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86)화 (386/449)

외전 구염상 2-9

순간 느긋했던 주소유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그녀가 긴가민가하는 눈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옥처럼 부드러운 얼굴에 심지어 더 자란 듯한 키까지, 시녀들 사이에 둘러싸인 동생은 확실히 자신보다 더 활기차고 고귀해 보였다.

‘3품 고명…….’

네 글자가 주소유의 머리를 눌렀다. 이 단어는 다른 어떤 말보다도 더욱 유용했다. 주소유는 결국 굴욕을 참으며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한 걸음 물러선 채 대충 몸을 숙여 인사했다.

“헌원씨 가문의 주 씨가 성 부인을 뵈옵니다.”

주어가 즉시 친근한 손길로 주소유를 일으키며 윗사람의 말투로 느릿느릿 위로를 건넸다.

“언니, 어서 일어나세요.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자매끼리 정 없이 이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나요? 그나저나 언니는 정말 많이 변하셨어요. 언니, 날씬해야 옷태가 좋다는 소문은 절대 믿지 마세요. 전처럼 아름다운 것에만 신경 쓸 게 아니라, 건강부터 잘 챙겨야죠. 호호…….”

주소유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걸 느꼈다. 주어는 지금 자신이 혼인 전보다 볼품이 없고 못생겼다고 비꼬는 것이었다.

물론 주어의 말은 바로 그 뜻이었다. 주어가 더욱 즐겁게 웃었다.

“아이, 이런 얘기는 그만해요. 참, 형부는요? 언니, 혹시 형부가 귀찮다고 쫓아내신 건 아니죠?”

주어는 또 한 번 입을 가리고 웃었다. 주소유의 낯빛은 이미 창백하게 바뀌어 있었다.

곁에서 주소유의 시중을 들던 이 고고가 언짢은 얼굴로 슬쩍 주어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이 고고는 깜짝 놀랐다. 서출 아가씨는 과연 놀라울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비단 서출 아가씨뿐만이 아니었다. 과거 주인의 뒤를 따라다니며 언제나 머리를 조아리던 주어의 고고조차 지금은 엄숙한 얼굴로 고상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이 고고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뻔했다. 이들은 지금 출세한 후 일부러 으스대러 찾아온 것이다. 과거 적출 아가씨가 자신들을 어찌 대했는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갚아 주려는 것이었다.

창백해진 주소유의 안색에도 아랑곳없이 주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하자니 부끄럽지만, 저는 아직 일품 상서 가문의 저택을 본 적이 없어요. 지금 보니 역시 황제 폐하께서 중시하시는 대신의 저택답네요. 제가 들어온 옆문이 저희 집 대문보다 크더라니까요? 언니가 정말 복이 많아요.”

주소유의 안색이 시퍼럴 정도로 하얘졌다. 그녀가 막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던 순간, 주어가 갑자기 그녀의 말을 막아섰다.

“됐어요, 이제 이런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해요. 저는 언니랑 옛날 얘기를 하고 싶어요.”

주어가 막무가내로 주소유의 팔짱을 꼈다.

“가요, 언니. 우리 기분 전환 겸 언니 처소에 가서 좀 쉬어요.”

주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심부름꾼 한 명이 뛰어왔다.

“부인, 예부의 오 대인 댁에서 부인만 참석하시면 시작할 수 있으니, 시간이 괜찮으신지 여쭤 보라 하셨습니다.”

기분이 나빠진 주어가 심부름꾼을 노려보며 꾸짖었다.

“어허, 법도도 지키지 않고 뭐하는 짓이냐! 내가 지금 누구와 얘기하고 있는지 안 보이느냐? 먼저 헌원 부인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심부름꾼이 시원시원히 입을 열었다.

“소인, 부인을 뵈옵니다.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부인께서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어는 이번에도 주소유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방향을 돌려 웃는 얼굴로 언니를 본 그녀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언니, 설마 일개 하인과 맞서지는 않겠죠? 원래는 언니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요즘 마작에 푹 빠져 있는 바람에 아무래도 오늘은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마작이 지겨워지면 다시 올게요.”

주어는 다시 사람들을 이끌고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자리에 남은 하인들은 모두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들은 쩔쩔매며 행여나 불똥이 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한참을 서 있던 주소유가 힘없이 냉소를 지었다. 웃을 때마다 일그러지는 얼굴은 지켜보는 사람조차 마음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 고고가 걱정스럽게 입을 떼려던 찰나, 주소유가 한 발 앞서 입을 열었다.

“참 재미있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무시를 당하다니.”

황제는 ‘첩실의 아들’이라는 한 마디로 헌원상의 남은 평생을 밟아 놓았다. 이제 주소유는 아무런 능력이 없었고, 누구든 이렇게 그녀를 비웃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음대로 밟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더불어 새로운 상처를 얻은 주소유는 갑자기 헌원상에게 불만을 느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바쳐 헌원상에게 시집을 왔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박대했다. 별것도 아닌 서녀조차 거리낌없이 자신을 비웃도록! 심지어 주어는 시부모를 모시거나 능력 없는 남편을 돌볼 필요도 없이, 주인 노릇을 하며 존귀한 위치에 올라 있었다.

주소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에는 빛을 볼 날이 없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희망이 있는 서녀들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어… 어찌!’

분명 가장 우수한 것도, 뭐든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도 주소유 자신이었다. 그에 비해 주어가 잘하는 게 뭐가 있는가? 소인이 권세를 좀 얻었다고 기고만장하여 감히 헌원 상서 가문에 찾아와 자신을 모욕하다니!

그러나 주소유는 한 마디도 반격하지 못하고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3품에 오른 남편이 없었다.

* * *

주소유와 헌원상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주소유는 이제 금용과 관계없이 헌원상에게 물건을 집어 던졌다. 불쾌해 하는 시어머니를 향해 그녀는 어머니의 아들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탓에 자신조차 무시를 당한다며 빈정거렸다.

분노한 헌원 노부인은 사람을 시켜 정신을 차리도록 주소유를 가두라고 명했다. 금용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일이 없을 때면 주소유를 찾아가 하고픈 말을 전부 쏟아 냈다.

이후 헌원상은 더 이상 후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주소유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그에게는 장래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부인까지 고생을 시키겠는가.

그러나 이혼은 이보다 더욱 부인을 꼴사납게 하는 짓이었다. 이미 연경 바닥에는 주소유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 있었다.

헌원상은 할 수 있는 한 서로의 눈에 띄지 않도록 낯선 사람처럼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 * *

헌원씨 가문 여인들의 일은 희곡으로 각색되어 더욱 긴장감 넘치는 모습으로 황궁에 전해졌다. 연극을 감상하던 장서열은 익숙한 갈등 양상에 속으로 한탄했다.

‘고작 저 정도야? 자업자득으로 권세를 잃었을 뿐인데 남자를 보는 눈까지 없어지다니.’

헌원상은 비록 덕과 재주를 겸비한 훌륭한 공자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책임감은 있는 남자였다. 헌데 주소유가 이 지경까지 무너지다니. 물론 이 모든 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리라고, 장서열을 생각했다. 그녀는 헌원씨 가문의 일에 딸 구염상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주소유가 한발 앞서 헌원상의 사랑에 실망하지 않았다면, 기꺼이 거만함을 버렸다면, 어쩌면 그녀는 헌원상과 평생을 화목하게 지냈을지도 몰랐다.

자단목 탁자 위에 두 손을 받친 구염상은 해바라기씨 껍질을 벗기며 재미있게 연극을 듣고 있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준 옷을 입고, 단정하지 않게 작은 발을 흔들고 있었지만, 구태여 다가와 규율을 일깨워 주는 사람은 없었다.

구염상은 아이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천에 먹을 게 널려 있었다. 일 년 정도가 지나자 이러한 생활이 너무나 익숙했다. 구염상은 자신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어느 누구도 비밀을 알아채지 못 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자신의 무서운 아버지를 포함해서.

어머니와 비교했을 때, 구염상은 자신이 훨씬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두 여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않은 성품을 보면 어머니는 여전히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세는 넘치지만 독기가 부족하여 손해를 보았다.

악의 없이 크고 반짝이는 눈을 깜빡인 구염상이 껍질을 벗긴 해바라기씨의 대부분을 어머니에게 밀어 주었다.

“어마마마, 드세요.”

장서열이 사랑스럽다는 듯 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어미는 괜찮으니, 우리 상아가 먹거라.”

구염상의 눈이 실 한 가닥처럼 가늘어졌다. 밀어 놓은 해바라기씨를 다시 모아 다급히 입 안으로 밀어 넣은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어마마마의 마음을 알고 있는데……. 내 처절했던 전생을 되갚아 주기 위해 어마마마께서…….’

상소문 백 개를 모두 읽은 구염황이 흥분한 모습으로 바람처럼 무대를 통과하여 누이동생 옆으로 굴러 왔다. 그는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으면서도 건성으로나마 어머니께 안부 인사를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마마마, 만복을 누리세요.”

구염황이 다급하게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실처럼 가는 눈 사이로 별처럼 반짝이는 빛이 드러났다. 구염황의 눈은 아버지의 날카로운 눈매를 빼닮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살에 눌려 있었다. 구염상은 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얼마나 먹을 걸 좋아하면 이렇게 될 수 있는 걸까?’

그때 호방한 기운을 내뿜은 구염황이 순식간에 누이동생을 낚아채서 달아났다.

“아바마마께서 우리가 궁 밖에 나가서 하루 동안 노는 걸 허락해 주셨어!”

구염상이 안고 있던 해바라기씨가 온통 바닥에 흩어졌다. 가볍게 오라버니의 손에 붙들린 그녀가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에 질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어마마마! 살려 주세요!”

* * *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떨어진 구염상의 아름다운 눈은 금세 번화가에 사로잡혔다. 물론 과거에도 나와 본 적이 있었지만 매번 가마를 타고 있었을 뿐더러 앞뒤로 호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혼자 나왔던 때는 길을 잃을까 두려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구염상의 곁에는 공 같은 오라버니와 두 명의 하인만이 함께였다.

‘이렇게 간단히 궁 밖으로 나올 수 있다니!’

평민들처럼 거리를 거닐 수 있다는 게 구염상에게는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 풍경에 익숙한 듯 걷는 구염황을 보며 그에게는 이번이 첫 번째 외출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 쉽게 보내 줬을 리 없었다.

구염황은 누이동생이 토끼 모양의 가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귀에 분홍빛 나비매듭이 지어진 가면은 그가 보기에도 퍽 예뻤기에 동생이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갑자기 패기 있게 노인의 좌판을 걷어찬 구염황이 사납게 말했다.

“이 몸을 공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이 토끼는 내가 가져가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