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83)화 (383/449)

외전 구염상 2-6

금용은 울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거짓말과 달리 그가 자신에게 그렇게 정이 깊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는 건 경멸이나 불러올 뿐이었다.

“노비가 부인께 사람을 보냈으니, 조금 있으면 부인께서 거처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헌원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주소유가 또 못되게 굴었다는 걸 알아차린 그가 자기도 모르게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뒤따르던 사람에게 말했다.

“가서 금 이랑이 머물도록 낙하각落霞閣을 정리해 주거라.”

“네, 나리.”

눈을 살짝 든 금용이 헌원상을 향해 미소를 지은 후, 이내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여러 번 미간을 찡그리던 헌원상은 결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마음속에서 또 다시 올라온 짙은 공허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헌원상은 금용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자신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그녀를 만날 때면 묘한 감정이 들었다. 주변에 분명 이상한 낌새가 없는 데도 그러했다.

헌원상은 금용의 외모와 가냘파 보이는 몸매가 쉽게 보호본능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이런 감정이 싫었기에 더 이상 금용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은 실수였고, 그에게는 그 실수에 책임을 지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달빛 아래 분의는 다시 한 번 헌원상의 절제력에 탄복했다. 정향은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옅지만 사내에게는 최고의 최음제였다. 그런데도 금용을 그냥 두고 가다니!

분의는 진심으로 헌원상에게 탄복했다. 비천한 기녀 출신인 그녀가 겪은 남자들은 대부분 색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었다. 이토록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아는 남자는 난생 처음이었다.

분의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분의의 신분은 헌원상과 어울릴 주제가 못 되었다. 게다가 첩이 되는 건 애초에 그녀가 추구하는 삶이 아니었다.

물건을 정리하던 분의는 미소 띤 얼굴로 금용에게 소원을 이룬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드디어 나리에게 거처를 받았고, 심지어 처소는 풍경이 좋기로 유명한 낙하각이었다.

금용 역시 기뻐하며 생각했다.

‘내일 이 소식을 들으면 주소유는 화가 나서 미치려고 하겠지?’

오랜 시간 황궁에서 잔뼈가 굵은 금용에게는 나름의 수완이 있었다. 그녀는 주소유에게 헌원상이 자신에게 새로운 처소를 찾아줄 것임을 암시했고, 밤에는 남자에게 주도권을 주어 원하는 걸 얻어 냈다. 황궁에서 태감들에게도 유용했던 이 수법은 과연 언제든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 폐하께는 소용이 없었던 걸까…?’

효과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더 잔혹한 대우를 당하지 않았던가.

금용은 하늘에 드문드문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씁쓸한 얼굴에 떠오른 추억이 빠르게 사라졌다. 이미 황궁에 계신 귀한 분들과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너무나도 멀었기에 오히려 과거 그녀가 정말로 그들 사이에 속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금용은 더 이상 총비라는 포부를 가졌던 전도유망한 궁녀가 아닌, 한낱 첩실의 자리에서 발버둥치는 천한 여인일 뿐이었다. 그녀는 부인에게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부군의 환심을 살 능력도 없었다.

‘별것도 아닌 헌원상조차 구워 삶지 못 하면서 감히 폐하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병이 참으로 깊었구나.’

씁쓸한 미소를 지은 금용이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하인들을 이끌고 거만하게 낙하각으로 걸어갔다. 과거는 사라졌다. 이제 그녀는 미래를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주소유가 잘 먹고 잘 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 *

주소유는 미칠 지경이었다.

“낙하각이라니!”

퍽!

최상급 제비집을 담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부인,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몸을 소중히 여기셔야지요.”

이 고고가 서둘러 달랬다. 불같이 화를 내던 주소유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정말 내가 좋아하던 그 사제가 맞아?’

그렇다. 그 불은 주소유가 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금용은 천만 번 죽어 마땅했다. 그저 금용을 놀라게 하려고 작은 불씨를 붙였을 뿐, 그게 그렇게 큰불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불길이 거세진 건 금용이 평소에 온갖 못된 짓을 일삼았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린 천벌이 분명했다. 그러니 하늘에서 금용을 멸하기 위해 붙인 그 불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분명 금용이 자초한 거란 말이다!

‘이렇게 해도 죽지 않다니! 이 끈질긴 망령 같으니라고!’

“저… 부인… 금, 금 이랑께서 문안 인사를 오셨습니다…….”

차가운 표정으로 웃어 보인 주소유가 단정한 자태로 주인의 자리에 앉았다. 바닥의 물건들을 정리하라 이른 그녀의 마음은 전에 없이 평온했지만, 말투는 서리처럼 차가웠다.

“자랑하러 온 것이겠지. 들라 해라.”

활짝 핀 얼굴의 금용이 분의를 데리고 들어왔다. 주소유를 본 그녀가 마치 하나뿐인 가족을 만난 양 환하게 웃어 보였다.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해요. 잠자리가 바뀐 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익숙하지가 않네요.”

찻잔 뚜껑을 쥔 채 주소유가 차가운 눈으로 금용을 쳐다보았다.

“익숙하지 않으면 이사를 나오지 그러느냐?”

“어찌 그럴 수 있겠어요? 상공께서 하사하신 곳이니, 노비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참아야 마땅합니다.”

금용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방긋 웃었다. 주소유는 당장 금용의 얼굴을 밟아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천한 노비 같으니. 저렇게 대놓고 거들먹거리는 염치없는 짓을 하니 궁에서 쫓겨난 게지.’

이 고고는 두 처첩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또 싸워 봐야 어차피 주인의 처소이니 불리할 것도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을 한 번 쳐다본 이 고고는 입구로 나가 오랫동안 배회하고 있는 오랜 친구를 향해 다가갔다.

“왜 그러는가? 일이 있으면 어찌 들어가서 아뢰지 않고?”

이 고고와 나이가 비슷한 노 고고가 오랜 친구의 손을 잡고 다급히 말했다.

“언니, 어서 방법을 좀 생각해 보세요. 오늘 장을 보러 나갔는데, 항간에 부인께서 첩실을 몹시 괴롭힌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불을 내서 첩을 해치려고까지 했다고요! 게다가 부인은 질투가 몸에 뱄고, 잔악하고 무례한 데다 시어머니도 공경하지 않는다며… 현모양처가 아니라고들 난리입니다.”

이 고고는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다고?”

“그렇다니까요! 정말 속이 탑니다. 어찌 이리 망측한 말들이 떠도는 건지… 우리 아가씨를 어째요. 이를 어쩌면 좋아요?”

이 고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 어디서 터진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후원의 일이 바깥에 알려지다니? 분명히 잘 처리해 두었거늘! 이제 어찌한단 말인가… 대체 어찌해야!’

이 고고가 초조하게 주변을 맴도는 사이, 갑자기 밖에 나갔던 시녀 하나가 뛰어들어 와 헐떡이며 말했다.

“고고! 고고! 큰일 났어요! 본가의 노야께서 지금 당장 부인을 데려가겠다고 사람을 보내셨어요!”

이 고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끝장이다!’

노야가 어떤 분인가. 주 태부는 일평생 명예를 무엇보다도 중시 여긴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여식이 입에 담기도 어려운 짓을 저질렀다고 하니, 그가 화를 내지 않고 배길 리가 없었다.

노야는 분명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셨으리라. 그러나 지금 부인을 데려가려는 건 절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소문을 들으시고 직접 나서서 이혼을 청하시는 것이라면…….’

이 고고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누가 왔더냐?”

시녀가 대답했다.

“열 명 정도인데, 옷을 잘 차려 입은 것으로 보아 관사인 것 같습니다. 지금 노부인의 처소에서 차를 마시고 있어요.”

이 고고는 잠시 비틀거렸다.

‘끝났다……. 끝난 게야.’

노야는 분명 부인에게 갈라서라고 하실 게 분명했다.

이 고고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의 눈빛에도 아랑곳없이, 그녀가 금용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주소유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이 고고가 천한 노비를 내보냈다면 이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금용이 불쾌한 얼굴로 소매를 뿌리치고 나간 뒤, 이 고고의 말에 주소유는 놀라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아버지께서…….”

“예, 부인. 노야께서요! 부인, 어서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본가에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터인데,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를 지킬 방법을 강구하고 나가야 합니다. 만일 노야께서 자리를 내놓으라 하신다면 다 끝나는…….”

“안 돼!”

주소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나는 엄연히 이 집안의 며느리야. 아버지께서 절대 나를 그리 대하실 수 없어…….”

그러나 주소유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문은 이름난 선비 가문으로, 태부라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식들을 엄격히 교육했다. 그런 주씨 가문에서 난 그녀가 이런 일에 얽혀서 소문까지 났으니 태부가 딸을 책망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를 그대로 넘긴다면 주씨 가문의 규율은 무너질 것이고, 그렇다면 앞으로 또 배출해 낼 다른 여식들도 결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 * *

요즘 구염상은 너무나 즐거웠다. 궁 안에 이렇게 재밌는 것이 많았다니? 아바마마의 후궁들이 이런 용도로 쓰일 줄이야.

황궁의 비빈들은 다른 일은 거의 하지 않는 대신, 어떻게 하면 궁에서 황후와 황손들을 웃게 할 수 있는지만 궁리하는 듯했다. 아주 간단한 제기차기라도 후궁들은 무려 백 가지가 넘는 방법을 고안해 냈고, 무슨 놀이든 마치 그것이 본업인 것처럼 성실히 임했다.

양면으로 수를 놓는 후궁은 물론, 입에서 불을 뿜을 줄 아는 후궁도 있었다. 이러한 재주는 특히 구염황이 가장 좋아했는데, 덕분에 그녀는 재작년 빈으로 봉해진 상태였다.

구염상은 모든 비빈들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에 감탄하면서도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바마마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을 줄이야. 날카로운 맹수를 훈련시켜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로 만든 격이었다.

구염상은 재미있게 놀다가도 문득 쓸쓸한 상념에 빠지곤 했다.

‘왜 전생에서 아바마마는 지금처럼 어마마마를 이토록 살뜰히 대해 주시지 않았던 걸까? 진작 이러했다면… 어쩌면 모두가 잘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공주의 표정이 달라진 걸 눈치챈 소 미인이 마침내 제작에 성공한 미끄럼틀을 밟고 다급히 다가왔다.

“공주 전하, 어찌 그러십니까? 지루하세요? 노비가 다른 장난감으로 놀아드릴까요? 아니면 오 귀인의 처소가 바로 옆에 있는데, 와서 불을 뿜으라고 할까요?”

여전히 앳된 얼굴의 소청청이 그윽하게 변한 눈을 깜빡이며 초조하게 공주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기분이 저조해진 상 공주가 뭔가를 마뜩찮아 하는 것이라면 행여나 처벌을 받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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