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8
한편, 아내를 찾은 헌원오마는 아무리 뻣뻣한 며느리라도 웬만하면 피하지만 말고 좀 신경을 써 주라고 권했다.
“아무리 며늘아기가 아무것도 아니고 명성이 바닥을 쳤대도, 이 가문의 장손인 사사가 제 모친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겠소.”
헌원오마가 한숨을 쉬었다. 작년부터 검은 털이 한 올도 나지 않은 탓에 수염이 새하얘져 있었다. 늘그막에 겨우 아들을 얻었지만, 여전히 대를 이을 사람은 없었다.
누워 있는 아내의 침대맡에 앉은 그가 마찬가지로 주름진 손을 잡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이 며느리의 소행을 못마땅해 한다는 건 나도 아오. 하지만 사실상 상이에게 가능성이 없으니, 사사에게라도 희망을 걸 수밖에 없지 않소. 나는 주씨 가문의 명성에 기대서라도 우리 사사가 장래에 나름대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있길 바랄 뿐이오.”
헌원 노부인이 이를 어찌 모르겠는가. 손바닥을 뒤집은 그가 남편의 손을 쳤다.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정작 이를 가장 잘 알아야 할 사람이 도리어 무지하니 걱정이 될 뿐이지요. 별것 아닌 이들이 날뛸까 봐 말입니다!”
“그럼 그 아이를 어디 촌락으로 보내 버립시다.”
헌원오마의 태도는 강경했다. 금쪽같은 손자에게 어떠한 사고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잠시 생각하던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제가 방법을 생각해 보지요.”
* * *
주소유의 처소로 돌아온 헌원상은 계속해 억지를 부리는 아내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발버둥치며 욕을 해 대는 아내의 손을 놓은 그가 호통을 쳤다.
“그만 좀 하시오! 지금 당신의 모습이 어떤 줄 아오? 사저! 사저는 분명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찌 점점 억지를 부리시오! 첩실이 싫으면 쫓아내 버리면 그만이지 않소. 이렇게 소란을 피울 일이오?”
그러나 주소유의 이성은 이미 금용을 본 그 순간 몽땅 사라져 있었다. 헌원상보다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소란을 피운다고요? 사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알겠지요! 내 모습이 뭐가 어때서요?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날 이리 대하는 거예요! 저는 시종일관 똑같았어요. 이건 다 헌원상 당신 때문이잖아요! 말해 봐요. 날 사랑한 적은 있어요? 날 사랑하냐고요!”
헌원상은 말문이 막혔다. 순간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 건 두 팔을 벌린 채,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그를 피하지 않던 소녀였다.
“피곤할 테니 일찍 쉬시오.”
금세 마음이 씁쓸해진 주소유가 몸을 돌려 떠나려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든 주소유가 슬픈 눈빛으로 헌원상에게 또박또박 물었다.
“금용이 저보다 나을 게 뭐예요? 도대체 내가 금용보다 못한 게 뭐냐고요!”
헌원상은 주소유가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부인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 쓸데없는 생각 마시오. 씻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괜찮아질 거요.”
헌원상은 주소유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풀어 주지 않았다. 헌원상의 눈빛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과 동시에 주소유의 마음 또한 점점 무거워졌다. 조금 전, 상공은 금용의 ‘금’ 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얼굴을 스친 당황스런 표정은 그의 마음에 정말로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증명해 주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주소유는 문득 두려워졌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정말로 금용을 죽여 봐야 어차피 둘 다 죽기 밖에 더 하겠냐는 생각에 그간 금용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 쫓아낸 적을 위하여 황후가 자신을 공격할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다른 여인이라면…….
“…마음에 둔 여인이 누구입니까?”
주소유가 마치 궁금하지 않은 척, 아주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대답만이 돌아왔다.
“괜한 생각 말고 쉬시오.”
말을 마친 헌원상은 강경하게 아내의 손을 떼어 낸 뒤,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주소유는 낭패라는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 고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부인은 진작에 사람들을 모두 물렸지만 그녀는 떠날 수 없었다. 주인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기에 부부 사이에 괜한 논쟁이 벌어질까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격렬한 논쟁보다도 더욱 주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 고고는 천천히 입을 여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모든 힘과 영혼을 빼앗긴 양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고고……. 고고… 들었어…? 저 사람이… 인정했어……. 인정을 하다니……. 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래…….”
주소유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부인!”
다급하게 다가간 이 고고가 정신을 잃은 주인을 끌어안고 몰래 울었다.
“아가씨… 대체 왜 이런 고생을 하시는 거예요…….”
그날 밤, 홀로 서방의 창 앞에 선 헌원상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본래 크지 않았던 서방을 지속적으로 넓히며 그간 연구해 온 모든 서적들을 진열해 놓았다. 언젠가 조정에 서서 자신을 탄핵했던 자와 맞서는 날을 고대하면서.
하지만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반평생을 바친 공부가 돌연 무거운 짐이 되어 헌원상의 어깨를 짓눌렀다.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면 왜 내게 광활한 천지를 보여준 걸까? 눈에 빤히 보이는데 만질 수가 없다니!’
* * *
아직 출가하지 않은 주씨 가문의 딸들은 모두들 주소유를 원망했다. 이들은 주소유가 다시 헌원씨 가문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그녀에 대한 원망을 거두지 못했다.
오래 전, 주소유는 헌원 상서의 하나뿐인 아들과 혼인했다. 아버지의 수제자였던 헌원상은 옆에서 보기에 충분히 부러워할 만한 남편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오히려 보잘것없는 3품 관원의 서자와 혼인을 한 서녀가 더욱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주소유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또래 여자아이들을 무시했다. 혼인 전 연경에서 제일가는 재녀라는 명성에 호화스러운 혼례까지 올린 그녀는, 안타깝게도 하늘이 무심했는지 남편의 덕을 보지도, 고귀해지지도, 하늘 높이 날아오르지도 못했다.
주어朱魚는 주소유의 서출 동생이었다. 서출들은 대부분 고운 외모를 지녔지만 그 중에서도 주어는 특별했다. 그러나 주씨 가문처럼 명망이 높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여인과 밤을 보내면서도 정작 그 미모가 화의 근원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이들은 비록 동침을 한 여인일지라도 꼭 거만하게 굴며 여인에 관심이 없는 척을 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은 것이라 여겼다.
주어는 주 태부 같은 학자의 전형적인 희생양이었다. 그녀는 서출로 태어난 데다 총애받지 못하는 어머니를 둔 탓에 특히나 더욱 힘들게 살아야 했다. 비록 명성을 중시하는 부인이 티가 나게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대저택의 후원에서 싫어하는 사람을 남몰래 냉대할 방법은 많았다.
주소유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주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감정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는 듯, 덮어놓고 그냥 싫어했다.
이는 주어에게 혼담이 들어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주소유는 제 마음대로 궁상맞은 가문의 서출 수재를 골라 이복동생에게 보내 버렸다. 호화로운 혼수품을 자랑하며 혼인한 주소유에 비해 주어는 작은 가마 하나를 타고 출가했다.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못했다.
그리고 오 년 뒤, 주소유는 심지어 주어가 누구인지도 잊은 상태였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 약을 먹던 주소유는 주어의 배첩拜帖(과거 다른 사람을 방문할 때 사용하는 붉은 종이에 쓴 명함)을 받았다. 3품 고명부인만이 쓸 수 있는 보라색 종이가 주소유의 눈을 흔들었다. 그렇잖아도 울적했던 주소유는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서출 동생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소유는 전과 다름없이 거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가서 전하거라. 나는 요즘 시간이 많으니 언제든 보러 와도 된다고!”
‘흥! 그래 봐야 고작 3품 고명부인 주제에!’
그러나 생각과 달리 주소유는 마치 물이라도 짤 기세로 보라색 배첩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헌원부는 일품 저택이었기에 별 볼 일 없는 일개 서녀에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회신을 들은 주어는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혈색이 좋고 윤기가 흐르는, 그야말로 복스러운 얼굴이었다. 누가 보아도 관리가 잘된 데다 만사형통한 사람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사실 주어의 혼인은 그녀가 특별히 희생을 감수한 결과는 아니었다. 심지어 첩이 되는 것과 비교하면 본처 자리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후 주어의 남편은 과거 시험에서 삼등 안에는 들지 못했으나 운 좋게도 분발하여 생각지도 못하게 황제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지방관으로 임명되고 오 년 뒤, 여러 차례 승진을 거친 남편은 지금은 벌써 3품 고관이 되어 있었다.
남편이 막 3품의 문턱을 넘었을 때는 이미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덕분에 ‘고명부인’이라는 봉호는 자연스레 주어의 차지가 되었다. 현재 그녀는 관부인 자격으로 조정에서 녹봉을 받고 있었으니, 적녀인 이복 언니의 처지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부인, 정말로 헌원부에 가서 주 씨를 만나시려고요?”
현재 주소유의 명성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만일…….”
“당연히 가야지. 연경에 돌아와 어찌 언니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주어로서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그녀의 위치가 높다 한들, 인사를 하러 오라고 언니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인사하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껏 얼마나 재미가 없었는지 모른다.
* * *
햇살이 비치는 아침, 아파 보이는 듯한 손을 반갑게 잡은 주어가 흥분하여 말했다.
“언니!”
주소유의 눈이 서출 동생의 진귀해 보이는 비단 치마에 잠시 머물렀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대로 입을 닫은 주소유는 주어의 안부 인사를 기다렸다. 주어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시선은 언니가 먼저 안부를 묻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소유는 주어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서출 여동생은 어릴 때처럼 생각이 수백 번씩 바뀌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언짢아진 주소유가 결국 참지 못하고 동생을 나무라려던 찰나,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소매를 잡아당겼다.
기분이 나빠진 주소유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즉시 이 고고를 뿌리쳤다.
‘이 고고는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는군. 왜 이런 천것들 앞에서 유치한 행동을 하는 거야?’
이 고고는 부인이 여전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 주인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부인께서는 아직 관직이 없으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