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96)화 (396/449)
  • 외전 구염상 2-19

    잠시 후, 국수와 추가로 주문한 혼돈 두 그릇이 나왔다. 봉 공자는 시종일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구염상이 오라버니 앞으로 혼돈을 밀어 놓았다.

    “정말 맛있어요, 오라버니. 좀 드세요.”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체면을 생각해 숟가락을 들었다. 누이동생과 달리 그는 임무를 수행하느라 밖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이제껏 먹지 않은 음식이 없었다. 혼돈 한 그릇은 그에게 기력을 조금 보충해 주는 음식일 뿐이었다.

    잠시 후, 구염상이 국물을 다 마셨다. 물론 황궁에서 먹는 음식보다 맛있지는 않았지만 밖에 나온 기분 때문인지 구염상은 특별히 혼돈을 소중히 여겼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지금껏 한 번도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가까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로 인한 흥분이 입맛을 돋우어 혼돈을 더 맛있게 했다.

    구염황은 누이동생을 일으키며 떠날 준비를 했다. 업신여기는 듯한 여씨 아가씨의 눈빛에 차가움이 더해졌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없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개한테나 주는 건데.”

    관포官袍(관리의 예복)를 입지 않았을 때의 구염황은 굳이 체면을 따지지도,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지도 않았다. 그저 백성들에게 욕이나 한두 마디 들은 것이기에 그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상대에게 참수형을 내릴 가치조차 없는 탓이었다.

    구염상 역시 딱히 개의치는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았다. 순간 막 고개를 든 봉 공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점점 커지던 구염상의 눈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 사람인가… 봉익?’

    구염상의 뇌리에 자신의 소맷자락에 물건을 집어넣던 봉익의 표정이 떠올랐다. 쓴웃음을 지은 그녀는 곧 몸을 돌려 오라버니와 떠났다.

    순간 굳어졌던 봉익의 눈빛이 곧 평정을 되찾았다.

    ‘나를 아는 건가?’

    하지만 봉익에게는 그녀를 만났던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 그녀의 동공을 스친 흔들림을 생각하면 두 사람은 필시 만났던 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스스로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는 봉익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옆에 앉은 송 씨 아가씨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촌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어찌 그러세요? 저 사람들에게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요?”

    “아니다.”

    봉익은 차갑게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소년답지 않은 냉정함이 흘렀다.

    소녀는 사촌 오라버니가 더 이상 그들을 바라보지 않자 살며시 한숨을 돌렸다. 조금 전 그 여인은 정말 예뻤다. 비록 병색이 짙었으나 분명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기품이 있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항상 다른 집에 얹혀사는 자신들의 처지 덕분에 자연스레 애처로운 분위기를 무기로 쓸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왔다. 남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애틋함에 끌릴 것이고, 그건 사촌 오라버니 역시 예외일 리 없었다.

    ‘만약 익 오라버니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어머니와 그녀는 더 이상 봉씨 가문의 객식구가 아닐 것이고, 누구도 감히 그들 모녀를 업신여기지 못할 터였다.

    조금 전 그 여인은 소녀에게 위기 위식과 함께 알 수 없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떠났다.

    * * *

    인적 없는 골목 안, 구염황은 맛있게 취두부를 먹고 있는 누이동생을 한 켠에 세워둔 채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그만 따라오지?”

    남자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등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뒤에서 쫓아오던 험상궂은 젊은이 역시 잠시 멍해졌지만, 그는 자신이 조심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웃음을 흘렸다.

    기껏해야 시골에서 상경한 남매일 뿐이었다. 연경 바닥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굴러먹은 자신이 그들을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는가?

    “눈치 빠르게 은자를 내놓는다면 이 몸이 너희를 용서해 주지.”

    고개 숙인 구염상이 기름종이에 싸인 음식을 얼른 쓸어모았다.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재빨리 먹어야 했다. 안 그러면 다 먹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녀는 눈앞에 나타난 두 남자가 죽고 사는 문제에, 또한 그들을 처단하는 오라버니의 행동에 관여할 권리가 없었다.

    남자의 말에 구염황은 차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두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조금 전 내 전낭을 가져간 것도 너희들이지? 지금 전낭을 돌려주면 목숨은 살려 주지.”

    남자는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의아한 눈초리로 구염황을 쳐다본 그는 아무래도 이 소년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 앞에서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없었다.

    험상궂은 젊은이가 갑자기 부하에게 호통을 치며 속에서 올라오는 괜한 불안감을 감췄다.

    “이 밥통아, 뭘 두려워하는 게냐! 거리에서 굴러먹으며 별의별 사람을 다 겪어 놓고 이제 와서 뭐 해! 자, 얼른 시작하자!”

    “죽어도 아쉬울 게 없나 보군!”

    막 손을 들려던 구염황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강도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동시에 관차官差(관청의 하급 관리) 한 무리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쫓았다.

    “거기 서라! 어서 저들을 쫓아라! 노도老刀는 무리를 이끌고 뒤쪽에서 포위 공격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라!”

    차역差役(관청의 심부름꾼)이 두 남매 앞을 나는 듯이 달려서 지나간 뒤, 뒤에서 우두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옆에서 국수를 먹던 봉익이었다.

    고개를 들고 봉익을 쳐다보던 구염상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함께 오자 손에 든 취두부를 오라버니에게 넘긴 그녀는 본능적으로 기품을 갖추었다.

    두 남매의 얼굴에 드러난 의구심을 알아챈 듯 봉익이 무뚝뚝하게 설명했다.

    “봉익이라 합니다. 최근 관아에서 줄곧 저 두 사람을 쫓고 있었는데, 저들이 두 분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저희가 쫓았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구염상은 봉익이 조금 전 우연히 옆에서 식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들이 줄곧 저희를 미행하고 있었단 말씀이신가요?”

    “네.”

    여전히 무뚝뚝한 봉익의 눈은 줄곧 구염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염상의 시선이 오라버니를 향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오라버니를 보며 바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색다른 방법으로 놀자고 제안한 건 다름아닌 그녀였다.

    ‘오라버니는 화가 난 걸까?’

    구염상은 조심스럽게 오라버니의 소매를 잡았다. 그녀가 큰 눈을 깜박이며 오라버니의 기분을 맞추려 했다.

    구염황은 그녀를 보지 않고 곧장 봉익에게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남매에게는 큰 불편이 없었으니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봉익이 길을 비켜 주었다.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손을 붙든 채 그곳을 떠나려 했다.

    순간 그윽한 향기가 봉익의 코끝에 은은하게 전해졌다. 아주 옅은 향기였지만 절대 틀릴 리 없었다.

    봉익이 돌연 구염상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당신들…….”

    구염황의 손이 함부로 누이동생을 건드리려 하는 봉익의 손을 쳐냈다. 채 대항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봉익을 순식간에 물리친 그가 냉랭한 눈빛으로 봉익과 대치했다.

    봉익의 미간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저 아가씨에게 한 가지를 물어보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남매가 스스로 신분을 드러낼 줄이야!

    봉익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즉시 두 사람이 결코 평범한 신분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정말로 농부라면 이러한 무공과 힘이 있을 리 없었고, 그가 보호하고 있는 누이동생은 그의 약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하는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서라도 등 뒤의 여자를 이토록 철저히 보호했을 리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봉익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연경에서 상대와 같은 체구를 가진 고수는 많지 않았고, 거기에 누이동생을 이렇게 절절히 보호하는 이는 더더욱 많지 않았다.

    봉익은 순간 머리에 떠오른 몇몇 이름들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설마 요즘 사건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탓에 의심할 여지없이 시골에서 온 듯 보이는 남자를 태자로, 그에게 보호받고 있는 여자를 공주라 착각한 건 아니겠지…….

    봉익은 터무니없는 생각에 대해 웃으려다 문득 고개를 들고 빈틈없이 시골 사람 행색을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변장 상태를 보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프다는 누이동생의 지나친 외모까지, 두 남매가 누구인지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당신은…….”

    순간 차가워진 눈빛으로, 구염황이 한 발 앞서 말했다.

    “그대의 추측이 정확하니 우리를 따라올 것 없다. 나중에 보지.”

    말을 마친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손을 끌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봉익을 쫓아 골목으로 들어온 산뜻한 여씨 아가씨의 눈에 두 남매가 포착되었던 것이다. 봉 공자의 옆으로 지나가는 두 남매를 보며 곧장 질투에 찬 분노를 드러낸 그녀가 옆을 스치는 구염상을 작은 목소리로 도발했다.

    “염치도 없네. 제 발로 찾아오면 봉 공자의 눈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봉 공자의 신발을 닦을 자격조차 없는 주제에!”

    오라버니의 손을 잡은 구염상은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여인을 쳐다보았다. 송씨 아가씨가 급히 경멸 어린 시선을 옮기며 재빨리 봉익을 향해 뛰어갔다.

    “오라버니! 조금 전에는 어찌 그리 가 버리신 거예요?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오라버니, 제가 갑자기 몸이 좀 불편해져서 그러는데 집에 좀 데려다주세요.”

    구염상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송씨 아가씨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여씨 아가씨보다도 더 큰 적대감을 드러낸 게 다 봉익 저자 때문이었다니. 어이가 없었다.

    구염상은 다시 시선을 돌려 조금 전 불경한 말을 꺼낸 여씨 아가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대로 뺨을 한 대 쳤다.

    “두 번이나 내게 불손하게 군 것에 대한 교훈이다. 한 번만 더 무례하게 굴면 본공주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반격하려던 소녀는 ‘공주’라는 두 글자에 완전히 멍해졌다. 그 옆에서 산처럼 큰 남자가 내뿜는 냉랭한 기운에 놀란 소녀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멍하니 있던 여 공자였다.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간 그가 누이동생을 부축했다. 복잡한 눈빛이 구염상의 치마에 잠시 머무르다 얼른 사라졌다. 감히 더는 함부로 쳐다보지 못한 채, 그가 누이동생을 부축하며 무릎을 꿇었다.

    “소신, 태자 전하와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두 분 전하께서 누이동생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