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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94)화 (394/449)
  • 외전 구염상 2-17

    구염락은 새로 추가된 구혼 문서들 중 ‘권’ 자가 적힌 문서를 오랫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거리낌없이 크게 웃었다. 너무나 통쾌했다.

    구염락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바로 권서함이었다. 이자는 너무 뛰어난 데다 결점이 거의 없었는데, 하필이면 문무文武를 두루 겸비한 인재인 관계로 장차 조정에서 정해신침定海神針(손오공이 사용하던 여의주)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과거 초혜전에서 보여 준 모습만으로도 권서함은 구염락으로 하여금 뼛속까지 질투를 느끼게 하는 상대였다.

    가문에 인품, 성장 과정까지 모두 흠잡을 데 없는 남자였다. 황아가 지금 누리고 있는 대우를 생각했을 때, 심혈을 기울인 교육을 받은 권서함의 아들이 결코 자신의 아들보다 뒤처지지 않을 것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과거 권서함처럼 콧대 높고, 안하무인일 수도 있겠지. 당시 장서열에게 푹 빠지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명문가 자제들 중 따라올 자가 없는 신화가 되었을 것이다.

    구염락은 권택진이 낯설지 않았다. 아비 못지않게 뛰어난 인물이 청혼서를 올리다니! 구염락은 딸 덕에 기고만장해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런 인물이 자신의 딸을 얻기 위해 수많은 범인凡人들과 함께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에 구염락은 득의양양했다.

    구염락은 이 방법이 결코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권서함은, 그와 관계를 맺는 것만으로도 영광을 느끼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권서함의 아들이 데릴사위로 들어올 리 없다는 것이었다. 데릴사위로 들어오면 더 좋았을 텐데.

    문득 구염락은 의아해졌다. 헌데 권택진이라면 공주의 신분과 외적인 요소들에 흔들릴 만한 사람은 아닌데, 어째서 청혼을 한 것일까?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있나?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텐데……. 누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도 들은 적이 없고.’

    구염락은 권택진이 어떠한 연유로 상아를 좋아하게 됐는지 의심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그가 제 아비와 마찬가지로 마음고생 할 운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공주를 좋아하는 권택진 앞에 또 다른 황제가 나타나 상대를 빼앗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운명이 제 아버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었다.

    구염락은 일단 권택진이 남몰래 자신의 딸을 좋아하는 것을 허락했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는지, 후에 실의에 잠기지 않을지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권택진의 청혼서를 뽑아낸 구염락은 이를 한쪽으로 던진 후, 다른 청혼서와 마찬가지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권택진의 문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 * *

    마차가 막 황궁을 나섰다. 마차에 앉은 구염상이 채 한숨을 돌리기도 전, 갑자기 오라버니가 억지로 얼굴을 밀어 넣는 모습이 보였다. 구염상은 한없이 처량한 표정으로 얼른 소리쳤다.

    “지금 막 돌아왔잖아요? 어마마마께 안부 인사 드리러 안 가요?”

    ‘궁문도 아직 안 들어섰는데!’

    구염황은 부채질을 하면서 단숨에 차 한 주전자를 다 마셨다.

    “한 주전자 더.”

    구염상은 또 무시당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오라버니는 겨우 두 살이 더 많으면서 왜 이십 년은 더 먹은 것처럼 구는 걸까.

    차를 우리는 구염상은 왠지 울고 싶었다.

    “오라버니… 저 정말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을 거예요. 그냥 궁 밖으로 나가 보려는 거고, 오늘 밤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따라올 거예요?”

    ‘내일 조회시간 때까지 못 돌아온다고요!’

    애꿎은 눈을 깜빡이며 구염상은 오라버니가 생각을 바꾸길 기도했다. 그러나 구염황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입안에서 자연스레 찻잎을 걸러냈다.

    “밤에 어디서 머물 거야? 동쪽에 있는 별원, 아니면 서쪽?”

    두 사람은 연경 전체에 걸쳐 각자 저택을 갖고 있었다. 구염상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북쪽이요.”

    어렸을 때부터 지금껏 구염상은 몰래 도망치는 데 실패한 채 전부 오라버니와 동행해야 했다. 구염상은 정신적인 압박을 받았다. 혼자 나가서 좀 걷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오라버니는 시종일관 그녀를 어린아이 취급하며 혼자 나가지 못하게 했고, 어디를 가든 따라왔다.

    구염황이 곧장 결정을 내렸다.

    “북쪽은 너무 머니 서쪽으로 하자. 마침 나도 청산에 안 간 지 오래됐어. 이 오라버니가 청산에 데려가 주지.”

    구염상은 고개를 돌렸다.

    “싫어요! 오라버니는 체격 때문에 너무 눈에 띄잖아요.”

    “그럼 가서 살이나 좀 빼고 올까?”

    구염황은 알랑거리며 누이동생을 쳐다보았다. 근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환심을 사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구염상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제멋대로인 오라버니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제일 어린 동생은 따로 있으니 누구든 자신을 볼 때마다 자연스레 윗사람이 되려 하지 않았을 터였다.

    “…청산은 안 가요.”

    ‘정말 너무 티가 난다고요.’

    구염황은 누이동생이 뜻을 굽히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네가 원하는 곳에서 놀자.”

    구염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라버니는 어디를 가든 눈에 띌 거예요. 총명한 사람은 즉시 우리의 신분을 알아채겠죠.’

    구염상은 손에 든 옥수玉穗를 말없이 만지작거리다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오라버니, 이번에는 새롭게 놀아 볼까요?”

    물론 구염황은 이견이 없었다.

    “네가 즐겁다면.”

    흥분한 구염상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옷을 꼭 쥐었다.

    “우선 오라버니는 옷차림을 바꾸고…….”

    구염상은 생각한 바를 상세히 늘어놓았다. 구염황은 잘 할 자신이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낡은 수레에 앉아 있었다. 바퀴에는 기나긴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키가 크고 뚱뚱한 오라버니가 마르고 얼굴이 누렇게 뜬 누이동생을 데리고 연경에 치료를 받으러 왔다. 오라버니는 누이동생의 병세가 걱정되어 길을 재촉하다가 발이 삐었다. 농사꾼의 자식인 오라버니는 갖은 고생을 겪은 후 피곤에 쩌든 상태를 가감 없이 보여 주었다.

    구염상은 오라버니가 보여 주는 울적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에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동안 아버지를 얼마나 속였으면 이렇게 감쪽같이 흉내를 낼 수 있는 거예요?”

    부드럽게 누이동생을 노려본 구염황이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용히 해. 우리는 아버지를 일찌감치 여의고, 의지할 곳 없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중이야.”

    누이동생의 몸에 낡은 이불을 덮어 주며 구염황이 위로하듯 처량하게 말했다.

    “안심해. 이 오라버니가 반드시 널 고쳐 줄 테니…….”

    구염상은 부끄러워 진땀을 흘리는 한편, 오라버니의 배짱에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꾸며낸 상황이라도 아무나 황제를 두고 이런 막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몇 년 동안 오라버니의 악담은 정점에 이르렀다. 이는 부황의 지위에 가까워진 구염황이 이제 한담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는 걸 증명해 주었다.

    구염상은 자기도 모르게 약간의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뒤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오라버니이자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오라버니는 다른 이유 때문에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그냥 그녀 자체를 좋아했다.

    구염상은 기분 좋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방해 없이 시야가 무한대로 넓어졌다.

    두 사람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곁눈질도 없이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빴다. 이상하게 훑어보거나 경외하는 눈빛도 없었다. 우연히 그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경시나 동정, 혹은 유감스러워하는 시선이었기에 구염상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백성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문득 허리춤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 구염황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려다 어색하게 놓아 버리곤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누이동생을 끌고 앞으로 갔다. 별거 아닌 좀도둑 때문에 구태여 누이동생의 흥을 깰 필요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구석으로 간 어린 소년이 흥분한 채 더러워진 쌈지를 다른 남자에게 건넸다. 기뻐 날뛰며 쌈지를 열던 남자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제길! 감히 이 몸을 놀리다니!”

    남자가 흉악한 표정으로 쌈지에 들어있던 돌멩이를 벽에 던져 버렸다. 퍽 하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눈빛이 난폭해졌다.

    “가서 그들이 어디 머무는지 알아 봐! 감히 이 몸을 놀리다니 살고 싶지 않은 게지!”

    “네, 형님!”

    기대한 은자가 없자 소년 역시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힘들게 훔쳤는데 가짜라니! 감히 허탕을 치게 했으니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했다.

    한편, 거리를 한 바퀴 돌던 구염상은 이러한 방식으로 노는 것이 오히려 몸을 상하게 한다는 걸 깨닫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 저는 맘에 드는 물건을 만져 볼 수도 없고 시끌벅적한 모습을 볼 수도 없나 봐요.”

    아픈 사람이 어찌 치료도 받지 않고 거리 구경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이동생의 말에 구염황이 즉시 작은 객잔을 찾았다. ‘아끼는’ 낡은 수레를 임시로 맡겨 둔 그가 누이동생을 부축하며 거리를 거닐었다.

    “너는 연경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즐거움을 느낀 거야. 너는 저잣거리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아이니까 마음에 드는 것이 보이면 창피해도 무척 감탄하는 소리를 내야 해.”

    구염상은 참지 못하고 오라버니를 곁눈질했다.

    “오라버니, 너무 대범한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저를 혼자 내버려 두는 편이 더 좋지 않아요?”

    “안 돼, 사람이 너무 많아. 너랑 부딪히면 다른 사람에게 불공평해.”

    구염황은 뒤에 누군가 있다는 걸 느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연경에 병을 치료하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은자를 가지고 있었다. 구염황은 습관적으로 완벽하게 흉내를 내느라 가짜 전낭을 찼을 뿐인데, 공교롭게도 다른 사람이 눈독을 들인 것이다. 이렇게 따라오는 걸 보니 헛다리를 짚은 것을 알고 성이 난 게 분명했다. 참으로 우스운 자들이었다. 제 잘못이 분명해도 억지를 부리다니.

    “오라버니, 왜 그래요?”

    구염상이 입을 가리며 기침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구염황은 그녀를 부축하며 음식을 파는 작은 노점 쪽으로 걸어갔다.

    “뭐 좀 먹을래?”

    구염상의 눈이 즉시 반짝였다.

    “그래도 돼요?”

    그간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아무거나 먹지 못하도록 음식을 엄격하게 통제했기에 궁 밖의 음식은 하나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가 허락했으니 괜찮아.”

    구염상은 즉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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