주 야비하지 않은가!

그러나 구염상은 서풍엽의 팔짱을 끼고 신이 나서 말했다.

“싫어요. 오늘은 백부 댁에 가서 밥을 먹을 거예요. 식사 후 남성으로 갈 테니 오라버니 혼자 돌아가세요. 백부께서 남성까지 데려다주실 거예요.”

구염황과 마찬가지로 서풍엽 역시 구염황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요. 혼자 돌아가십시오.”

‘이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비협조적이더니 사람의 체면을 봐주는 법이 없군. 대체 구염락에게 어떻게 세뇌를 당한 거지? 전에는 장난을 치면 어찌할 줄 모르고, 체면도 이성도 다 버리더니.’

서풍엽은 사실 구염황의 악랄한 수단이 조금은 두려웠다. 상아가 좋은 아이가 아니었다면 오라비인 구염황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풍엽은 태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정확하다고 믿었다. 교활한 자!

“그럴 수는 없지요!”

만에 하나 서풍엽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어 상아를 왕부에 가둬 버리면 어찌 하겠는가. 그 나이를 먹고 자식 하나 없는 이가 무슨 일이든 못 할 리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구염황은 누이동생이 전혀 경계하는 기색 없이 변태 같은 아저씨에게 그저 바보처럼 웃어 보이자 반드시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전략을 바꾼 그가 웃는 낯으로 아이처럼 말했다.

“백부, 그렇다면 저도 별일이 없는 데다 백부의 솜씨를 맛보지 못한 지도 오래 되었으니, 함께 실례 좀 하겠습니다.”

서풍엽은 하마터면 장바구니를 구염황의 얼굴에 뒤집어씌울 뻔했다.

‘뻔뻔한 녀석, 책장을 넘길 때보다 더 빨리 낯빛을 바꾸다니!’

그나마 이런 오라버니를 두고서도 나쁘게 변하지 않은 상아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서풍엽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구염황에게 말했다.

“모처럼 도련님께서 왕부에 왕림해 주시는군요.”

말을 마친 서풍엽이 자연스럽게 장바구니를 건넸다.

“도련님께서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고르면 돌아가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저와 아가씨는 앞쪽에 있는 찻집에서 기다리고 있지요.”

말을 마친 서풍엽은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고 구염상을 데리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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