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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92)화 (392/449)
  • 외전 구염상 2-15

    잠시 누이동생을 바라본 구염황이 다시 눈앞에 놓인, 마음이 맑아지는 은백색 눈송이를 쳐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침울해진 오라버니를 보며 구염상은 그제야 단호한 눈빛을 거두었다. 왠지 쓸데없는 일을 벌인 것만 같았다. 오라버니는 나라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태부들의 가르침을 받는 이였으며, 또한 언제나 아버지의 감시를 받았다. 분명 비슷한 말들을 무수히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라버니는 언제나 제멋대로 굴었다. 어쩌면 잘 몰라서가 아닌, 평소 너무 큰 압박을 받아온 탓에 어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지나치게 해방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손을 내민 구염상이 침울해진 오라버니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든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순간 웃음을 터뜨린 구염황이 한 손으로 누이동생을 들어올렸다. 구염황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빙글빙글 돌며,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찬란하게 웃었다.

    중력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에 구염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오라버니가 기쁘게 웃는 모습을 보자 그녀 역시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혈색이 다시금 불그스름해졌다.

    “더 빨리요, 빨리! 하하!”

    사실 뚱뚱해도 좋은 점은 많았다. 구염황은 적어도 종이를 드는 양 구염상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물론 구염황의 힘이 센 것은 뚱뚱한 것만이 이유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의 몸은 이미 두 살 때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진귀한 약재로 단련되어 있었다.

    * * *

    즐거운 태자와 공주의 모습이 사라진 뒤, 잘 차려 입은 아이 두 명이 매화산 뒤에서 걸어 나왔다. 이제 네 살이 된 큰 아이는 엄숙한 표정에 평온한 모습이었다.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서는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 자제의 기질이 엿보였다.

    네 살 아이의 뒤를 따르는 남자아이 역시 신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먼 곳을 쳐다보던 아이가 눈길을 거두었다.

    “택진 형님,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잠시 후, 권택진權澤秦이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자.”

    헌원사사는 군말 없이 권택진을 따랐다. 그의 신분은 결코 권씨 가문의 공자보다 귀하지 않았다. 최근 일 년 사이 벌어진 일들을 통해 헌원사사는 자신이 권 공자의 결정에 반박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는 일종의 본능적인 직감으로, 굳이 그 이유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역경은 사람을 일찍 성숙하게 만든다. 오늘날 헌원사사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친 자신의 가치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며, 소속된 모든 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조정하고 있었다.

    이는 권씨 가문 공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지나간 사람들은 상 공주와 태자이지요?”

    권택진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응.”

    권택진의 표정과 태도는 그의 부친과 8할은 흡사했다. 그러나 그토록 귀한 신분을 지닌 권택진 역시 사실상 세간에 수도 없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어머니를 둔 헌원사사보다 나을 게 없었다.

    어머니 백 씨 덕분에 권택진은 성장 과정 내내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명문가 자제라는 말은 듣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감당해야 할 책임과 압박은 일국의 태자와 별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하필 그에게도 특별히 뛰어난 아버지가 있었다.

    * * *

    멀리서 두 아이가 돌아오는 모습을 본 장서열은 왕 마마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와 앉히라고 명한 후, 줄곧 따뜻하게 데워 두었던 음식을 열었다. 신하의 말을 듣고 있던 구염락은 옆을 보며 아이들에게 특이사항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계속해 신하에게 축하 인사를 받았다.

    연회는 대신들과 그들의 식속들이 만세를 세 번 외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동시에 노래와 춤, 연극도 막을 내렸다.

    조로전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고요해진 황궁의 높은 담을 바라보며 구염락은 아들딸과 함께 산책을 했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손을 잡고 있었고,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두 사람 주변을 빙빙 돌았다. 궁녀와 태감은 주랑 옆 외나무 위에서 폴짝폴짝 뛰는 두 전하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장서열은 미소 띤 얼굴로 아이들이 그대로 뛰놀도록 내버려 두었다. 다시 구염락을 향해 몸을 돌린 그녀가 약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내년 봄에 또 친정을 나가신다고요?”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구염락이 위로하는 눈빛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안심해. 그저 전쟁을 시작하러 가는 거니까, 길어도 한 달이면 돌아올 거야.”

    구염락은 매번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구염황을 재차 엄격하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의외의 일이 발생했을 때, 아들이 이 세상을 짊어지고 모후와 누이동생을 호위할 능력을 갖추길 바라면서.

    장서열이 구염락의 손을 꽉 쥐었다. 말없이 조용한 밤 풍경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마음에 잔잔한 온기가 감돌았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위엄 넘치지만 고독하고 쓸쓸한 승건전 안, 황좌에 앉은 늙은 구염락은 따뜻하고 고요한, 그러나 결코 그의 것이 아닌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늙은 구염락은 너무나도 익숙한, 한때는 자신의 모든 것이라 여겼던 승건전이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졌다. 황좌야말로 권세의 끝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는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이 승건전이 온갖 감정을 낭비하고 있는 저 산책만도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젊은 자신은 적어도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비록 젊은 그를 따뜻하게 만든 것이 어쩌면 순수하지 않은 마음이라 해도, 가족들과 함께 산책을 하는 발걸음만큼은 분명 한가롭고 편안했다.

    어쩌면 과거 처음 그녀의 모습을 봤을 때처럼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 * *

    “아바마마, 아바마마! 눈이 와요!”

    떨어져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눈을 손으로 받쳐 든 구염상이 반짝이는 눈 속에서 즐겁게 뛰었다. 누이동생을 본 구염황 역시 꼬불꼬불 이어진 주랑에서 벗어나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잡기 위해서였다.

    발치에 쌓인 눈을 조심하라 이른 장서열과 구염락은 팔짱을 낀 채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 * *

    화려하고 웅장한 뜰 안, 내각 대신 이 노야는 어린 손녀가 하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얼른 딸을 옆으로 끌어당긴 며느리는 초조한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딸이 잠시 사라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매화 숲에 가서 태자를 만났을 줄이야!

    ‘게다가 불손한 말까지 내뱉었으니, 이러다 아버님께서 딸아이에게 회초리를 드시기라도 하면 어쩐다.’

    이 대인은 위로하듯 아내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릴 뿐, 별다른 말을 할 뜻이 없어 보이자 그는 그제야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야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태자가 문제 삼지 않은 일을 신하가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태자는 한낱 여자아이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돌아가거라. 앞으로는 아이를 잘 지켜보고.”

    이 대인은 즉시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가 멀리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아내와 함께 한숨을 쉰 그가 아이를 데리고 처소로 걸어갔다.

    어린 딸은 부모님이 무거운 짐을 벗은 줄도 모르고 어머니 옆에서 애교를 부렸다. 아이는 곁에 큰오라버니와 둘째 오라버니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딸아이를 재우고 잘 준비를 마친 이 부인은 남편이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책을 읽는 모습을 보았다. 남편을 쳐다본 그녀가 곁에 앉아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물었다.

    “태자가 우리 예아蕊兒를 좋아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강직한 이 대인은 부인의 말에 깜짝 놀라 방 안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들을 다급히 내보냈다. 그가 불쾌한 표정으로 조강지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태자가 이제 몇 살이라고.”

    하지만 이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이 부인이 변명하듯 말했다.

    “어린 게 대수인가요? 철이 없을 때도 지났고, 좋고 싫은 건 알 나이잖아요. 호감이 있는 게 아니라면 예아가 그리 불손한 말을 했는데 태자가 어찌 질책 한 마디 하지 않았겠어요. 분명 우리 예아가 싫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니 문제 삼지 않은 거죠.”

    이 대인은 부인의 긍정적인 발언이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게 뭐 대단한 것이겠소. 그래 봐야 아이일 뿐인데.”

    이 부인은 남편이 반박하지 않자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기쁘게 말했다.

    “왜 대단하지 않아요? 태자 나이가 벌써 일곱이니, 이제 오 년만 지나면 혼사를 논할 때가 되잖아요. 그때가 되면 우리 예아 나이도 마침 적당한 데다 태자와 한 번 만난 인연도 있으니,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예요.”

    이 부인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보며 웃었다. 이 대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어찌 될지 모른다고? 허면 어느 정도로 가능성이 있을까… 양원良媛? 태자비?’

    이 대인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기야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태자의 혼사가 거론될 오 년 뒤면 그의 딸은 가장 꽃다운 나이가 된다. 게다가 예아의 조부는 내각 중신이었고, 아버지인 자신 역시 높은 자리에 있는 데다 어머니는 남방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보다 우수한 몇몇 가문의 딸은 나이가 너무 많거나 혹은 너무 어렸다.

    설령 더 높은 가문에서 또 다른 여식이 태어난다 해도 어차피 그의 딸 예아보다는 무려 여섯 살이나 어렸기에 절대로 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어쩌면 딸아이는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를 살려 정말로 양원에 봉해질지도 모른다. 만약 총애까지 입어 황손이라도 낳는다면, 미래엔 누구도 흔들지 못할 4비四妃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 이씨 가문은…….’

    이 대인은 서둘러 생각을 멈췄다. 그는 일평생 교묘한 수단을 써 사리사욕을 취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헌데 어찌 상상 속 부귀영화에 이성을 잃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대인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말이라면 특히나 조금도 새어 나가선 안 되었기에 그는 아내에게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 * *

    구름이 말끔하게 걷혔다. 힘차고 활기찬 발걸음을 내딛은 주국은 마침내 천하 제패의 첫 장을 열었다.

    주국은 계속해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삼켰고, 적국이었던 호국 또한 차지하며 또 한 번 국가의 큰 경사를 맞이했다.

    영덕제 21년 봄, 온 나라가 크게 축배를 드는 가운데 조정의 정세는 자못 심각했다. 세 차례 확장을 거친 승천전昇遷殿은 천여 명의 관원을 동시에 수용하며 매일 정무에 임하는 중요한 국무대전이 되었다.

    국토는 전에 없이 방대해졌고, 권력 다툼은 고도로 격화되었다. 번잡한 관원 체계는 질서를 갖추며 영덕제 치하에서 특별한 집단을 형성했다.

    쇠하지 않는 대업과 의지가 굳센 땅을 위하여, 구염황을 향한 구염락의 요구사항도 더욱 엄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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