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90)화 (390/449)
  • 외전 구염상 2-13

    ‘귀양’과 ‘노역’이라는 단어에 순간 약연이 귀신 같은 표정으로 구염상을 쳐다보았다.

    “너… 너……!”

    그러나 즉시 자신이 지나쳤음을 깨달은 약연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본 뒤, 주위에 다른 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얼른 표정을 거두었다. 쭈그리고 앉은 그녀가 인내심을 가지고 손녀와 소통을 시도했다.

    “상아야,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표아는 단순한 시녀가 아니라 이 할미가 의지하는 사람이라 곁에 없으면 안 된단다. 게다가 조금 전 표아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리 무거운 벌을 내리는 게야. 공주의 기개를 지켜야지. 그렇지? 앞으로는 그러면 아니 된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본 구염상이 즉시 목소리를 높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버지를 불렀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어서 와 보세요! 여기 할마마마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요!”

    ‘나 구염상은 결코 어머니처럼 착하지 않아. 옹졸할지라도 원한은 반드시 갚아 줘야 한다고. 내 기분을 망치는 자는 누구든 절대로 그냥 놔둘 수 없어!’

    딸의 목소리에 구염락이 즉시 어두운 표정으로 달려왔다. 구염상은 작은 손가락으로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여인을 가리켰다. 작은 입을 쭉 내민 그녀가 응석받이처럼 연약한 목소리를 냈다.

    “아바마마… 저 계집이 할마마마를 괴롭힙니다. 아주 악의적으로요! 감히 태후께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말을 하면서, 이렇게 본 공주에게…….”

    구염상이 경멸하듯 눈을 반쯤 치켜떴다. 비스듬히 시선을 흘긴 그녀가 할 수 있는 만큼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요. 저 계집이 상아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너무 싫어요, 너무 무서워요, 아바마마…….”

    경악한 약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예상대로라면 구염상은 표아가 태후를 궁으로 모시고 가라고 한 말을 그대로 전해야 마땅했다. 일이 틀어져 봐야 자신의 말투가 딱딱했다고 고자질이나 할 줄 알았다.

    무거워진 눈빛으로 직접 한 걸음 다가간 구염락이 이제껏 수많은 말들을 죽인 손을 들어 올려 어머니의 뒤에 숨은 여인을 내리쳤다.

    악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진 표아는 두어 번 경련을 일으킨 후, 피를 토하고 눈을 뒤집은 채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우는 척하던 구염상의 손이 순식간에 뻣뻣해졌다. 두려움에 입가가 떨렸지만 그녀는 계속해 익숙해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총애받는 공주의 노여움을 사는 이들은 모두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없었다.

    지금 구염상 옆에 서 있는 이는 사내도, 황제도 아닌 희대의 살인 병기였다. 그는 사내가 여인을 때리는 것이, 심지어 황제가 직접 궁녀를 때리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알지 못했다. 오직 적을 철저히 제거하겠다는 생각뿐인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구염상은 울고만 싶었다.

    ‘표아는 죽은 걸까? 나야말로 고의가 아니었는데… 다시는 고자질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아직 마음을 가다듬지 못한 구염상의 눈에 갑자기 호수에서 큰 파도가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몸뚱이가 거대한 돌을 들고 쓰러진 표아를 향해 돌진했다. 흉악한 표정은 조금 전 손을 쓴 사내와 똑같았지만 그는 어른과 달리 자중하는 방법을 알지 못 했다.

    놀란 구염상이 다급히 오라버니의 팔을 잡아당겼다. 다행히 충격은 크지 않았다. 그녀는 오라버니의 사랑과 보호에 감동했지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과 감동을 억누른 채 세게 오라버니를 잡아끌었다.

    “몸에 튀면 더러워요…….”

    “알았어.”

    즉시 돌멩이를 한쪽으로 내던진 구염황이 통통한 손으로 위로하듯 누이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경악한 약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주인을 멸시하는 노비는 열 번을 죽어도 모자랍니다. 할마마마, 안심하세요. 앞으로 손자가 사람을 보내어 할마마마를 보호해 드릴 테니까요.”

    얼마나 감동스럽고 효성이 지극한 손자란 말인가. 구염상은 오래도록 구염황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보다 한 수 위인 그 눈동자에서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좋아지는 안색과 달리 구염락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철이 없다는 것을 어머니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노비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주인이 가르친 결과였다. 만약 어머니께서 평소 자신의 자녀들을 홀대하지 않았다면, 보잘것없는 시녀가 어찌 안하무인으로 자신의 딸에게 거들먹거릴 수 있겠는가?

    벌써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았던가. 구염락은 아무리 어머니가 서열이를 싫어할지라도, 이제는 두 손주의 얼굴을 봐서라도 어느 정도 선입견을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며느리를 받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앞선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손주는 마땅히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늘 보니 어머니는 자신의 두 아이 또한 겉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 갈등이 깊다면 그 역시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어머니를 황궁에 모실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두 아이의 말처럼 정말로 이 산이 남은 여생을 보내기 가장 좋은 곳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약연도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 아들을 바라볼 때의 자애로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눈에는 깊은 실망과 무력함이 가득했다.

    “그래, 참으로 대단들 하구나! 이유도 묻지 않고 내 사람을 처벌하다니, 너는 이 어미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구염락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은빛이 감도는 검은 옷이 호수에 비치자 세상에서 가장 위풍당당한 봉황이 반짝거렸다.

    “왜 없겠습니까.”

    탄복한 표정으로 부황을 바라보는 구염상의 눈은 마치 깜짝 놀란 올챙이 같았다. 아버지는 그냥 강한 사람이 아닌, 특별히 강한 사람이었다.

    약연은 아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이 산속에 처박혀 웅크린 채 어른이든 아이든 닥치는 대로 호감을 사려 노력해 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사람들 앞에서 아들이 자신의 시녀를 죽이는 모습이라니…….

    “표아가 나를 얼마나 오래 보필했는지 아느냐? 표아는 반은 내 딸이나 다름없다! 너는 내 아들인데, 내 좋은 아들인데…….”

    구염상은 슬픔에 빠져 절망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

    “허면 어머니는 지금 이렇게 짐을 원망하며 시간을 낭비할 게 아니라, 딸을 끌어안고 울며 태의부터 부르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차가운 목소리에서는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속에는 약간의 거만함과 멸시가 섞여 있었다.

    구염상은 다시 한 번 속으로 탄복하며 차분하고 태연한 아버지에게로 몸을 돌렸다. 위대한 아버지를 향한 공경이 절로 솟아났다.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 옆으로 몇 발짝 다가선 그녀는 흘러넘치는 패기 아래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기운을 흡수하기 전, 갑자기 누군가 구염상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방대한 기운에서 벗어나 오라버니의 보호 안에 들어갔다.

    “무서워하지 마. 오라버니가 지켜 줄게.”

    패기 있게 누이동생을 끌고 와 지키는 구염황은 나름 황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구염상은 오라버니보다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라버니 정도의 수준도 어린 소녀에게는 괜찮은 듯했기에, 그녀는 굳이 오라버니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소란에 모습을 드러낸 장서열이 대치 중인 두 모자를 바라보았다. 구염락은 냉정한 얼굴로 붉으락푸르락한 안색의 약연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장서열은 놀란 두 아이에게 다가오라고 살며시 손짓했다. 아이들은 놀랐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기쁘게 어머니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위로를 구했다.

    구염상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듯 조금 전 일을 다시 한 번 설명하며,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준 표아의 표정을 흉내내는 데 집중했다.

    장서열의 안색이 즉시 어두워졌다. 두 모자를 쳐다본 그녀가 두말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가 반갑지 않다면 혼자 산 위에서 죽는 날만 기다리라지. 앞으로 다시는, 어떤 것도 보내 주지 않으마!’

    떠나는 장서열을 본 구염락이 동요했다. 약연은 그 틈을 타 큰소리로 아들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속으로 가책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찌 내게 그리 말할 수 있단 말이냐! 황후 때문에 사사건건 나랑 맞서는 게지? 저 아이 때문에 잘하든 못하든 나를 아예 궁으로 들일 생각이 없는 것 아니냐!

    내 마음을 모른다고 말하지 말거라. 기왕 말을 꺼낸 김에 어디 속 시원히 한번 말해 보자. 나는 네 생모이자 황제의 어미다. 그런 내가 황궁에 들어가 복을 누리고자 하는 게 뭐가 잘못 되었단 말이냐? 정녕 내가 너무한 것이냐?

    너는 내가 마치 네 황위라도 넘보는 양, 도둑을 막는 것처럼 네 황후와 작당하여 사사건건 나를 경계하고 있지 않느냐! 네가 나를 진정 어머니로 생각했다면 이럴 수 있는 것이냐?

    그래, 내가 마음에 없는 짓을 할 수 없어 주변 사람들이나 장서열에게도 잘하지 못하지. 헌데 그게 뭐가 어떻다는 것이냐? 장서열이 누구의 딸인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증오를 해도 시원찮은 그 아이를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느냐! 장서열은 내 황궁뿐만 아니라 내 아들까지 빼앗아갔다. 내가 그 아이를 증오하는 건 당연한 결과다!”

    말을 하던 약연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너희는 내가 뭘 원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눈에 빤히 보이는 걸 손에 넣을 수 없게 하고 있지. 그러면서 오히려 뻔뻔하게 나를 비난해? 락아, 나는 네 어미다… 네 어미란 말이다. 아들이 어미를 그렇게 밀어내는데 내 마음이 어찌 기쁠 수 있겠느냐… 내가 어찌…….”

    구염락은 연약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두 모자는 똑같은 사람이었다. 출신이 좋지 않아 한 걸음씩 위로 올라와야 했고, 결코 단순할 수 없었으며, 무수한 음모와 계략을 세워야만 했다.

    오랫동안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던 구염락의 목소리는 더욱 차분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서열이를 싫어할 뿐 아니라, 짐의 아이들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약연이 벌컥 화를 냈다.

    “그래! 나는 그 악귀 같은 아이들이 싫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그 아이의 말 한 마디로 나는 딸 같은 아이를 잃었다! 내가 어찌 그 아이를 좋아할 수 있겠느냐!”

    “상아가 그리한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약연이 조롱하듯 웃었다.

    “처음? 구염락, 너는 순진한 것이냐, 아니면 자식 사랑에 눈이 먼 것이냐? 내 이전부터 황아를 볼 때마다 궁으로 들어가서 같이 살자고 암시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 아이가 뭐라 대답한 줄 아느냐? 궁에는 방이 많아 내가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된다고 하더구나. 길을 잃으면 너무 불쌍하니, 그냥 마음 편히 산 위에 있으라고 말이다.

    하, 참으로 착하기도 하지. 모든 방면에서 어찌나 이 할미를 위해 주는지, 나는 정말로 그 아이들을 어찌 사랑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너는 대체 내가 네 아이들에게 어찌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구염락이 어머니의 비통한 표정을 보며 말했다.

    “짐은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그토록 서로를 싫어하는 상황에서,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 외에는 짐에게도 다른 해결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렇게 지내십시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약연은 아들이 돌아서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햇빛 아래 무한한 위엄을 발산하는 검은 용포는 보기만 해도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약연은 궁 안에 있는 어머니도, 어렸을 때부터 옆에 있어준 안식처도 아니었다. 약연이 돌연 아들의 등에 대고 말했다.

    “락아, 이 어미는 너를 사랑한다!”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잠시 멈춰섰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어머니께서 아직 살아 계시는 이유이지요……. 그게 아니었다면 처음 제 아이에게 손을 대셨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으셨을 겁니다.”

    “…….”

    “앞으로 헛수고는 하지 마세요. 짐은 어머니를 궁에 들이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구염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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