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16
그늘진 곳에 앉은 구염상은 마음이 아픈 듯 오라버니를 향해 동정의 눈빛을 깜빡였다. 그녀는 얼음에 넣어 시원한 수박을 깨물어 먹으며 오라버니가 천 발의 화살을 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구염황의 화살은 과녁의 붉은 중심을 맞추어야 했고, 한 번이라도 명중하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세어야 했다.
과즙 가득한 수박을 베어 물자 과육의 시원 달콤한 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목마른 세포 하나하나까지 촉촉하게 적신 수박이 시원하게 위로 흘러들어갔다. 구염상은 순식간에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구백칠십팔, 구백칠십구, 구백… 오라버니, 제가 오라버니라면 이렇게 땡볕 아래서 고생하지 않고 아무나 태자비로 맞이했을 거예요.”
구염상은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다시 수박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는 오라버니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는 심산이 아닌, 이상한 성격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구염락은 구염상에게 그늘에 앉아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수박을 먹으라고 시켰는데, 심지어 먹으면서 즐거운 척까지 해야 했기에 구염상은 오히려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쉬지 않고 계속 먹는다면 누구인들 즐거울 리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고생스럽게 준비해 준 화복華服에 실수로 구멍을 두 개나 뚫었던 걸 생각하면, 구염상은 잠자코 앉아 수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구염황은 계속해서 활시위를 당겼다. 비 오듯 땀을 흘리는 코끝에 수박의 달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괴롭힘이었다.
하지만 구염황은 이렇게 해야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걸 인정했다. 부황께서 누이동생에게 시킨 짓은 학대였다. 서둘러 천 발을 다 쏘지 않으면 상아는 배가 불러 죽을지도 몰랐다. 물론 누이동생이 알아서 꼼수를 부리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가운 게 얼마나 안 좋은데, 차라리 남겨서 내가 먹는 게 낫지!’
구염황은 화를 참으며 누이동생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폭군은 내가 하는 말은 아예 안 듣는다니까! 혼인을 하겠냐고 물어서, 어느 가문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딱 한 마디 했을 뿐이야. 그런데 그게 어떻게 내가 어마마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서 장가를 안 가는 게 되는 거지? 그래 놓고 여기서 주구장창 활이나 쏘게 하다니, 대체 나는 누구를 찾아가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거냐고!”
구염상은 곧 울 것만 같은 오라버니의 푸념을 들으며 고개를 숙인 채 계속해 수박을 먹었다.
“외숙부 가문이나 당씨 가문 여식도 괜찮으니, 아무나 한 명 골라서 아내로 맞이하면 되잖아요.”
“그 말라비틀어진 것들은 싫어! 만에 하나 깔려 죽기라도 하면 누구 잘못이겠어?”
‘아무나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거군. 그렇다고 이 뜨거운 땡볕을 견디며 활을 쏘고 있다니, 미련하기는!’
묻지도 않은 과즙을 우아하게 닦아낸 구염상이 침착하게 다시 수박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없을 때 오라버니가 하는 말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동생 앞에서 깔려 죽니 마니를 언급하는 것이 오라버니로서 과연 적절한지는 의문이었다.
구염상이 불쌍한 표정으로 못 알아들은 척했다.
“둘 다 마르지 않았어요. 오라버니가 너무 뚱뚱한 거죠.”
구염상은 깨달았다. 오라버니의 체중은 오라버니가 정성껏 먹고 노력하여 얻은 결과였다. 겉으로는 빈틈없는 척, 속으로는 옹졸하기 그지없는 생각을 하며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자신은 즐거워하는 방식이었다.
그간 자제력으로 보아 구염황이 체중을 줄여 주국에서 제일가는 미남이 되는 건 불과 몇 개월만으로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놀라울 정도로 둥근 얼굴로 조정 대신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구염상은 그저 누이동생으로서 오라버니에게 고기라도 먹여 나름대로 정신적 부담을 줄여 주고, 조금이나마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할 따름이었다.
“천!”
올해로 꼭 열다섯 살이 된 구염상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든 수박을 던지고 탁자 위에 엎드렸다.
“죽을 것 같아요, 진짜 죽을 것 같아…….”
재빨리 떨어진 조각을 든 구염황이 수박을 깨끗이 해치웠다. 이어 다음 수박을 쪼갠 그가 순식간에 이를 해치운 후, 그 다음 수박 역시 껍데기만 남겼다.
오라버니를 바라보던 구염상이 공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혹시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궁녀 류소謬小라든지?”
“무슨 소리야. 내가 어찌 내 궁녀를 함부로 대하겠어.”
“그러니까요. 함부로 하고 싶으면 벌써 그렇게 했겠죠.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니 참고 있을 이유도 없고요.”
‘그럼 무슨 이유로 아직 혼인을 하지 않은 걸까… 설마…….’
“혹… 아바마마의 후궁에게 관심이 있어요? 이를테면 불을 뿜는 오 빈이라든지…….”
순간 구염황은 수박 껍데기로 구염상의 입을 막아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너나 걱정해, 너나! 네게 구혼하는 공자들 때문에 아바마마께서 얼마나 귀찮아 하시는지 알아? 어쩌면 혼담을 건넨 사내들 전부와 한동안 시간을 보내게 한 뒤, 네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을 고르게 하실 수도 있어.”
구염상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주변의 풍경이 그 빛을 잃을 만큼 둘도 없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오라버니?”
‘아니, 오라버니가 없는 말을 그냥 지어낼 리는 없는데……. 아바마마께서는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
구염황이 동정하듯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땀을 식힌 그는 제법 기품 있는 모습으로 시녀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더러워진 손을 닦았다.
“정말이야. 아바마마께서는 사윗감을 고르느라 눈이 다 침침해지셨어. 다들 너무 뛰어나니 누구든 포기하기가 아쉬우신 거지. 게다가 아바마마께서는 상아 너를 하늘이 주국에 선물한 보물이라고 생각하신다고. 아주 특별한 혼인을 위해 어떻게든 새로운 방법을 찾고 싶어 하시지.”
끊임없이 놀라운 말을 쏟아내는 오라버니를 향해 구염상은 너무나 묻고 싶었다.
‘오라버니가 아바마마께 강력히 권한 건 아니고요?’
아버지가 아무리 분별력이 없다고 해도 절대 자신의 이름을 이리 천박한 행실과 함께 만고에 남게 하지는 않으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구염상이 화를 내며 오라버니에게 수박 껍데기를 던졌다.
“거짓말하지 마요!”
잽싸게 피한 구염황이 크게 웃으면서 수박을 안고 멀리 도망쳤다. 그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상아, 나는 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 남자란 자고로 다들 속이 시커멓기 때문에 절대, 아무나 좋아해서는 안 돼! 게다가 혼사라는 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만나보지 않으면 얼마나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인지 절대로 알 수가 없다고!”
화가 나 얼굴을 구긴 구염상이 발을 동동 굴렀다.
“구염황!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구염락은 아들의 말이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딸아이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데다 상냥하고 예의까지 바르니, 당연히 최고로 적합한 상대를 골라야 마땅했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이를 고르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 보는 일이 필요했다.
걸음을 멈춘 황제를 보며 혜령과 소리자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설마 폐하께서 정말로 그런 방법을 쓰시려는 건 아니겠지?’
구염락은 멀리 뛰어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 아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 장성하여 벌써 혼담이 오고 갈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큰 녀석은 이미 혼기가 지나고 있음에도 매번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퇴짜를 놓으며 어떠한 규수도 마뜩잖아 했다. 그러면서 온종일 후궁에만 붙어 있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구염락은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이렇게 속을 썩여도 억지로 혼인시키지 않으니, 이렇게 사리에 밝은 아버지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쩌면 아들이 십육 년간 근면성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생긴 믿음인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었다면 구염락은 일찌감치 아들을 혼인시킨 후, 손자에게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 * *
주국에서 사자 석상이 가장 넓게 이어져 있는 저택.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이곳은 오랜 세월 국가 요직을 차지해 온 권씨 가문의 고택이었다. 장엄한 대문과 담장은 6대 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오늘날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으나 초라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주인의 소박하고 아늑한 성품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독채의 독특한 서방 안, 비단 장포를 입은 권서함이 언제나처럼 고상하고 근엄한 모습으로 창 앞에 서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창 밖의 대나무 숲을 바라보는 그의 손에는 조금 전 아들이 건넨 문서가 들려 있었다.
문서를 본 뒤, 약간 망연자실해졌던 권서함의 평온한 안색은 다시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저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힘들어, 운명의 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정말로 내가 이 문서를 올리길 원하느냐.”
소년은 그 나이 때의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침착한 모습에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신비로운 운치가 있었다. 감정과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얼굴과 뛰어난 재능과 학문을 보여 주는 평온함은 그야말로 명문가의 기개였다.
“네, 아버님. 그렇습니다.”
말을 마친 권택진은 공손한 태도로 아버지께서 나가라고 하시기를 기다렸다. 경험상 아버지의 다음 말은 늘 ‘물러가거라’였다.
하지만 권서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권택진은 침착한 표정에,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문서가 청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와 같은 상소문이라는 것처럼.
한참 뒤, 창문 앞 그림자가 천천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명문가 자제들이 폐하께 똑같은 내용을 올렸는지 알고 있느냐? 너 역시 많은 이들 중 하나일 뿐이며, 다른 이들보다 더 우월할 것이 없다. 폐하 또한 수많은 구혼자들 중 구태여 나의 신분 때문에 너를 눈여겨보지는 않을 것이다.”
권서함의 말은 매서웠다. 침착한 태도의 권택진은 그 나이 때의 아버지보다 더욱 감정을 억누르며, 공손하게 말했다.
“아버님, 다른 명문가 공자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그 자들은 제가 아닙니다. 저는 쟁취하지 않으면 절대 기회가 없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권서함은 뜻밖에도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 아비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평온한 권택진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의아하다는 표정이 어렸다.
“그럼 아버지, 어찌해야 할지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십시오.”
권서함은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러가거라.”
권택진 역시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네.”
소년은 몸을 돌려 떠났다. 그의 풍채가 해와 달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