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3
헌원 노부인은 직접 선물을 들고 찾아온 황궁의 태감이 과거의 친구를 찾아 저택에서 한 시진 가까이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그날 저녁, 며느리 주소유가 저녁 식사 시중을 마치자 헌원 노부인은 포용하는 마음을 품어야 하며, 집안에서 으뜸은 무엇보다 화목함이라고 주의를 주었다.
방으로 돌아온 주소유는 잔뜩 화가 나 최상급 옥팔찌를 던져서 깨뜨렸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 그래 봐야 일개 태감인 주제에 감히 금용 그 천한 것을 두둔하며 내게 도전을 해? 가서 누가 서신을 전달한 것인지, 어떻게 그년이 외부 사람을 만나도록 도움을 받은 건지 전부 조사해 와라!”
그간 주소유는 아예 금용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던 차였다. 그런 하찮은 계집이 감히 반항을 하며 기어오르다니! 진정 죽음을 자초하는 꼴이었다.
“네, 부인.”
주소유는 헌원상에게 아주 잘했다. 부드럽고 자상하게 대해 주는 것은 물론, 할 수 있는 한 너그러운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다. 심지어 가끔은 마음에도 없는 입에 발린 말로 첩실에게 가서 시간을 좀 보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헌원상이 시간이 없다거나 가기 싫다는 티를 내면 주소유는 애교를 부리거나 함께 공부를 도와주며 기분이 좋아졌다는 걸 확실하게 표현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헌원상이 금용을 싫어하는 부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결코 부인의 역린을 건드리거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주소유는 의기양양했다. 남편의 마음만 붙잡고 있다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금용은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헌원 노부인이 나서기 시작하며 주소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금용의 삶은 훨씬 나아졌다. 노부인은 금용의 일을 줄여 준 뒤, 아랫사람들이 며느리에게 반대로 보고를 올리도록 했다.
젊은 금용의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비록 삼 년 동안 노동에 시달린 탓에 예전의 미모는 사라졌으나 오히려 부드러운 수양버들처럼 가냘픈 느낌이 더해졌다.
가을로 들어서는 문턱이었다. 비가 내리자 날씨가 쌀쌀했다. 몇 달간 과보호를 받은 금용은 두꺼운 겉옷을 걸친 채 피곤한 표정으로 어스름이 깔린 길에 서 있었다. 그녀는 분의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맞닥뜨린 건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헌원상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 잠시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금세 헌원상을 알아본 금용이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다는 듯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남자의 시선을 피한 그녀가 몸을 숙여 인사했다.
헌원상은 언제나 그랬듯 발길을 돌려 떠나려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달빛 아래 눈이 부시도록 하얗고 가느다란 목을 쳐다보며,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무언가에 홀린 듯 가까이 다가갔다.
순간적으로 긴장한 금용은 자기도 모르게 분의가 매일 귀에 속삭이던 말을 떠올렸다. 순간 오래도록 몸을 숙이고 있는 것이 힘겨운 듯 비틀거린 금용이 옆에 있는 탁자를 짚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히 헌원상 쪽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대는…….”
“천첩, 금용이옵니다.”
“알고 있네.”
헌원상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코끝에 아주 희미한 향기가 느껴졌다. 맡으려고 하면 사라지고, 맡지 않을 때는 착각이 아닌 듯 다시 느껴지는 향기였다. 하지만 여인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아니었다.
“많이 추운 것이오? 이렇게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니.”
조금 전 비가 내리기는 했으나 아직 가을이라 겨울옷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말에 순간 금용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겉옷을 여민 금용이 일부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치 수천 번을 연습한 듯 군더더기가 없고 교태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천첩이 과했습니다. 돌아가면 반드시 갈아입겠습니다.”
바람이 불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금용을 보며 헌원상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사람이 맞아?’
헌원상은 금용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상당히 기고만장한 데다 눈빛도 날카로웠다. 그런데 어찌 지금은 이렇게 고분고분하단 말인가.
헌원상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금용이 계속해 뒤로 물러서다 뒤에 있는 탁자에 부딪힐 것 같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
금용이 헌원상의 품속으로 들어왔다. 매미의 얇은 날개처럼 가냘픈 느낌에 헌원상의 미간이 갑자기 더 깊이 일그러졌다.
‘너무 가볍잖아…….’
마치 한 번 잡아당기면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손목이었다.
“당신……”
당황한 금용이 두려운 듯 헌원상의 품속에서 발버둥쳤다. 그러나 빠져나가기 위해 한참을 허둥지둥해도 그녀는 여전히 헌원상의 품 안에 있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힌 눈은 애처롭고 가련하여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헌원상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는 자제력을 발휘하여 잠시 뒤 금세 몸을 떨어뜨렸다.
“몸도 불편한데 일찍 돌아가시오.”
말을 마친 헌원상이 금용의 손을 놓았다. 정자를 나선 그가 서방 쪽으로 걸어갔다.
어두운 곳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분의는 헌원상이 사라지자 손에 들고 있던 정향情香을 과감하게 끈 뒤 분개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뭐 저런 작자가 다 있어! 반이나 태웠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니!”
그나마 접촉이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화가 치밀어 올라 쓰러졌을 것이다.
분의의 마음에 순식간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래도 시작이 좋으니 희망이 있다. 그녀는 행여나 무엇인가 미심쩍게 여긴 헌원상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헌원상이 한 마디라도 건네기만 하면 그녀들은 반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끼를 던져 놓은 분의는 더욱 적극적으로 기회를 만들었다. 금용과 헌원상이 밤에 만날 수 있도록 그녀는 매번 아끼지 않고 길목에 정향을 피우면서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를 최대한 살리려 했다.
마음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없는 사람을 이기는 법이다. 한 사람은 밝은 곳에, 한 사람은 어두운 곳에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금용을 다시 만난 헌원상은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준 후, 그날 밤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분의는 밤새 추운 창밖을 지키고 있었다. 안에서 부끄러운 소리가 들려와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금용의 솜씨가 부족하니, 약간의 기교를 전수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이 잘 성사되기만 하면 분의는 일찍 공을 세우고 물러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사람이 찾아왔던 일을 떠올렸다. 천민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약조를 떠올린 분의의 온몸에 힘이 샘솟았다.
* * *
“지금 뭐라고 했느냐!”
이른 아침, 칼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흉악한 눈빛으로 하인을 노려본 주소유가 머리카락을 고정시키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주채를 깨뜨렸다. 화가 나서 가쁜 숨을 몰아쉰 그녀가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리께서 오늘 어디서 나왔다고?”
보고하는 시녀는 머리를 땅에 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이 덜덜 떨렸다.
“저, 그것이… 금 이랑의 방에서…….”
시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자 위에 있던 거울과 주채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가! 당장 나가라!”
‘천한 것! 감히 내 손에서 상공을 빼앗아 가? 내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주소유가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이 고고, 약을 들어라. 사내와 하룻밤을 보낸 그 천한 것을 보러 가야겠다.”
금용은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주소유를 보며 수줍은 듯 침대에서 내려왔다. 웃는 얼굴은 마치 한 송이 꽃 같았다.
“무슨 일로 이렇게 하인들을 대동하고 행차하셨나요? 아이 참, 송구하기도 해라.”
입을 가리고 웃는 금용은 더욱 가냘프고 아름다워 보였다. 차갑게 굳은 주소유가 곧장 손을 흔들었다.
“당장 부어 넣어라.”
사람들이 다가오기 전, 금용이 먼저 외쳤다.
“됐다! 내가 직접 먹겠다.”
이 고고의 손에서 약사발을 받아 든 금용이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양 느긋하게 맛을 보았다. 입가의 웃음은 난폭할 정도로 크게 바뀌어 있었다.
주소유는 당장 금용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어찌 이 천한 것이 자신의 남편을 유혹해 하룻밤을 보냈단 말인가! 이런 천한 년이!
“뭐가 좋다고 웃는 것이냐?”
금용이 주소유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언니를 보고 웃지요.”
손수건으로 입가의 약을 닦은 금용이 비아냥거리듯 주소유를 쳐다보았다.
“정말 화가 많이 나셨군요. 이 동생에게 약을 먹이려고까지 하시다니……. 설마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언니는 전에 제게 더 맛있는 약을 먹이신 적도 있잖아요.”
금용은 호호 웃어 보이며 주소유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부러 목을 쭉 펴며 격렬했던 어젯밤의 흔적을 드러낸 금용이 미끄러지듯 가볍게 손가락으로 목에 선을 그었다.
“상공께서는 제 몸이 참 부드럽다면서, 제가 회임하게 되면 동침하지 못할까 봐 두렵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언니, 상공께서 제가 회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매일 지겹게 제 옆에 계실 수 있을 테니 오히려 더욱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금용은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 웃는 낯으로 주소유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낯부끄러운 말을 하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천연덕스런 자태가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결국 참지 못한 주소유가 금용의 몸뚱이를 찢어 버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녀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천박한 금용의 얼굴을 쥐었다.
“네년이 뭔데! 어디서 감히 상공이란 말을 입에 올리느냐! 너는 일개 첩이고 노리개일 뿐이다!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천한 것이 감히……!”
금용은 있는 힘을 다해 반항했다. 수년간 노동으로 신체를 단련한 금용은 가냘파 보이는 몸에 비해 힘이 셌다. 곧 주소유를 밀어낸 금용이 도리어 부인의 살을 꼬집으며 입으로 더욱 날카롭게 반격했다.
“그게 뭐가 어때서요? 하찮은 노리개도 주인이 가지고 놀아 주길 원한답니다! 상공은 저랑 노는 걸 좋아하세요. 제 가느다란 허리와 기다란 다리와 신음소리까지 좋다고 칭찬해 주셨다고요! 언니는 가능해요? 나처럼 할 수 있냐고요!”
“천한 노비 같으니!”
두 사람은 있는 힘껏 서로 때리며 싸웠다. 싸움을 말리던 하인들까지 한데 뒤엉키면서 금용의 처소는 곧 난장판이 되었다. 주소유의 하인은 몰래 금용의 하인에게 손을 댔고, 금용의 시중을 들던 이들은 주인이 득세하자 혼란한 틈을 타 반격을 시도했다.
어느 새 도착한 헌원 노부인이 지팡이를 거칠게 쿵쿵 두드렸다.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여봐라, 어서 저 둘을 떼어 놓아라! 여태 떼어 놓지 않고 뭣들 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