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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91)화 (391/449)

외전 구염상 2-14

구염락은 두 아이를 찾을 생각 없이, 곧장 옆에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화났지.”

구염락을 바라본 장서열이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당긴 후 품에 안겼다.

“화날 게 뭐가 있겠어요. 당신은 저 때문에 어머니의 노여움을 산 건데……. 만족을 모른다면 오히려 사리분별을 못하는 거죠.”

구염락이 하하 웃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정중하게 말하면서도, 실은 어머니를 절벽으로 밀어 버리고 짐에게 고함치지 못해 한스럽잖아.”

“그렇게 티가 나나요?”

“당연하지, 그래서…….”

코끝으로 간간이 향기가 전해졌다. 구염락은 품속에 편안히 안겨 있는 이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고마워. 짐은 어머니를 용서했어.”

장서열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가볍게 구염락을 밀었다.

“아닙니다.”

마음이 동한 구염락이 순간 난폭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는 벗어나려고 하는 장서열의 손을 제지한 뒤 그녀를 탑 위로 밀어 넣었다.

* * *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밤, 휘황찬란한 꽃불이 거리를 붉게 물들였다. 새해의 밤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징과 북소리, 거리마다 흩날리는 향기는 부유한 백성과 강성한 국가의 재력을 드러냈다.

구염상은 가장자리에 흰색으로 수를 놓은 붉은 상의를 입고 있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방울 두 개를 귀 뒤부터 가슴 앞으로 늘어뜨린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총기가 넘치는 얼굴은 마치 세화歲畵에서 걸어 나온 소녀처럼 금쪽같은 딸의 애교와 황실의 기개가 더해진 모습이었다.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손을 잡고 무성한 매화 숲 속으로 들어갔다. 떠들썩한 문무백관들의 성대한 연회를 포기한 두 남매는 비밀스럽게 매화 숲에 숨어들고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붉은 옷을 입은 구염상은 바보 같은 오라버니와 함께 그곳에서 매화 선녀를 기다렸다. 땅에 쪼그리고 앉은 그녀가 무료한 듯 눈이 덮인 하얀 땅 위에 길 같은 흔적을 남겼다.

‘밖으로 나올 줄 알았더라면…….’

오라버니의 손에 이끌려 따라오긴 했지만 이렇게 터무니없는 일 때문일 줄은 몰랐다.

주국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있었다. 과거 전쟁의 참상을 겪은 백성들은 마음 편한 날들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심각하게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행군하던 한 장군이 큰 가뭄이 든 지역의 호숫가에서 죽어가는 매화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물 한 모금을 말라 버린 매화의 뿌리 위에 부어 주었다.

그 순간, 매화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달콤한 우로雨露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죽음을 맞이할 뻔한 군사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후 매화의 정수가 사람으로 변하여 장군과 눈물겨운 사랑을 했고, 이들은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전란을 평정한 주국의 황제를 낳았다.

이리하여 주국에서 매화는 아름다운 희망의 상징이 되었고, 매년 새해 밤이 되면 매화 선녀가 나타나 복을 준다는 전설이 남았다.

전설이 얼마나 지루하고 고루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이미 말라 죽은 매화의 정수가 어찌 비를 뿌릴 수 있으며, 심지어 일개 범인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 범인에게 만약 아내라도 있었다면 어찌하려고?

그러나 어쨌든 이 이야기는 주국의 아름다운 전설이었고, 전설에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름다운 매화 선녀가 모든 남자들이 꿈에 그리는 여인이라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러니 별다른 취향이 없는 구염황조차도 선녀의 얼굴을 한 번 보기 위해 고기를 두 점이나 적게 먹고, 일찍부터 아름다운 선녀 누나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두 남매는 매화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선녀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동안 바람은 여러 차례 구염상의 겉옷을 적셨고, 번번이 털 방울을 날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구염상이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저는 돌아갈래요. 홍소육을 한가득 먹을 거예요!”

인내심을 가지고 선녀를 기다리려던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말을 듣자 침을 꿀꺽 삼키며 선녀와 홍소육 사이에서 심각하게 갈등했다.

“그럼… 상아 네가 고기를 좀 가져다주는 건…….”

구염황은 보이지도 않는 눈을 깜빡이며 불쌍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구염상은 변변치 못한 오라버니를 보자 그가 앞으로 어찌 나라를 다스릴지 대단히 걱정이 되었다.

“안 돼요.”

‘추워서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저는 무거워서 고기를 못 들어요.”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떠나기 아쉬운 듯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는 매화 숲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절세의 미녀를 만나 힘껏 체취를 맡는 듯한 모습이었다.

구염황이 장사처럼 손목에 힘을 불끈 쥐며 말했다.

“가자, 오라버니가 데려다줄게.”

막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어찌 아직도 안 오는 거지? 분명 큰오라버니가 황궁 안 매화 숲에 매화 선녀가 있다고 했는데…….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왜 안 보이는 걸까요?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걸까요?”

이어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답했다.

“아닐 거야. 줄곧 여기서 기다렸잖아. 그런데 너무 추워. 어쩌면 선녀가 부끄러워하는 건지도 모르지.”

“그런가 봐요. 언니, 나온 지 오래돼서 조금 있으면 어머니가 우리를 찾으실 텐데 그냥 돌아갈까요?”

낯선 환경이 두려운 듯 어린 소녀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언니의 목소리는 훨씬 용감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어쩌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나타날지도 몰라.”

두 소녀는 서로 의지하며 가까이 붙어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것이 나오길 기다리는 듯한 강한 인내심이었다.

두 소녀의 뒤에서 돌연 구염황이 말을 걸었다.

“너희도 선녀를 보러 왔구나? 우리도 기다렸는데, 안타깝게도 못 봤어.”

“악!”

집중을 하고 있던 두 소녀는 깜짝 놀랐다. 언니는 즉시 기분 나쁜 표정으로 뒤쪽의 뚱보를 노려보았다.

“왜 놀라게 하는 거야! 지금 선녀를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여? 너 때문에 놀라서 도망간 게 틀림없어!”

순간 생글거리던 구염황의 눈에서 갑자기 섬뜩한 빛이 번득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구염상은 즉시 오라버니 앞을 막아선 채 웃는 얼굴로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미안해요. 계속해요, 계속.”

말을 마친 그녀는 오라버니가 더는 황실의 두려운 패기를 발산하지 못하도록 구염황의 손을 꽉 눌렀다. 만일 그대로 어린 소녀의 머리를 한 대 때리기라도 한다면 오라버니야 그저 거만하게 아버지를 흉내 낸 것이라 해도, 분명 소녀는 견디지 못할 터였다.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화를 약간 가라앉혔다. 눈 속에 담긴 불쾌함을 감춘 그가 누이동생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두 소녀 중 여섯 살쯤 된 언니가 고개를 들었다. 구염황과 구염상이 두 걸음 정도 옮기는 모습을 노려본 그녀가 고개를 돌려 이부吏部 상서의 딸에게 말했다.

“자, 우리는 더 기다려 보자. 망할 뚱보가 갔으니 곧 선녀가 나올 거야.”

순간 구염황이 몸을 홱 돌렸고, 구염상은 그런 구염황을 단단히 끌어당겼다. 단호한 눈빛으로 오라버니의 눈을 바라본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오라버니, 빨리 돌아가요.”

구염황이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구염상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위로하듯 오라버니의 팔을 어루만졌다.

“저도 황실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오라버니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가던 구염상이 다시 천천히 돌아왔다.

“… 아직 어린아이들잖아요. 다른 속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저 아이는 오라버니가 누구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오라버니가 즉각 엄벌을 내리면 불공평하지 않겠어요? 만약 오라버니가 이마에 ‘태자’라고 써 붙이고 다녔는데 저랬다면 당장 끌어내 베어 버려도 되겠지만요.”

누이동생을 따라 걷던 구염황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상아, 너는 아직 너무 어려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 한 거야.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일수록 잘 모르는 곳에 함부로 나다닐 게 아니라, 반드시 볼 줄 아는 사람 옆에 얌전하게 있어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제멋대로 떠든 것에 대한 대가를 감수해야 하지. 이 나라의 태자가 뚱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저 아이들이 무지한 걸 누군가 꼭 포용해 줘야 하는 건 아니야.”

구염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곱 살 아이가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국의 저군이 고작 어린아이와 논쟁을 벌이다니,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가.

한참을 생각하던 구염상은 이치에 맞는 듯한 오라버니의 말에 반박하기로 했다.

“하지만… 저 아이들은 아직 어린 데다, 절대 고의가 아니었잖아요.”

“그럼 나는 어른이고? 잘못을 하면 똑같이 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 어리다는 건 결코 잘못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어. 지금 저 아이는 별 이유도 없이 누군가에게 심지어 그냥 ‘뚱보’도 아닌, ‘망할 뚱보’라고 말했어. 그건 명백한 공격이야.”

‘사내가 어린 동생에게 일부러 어려운 논리를 들이대면서 시시콜콜 따지는 건 재밌고?’

이쯤 되자 구염상은 태부의 수준이 아닌, 오라버니의 포용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가 이런 행동을 벌이는 건 정말 좋지 않았다.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고, 과한 자만심이었다.

“저 아이가 말한 ‘망할’이라는 글자에는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분명히 말했지.”

구염황은 잘못은 엄연히 잘못이며, 그런 자들은 앞으로 다시는 제멋대로 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걸 누이동생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윗사람이란 무릇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아랫사람을 과감하게 처벌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구염상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한참을 설득해도 오라버니는 단 한 마디도 듣지 않았다.

새하얗게 쌓인 눈 위로 평평한 길이 나 있었다. 구염상은 그 길을 바라보며 오라버니의 손을 잡았다. 넓은 매화 숲속에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스스로 ‘윗사람’이라 일컫는 건, 오라버니가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고, 더 많은 것을 얻었다는 걸 의미해요. 이 말은 곧 오라버니가 백성들을 내려다보는 것과 동시에 경멸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죠. 하지만 대신 오라버니는 다른 이들에게 없는 책임을 져야 해요. 그건 바로 약한 이들을 돕고, 평화를 유지하는 거예요.

오라버니가 태어나면서부터 얻은 강점들은 오라버니가 성질을 부리는 데 쓸 밑천이 아니에요. 우월함과 오만함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는 더더욱 아니고요. 그건 오히려 오라버니가 도발에도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 주는 자신감이고, 어떠한 반박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해 주는 밑천이며,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을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게 해 주는 품격이죠.

만약 코끼리라면 개미가 아무리 깨문대도 아무렇지 않겠죠? 앞에서 아무리 토끼가 날뛰어도 호랑이라면 개의치 않을 테고, 매는 모기 따위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자부심은 약자를 괴롭히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자신감은 싸움을 통해서만 생기는 게 아니에요.

제 생각에는… 오라버니가 아바마마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아요. 비록 얼마 전 아바마마께서 여인에게 손을 대셨지만, 그건 그 사람이 저에게 무례했기 때문이니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죠. 그건 그자가 아버지 개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이에요. 아바마마는 순전히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 개인의 이름을 걸고 표아를 처단하신 거예요.

하지만 오라버니, 결코 잊지 마세요. 아바마마께서는 국가대사와 관련된 일로는 단 한 번도 여인과 싸움을 벌인 적이 없어요. 심지어는 이유 없이 여인을 쳐다보거나 쓸데없는 말도 하지 않으니, 누구도 감히 아바마마께 도발하지 않고, 누구도 감히 뭐라고 지적하지 못하죠. 그러니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말은 지금 앞뒤가 맞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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