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12
현천기는 날이 밝은 다음에야 비로소 지하 감옥에서 힘겹게 기어 나올 수 있었다. 빛이 들어오자 등 뒤에서 그를 쫓던 뱀과 쥐, 개미가 다시 감옥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현천기는 음산하게 웃었다. 누런 안색에 손가락도 휘었으나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살아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젯밤 자신을 보고 놀라서 울던 작은 얼굴을 떠올린 현천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땅에 엎드려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놀라서 울음까지 터뜨린 것인지, 집으로 돌아가 거울을 보고 여러 차례 웃어 보았지만 도무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어쨌든 어린 공주가 황후보다 약한 건 분명해 보였다.
‘아직 혼인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이 십 년 뒤 부마 경합에 나갈 자격이나 있을지 모르겠군.’
그렇게만 된다면 분명 분노한 황후를 뒤로 넘어가게 만들 수 있으리라.
* * *
구염상은 예쁜 공주 복식을 입고 가장 소중히 여기는 머리 장식을 하고 있었다. 금과 옥으로 만들어진 방울은 주인의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맑고 영롱한 소리를 냈다.
부황의 손을 잡고 있던 구염상이 고개를 들고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바마마, 저희는 지금 어디에 가는 거예요?”
오늘은 구염락이 쉬는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으레 아버지는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일어난 뒤, 도리어 아들딸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고 훈계를 하곤 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데, 어떻게 벌써 출발 준비를 마친 거지?’
구염락은 딸을 안아 들고 가장 큰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태후를 뵈러 가는 것이다. 태후께서 오랫동안 손녀를 못 본 탓에 많이 보고 싶다고 하시는구나. 할마마마를 보러 가니 좋으냐?”
물론 구염상은 귀자태후를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가 언급하지 않았다면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이름이었다.
문득 어렸을 때 실수로 자녕궁의 화병을 깨뜨렸던 일이 기억났다. 구염상은 당시 자신을 바라보던 차갑고 냉소적인 할머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후로도 내내 귀자태후는 구염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문안인사를 받을 때면 꼭 구염상만 더 오래 무릎을 꿇고 있도록 했고, 연회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오로지 구염상에게만 차가운 음식을 내 주었다. 물건을 하사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이 자녕궁에서 좋은 물건을 받을 때, 흠이 있는 물건은 꼭 구염상의 차지가 되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구염상이 응석받이로 자라 태후가 내리는 음식도, 하사하는 옷감도 눈에 차지 않아 한다고 수군거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자녕궁의 장식품까지 업신여긴다고 비웃었다.
이러한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구염상은 그저 담담하게 웃었다. 구염상은 어머니를 싫어하는 태후가 그 딸을 싫어하는 감정까지는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라면 마땅히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은가. 설마 어차피 손주들은 차고 넘치니, 가치가 없는 손녀라면 마음대로 괴롭혀도 된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렇다면 아이에게 어른이 왜 필요하겠는가.
“너무 좋아요. 상아도 할마마마를 뵈러 가고 싶었어요. 가면 오라버니가 나무에 올라가서 열매를 따줄 수도 있을 거예요!”
구염락이 사랑스럽다는 듯 딸의 작은 코를 잡고 흔들었다.
“장난꾸러기, 놀 줄만 아는구나. 요 먹보를 먹이려면 조금 이따 아버지도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야겠다.”
구염상은 즉시 거짓 웃음을 지어 보였다.
‘좋아요. 하지만 나무에 올라가지 않으면 아바마마는 강아지예요!’
물론 속으로만 시원하게 내지를 뿐이었다.
“아바마마, 그런데 할마마마는 왜 우리랑 같이 안 사시는 거예요? 다른 집 할머니들은 다들 아들딸과 같이 사시잖아요.”
구염락이 딸을 다리 위에 앉히는 것과 동시에 마차가 출발했다.
“태후께서는 나이가 많아 산에서 안정을 취하셔야 한단다. 게다가 황궁은 너무 혼란스럽고, 또 나무와 동물들이 없어서 그런지 궁 안의 환경을 썩 좋아하지 않으시더구나.”
구염상은 속으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태후와 어머니가 싸우기 시작하면 양쪽 모두에게 원망을 살 게 두려우니 어차피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을 들이지 않기로 한 거겠지.’
“그럼 할마마마는 산꼭대기에서 백 살까지 장수하시겠네요?”
“그럼, 그럼. 백 살까지 장수하셔야지!”
구염상은 즐겁게 웃는 아버지를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불효를 택하신 거죠?’
전생에서 헌원사사는 그토록 모친을 원망하면서도 감히 대역무도한 짓까지는 저지르지 못했다.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이는 인과응보였다.
하지만 효행을 실천하지 않는 황제라니. 과연 옳은 것은 무엇일까.
지난 생에서 구염락은 귀자태후를 궁으로 불러들여 난감해 하는 장서열과 대면하게 했다. 황권 아래 엎드려 절하는 자들은 이런 구염락을 두고 ‘어질고 덕이 있다’며 칭송했다.
그러나 오늘날 구염락이 생모를 궁에 모시지 않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향해 ‘예를 지킨다’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황권이란 과연 영원히 옳은 것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구염황을 떠올린 구염상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바마마처럼 엄격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과연 오라버니의 기행을 정말로 눈치채지 못한 걸까? 아니면 너무 엄격하게 통제 당한 탓에 아바마마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오라버니가 일부러 더 소란을 피우는 걸까?’
* * *
새가 지저귀는 국암사의 뒷산에는 꽃향기가 물씬 풍겼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황실의 어림군이 지키고 있었다. 평소 황실의 허가 없이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산 위에는 위협적인 짐승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황제가 생모의 안위를 위해 마련한 이 뒷산은 진정으로 휴양에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성모에게 효를 다 하고자 황후가 마음을 쓴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성모 태후를 대함에 있어 황후가 더없이 어질고 슬기롭다고 입을 모았다.
회색 장포를 입은 약연은 일찍부터 산허리에 나와 손으로 염주를 비틀며 손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후가 어떤 사람인지 간파한 뒤로는 더 이상 황후에게 공을 들이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오로지 손주들뿐이었다. 약연은 할머니를 좋아하는 두 손주가 함께 궁으로 가 자신들과 같이 살자고 조르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장서열은 두 아이가 산 위에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았기에 약연은 좀처럼 손주들과 감정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 했다. 약연은 이번에는 장서열이 무슨 짓을 하든 기필코 한 명을 남겨서 구슬린 후, 하루 속히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궁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할마마마!”
구염상이 맑고 깨끗한 소리로 할머니를 부르며 달려들었다. 웃는 얼굴은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즉시 웃음꽃을 피운 약연이 자애로운 얼굴로 몸을 숙였다. 그녀가 부드러운 손길로 손녀를 위해 옷매무새를 만져주었다.
“우리 상아, 아주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동안 할미가 보고 싶었지?”
구염상이 힘껏 머리를 끄덕였다.
“네! 오라버니와 아바바바, 어마마마께서도 모두 할마마마를 보고 싶어 했어요.”
물론 장서열이 자신을 보고 싶어 했을 리 만무했지만 약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손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무언가를 추억하듯 그녀가 구염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새 키가 또 컸구나. 더 예뻐졌어. 눈썹은 아버지를 닮아 이렇게 예쁜 게지.”
약연은 구염상의 손을 잡고 계속해 손녀를 바라보았다. 이는 손주를 사랑하는 보통의 할머니처럼, 심지어 다른 할머니보다 더더욱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쏜살같이 돌진해 온 구염황이 돌연 돌풍을 일으켰다.
“할마마마! 이 손자가 좋은 걸 가지고 왔어요! 소자는 할마마마가 정말 부러워요. 매일 사냥터에서 사냥도 하고, 말을 타고 달릴 수도 있잖아요! 저도 매일 말을 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구염황은 할머니가 채 만류하기도 전에 곧장 슬프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태자라서 아쉬워요. 미래의 저군은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서 이성을 잃어서도, 타고난 나쁜 성질을 극복하지 못 해서도 안 된대요. 그래서 소자는 절대 외부에 미혹되지 않도록 열심히 수행해야 해요!”
말을 마친 구염황이 또 부럽다는 듯 약연을 바라보았다.
“할마마마, 여기서 행복하게 잘 지내셔야 해요. 손자의 평안을 비는 것도 행복이잖아요. 그렇지요?”
웃는 듯 아닌 듯 약연의 안색이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이내 그녀는 다시 자애로운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래, 그래. 이 할미가 손자를 대신해서 행복하게 지내마.”
구염상은 어찌 들어도 화가 나서 이를 가는 듯한 약연의 목소리에 새삼 구염황의 능력을 높이 사게 되었다. 짧은 순간이라 그의 말이 과연 고의였는지까지 확실히 분간할 수 없었지만, 생각해 보면 오라버니는 가끔 믿음직스럽지 않기는 해도 결코 일을 망친 적은 없었다.
세 사람은 앞장서서 웃고 떠들며 산을 올랐다.
장서열과 구염락은 뒤쪽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들은 굳이 발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식사 시간만 맞추면 되었고, 식사를 마친 뒤 하산하여 환궁하면 되었으므로 두 아이는 약연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놀 수 있었다.
구염상과 구염황은 온 힘을 다해 약연과 함께 놀았다. 나무에 오르고, 강에 들어가 새를 끌어내고, 물고기를 잡았다. 구염황은 못하는 게 없었다.
약연 역시 태연한 얼굴로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그녀는 구염황과 말이 통하는 척, 어렸을 때 형제자매들이 나무에 오르고 강에 들어갔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추억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자애로웠다.
구염상은 약연이 마지막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모든 게 아주 완벽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이 할미는 늙어서 그런지 누군가 항상 곁에 있어주는 게 좋구나. 자식들이 주변에 있고, 손주들이 말을 걸어 주고 한다면 말이다.”
구염황은 고기를 잡는 데 정신이 팔려 이해하지 못 할 어른의 그리움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철이 든 구염상이 할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상아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자주 찾아와서 할마마마와 함께 할게요.”
그 말에 언제나 약연의 주변에서 시중을 들던, 그러나 단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던 여인이 돌연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 태후마마를 모시고 궁에 들어가 함께 계셔도 되지요. 그러면 태후께서 언제나 두 전하를 돌봐 주실 수 있고요. 태후께서 궁에 들어가시면 한 가족이 화목하게 모두 모여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아요?”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을 마친 표아飄兒는 거침없이 상 공주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무려 십 년이나 약연을 따르며 철저히 계획을 세워 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하여 마냥 기다리게 된다면 그녀는 완전히 노처녀가 될 게 분명했다.
‘이 냉혈한들은 대놓고 일깨워주지 않으면 영원히 뭘 해야 되는지도 모를 거야! 총명한 황자에 귀여운 공주라고? 대체 그런 헛소문은 누가 퍼뜨린 거야!’
구염상은 표아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말을 할 줄도 아는 시녀를 쳐다보며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건방진 것! 감히 이 나라의 태후를 모해하려 들다니 참으로 대담하구나! 할마마마께서 여기서 수양을 하시며 신령님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나더러 할마마마를 모시고 가라는 건 곧 할마마마의 수명을 깎으라는 뜻이 아니냐! 여봐라! 당장 저 계집을 매우 친 뒤, 귀양을 보내 노역에 종사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