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79)화 (379/449)

외전 구염상 2-2

백발을 늘어뜨린 노인은 구염락에게 오로지 전쟁과 정복만을 이야기했다. 그는 독보적인 자신감과 강한 기개로 젊은 자신을 유혹하며, 진정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파했으나 유독 그 자신의 삶에 대해, 특히 황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돌아온 구염락은 때로 바쁜 와중에도 백발의 자신을 떠올리곤 했다. 그는 정말 미래의 자신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정성 들여 키운 태자에 대해서는 왜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은 걸까? 어째서 새로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그리도 귀엽고 영리한 상아를 어째서 함께 추억하지 않은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을 종합한 구염락은 제대로 죽지도 않은 그 늙은이를 싫어했다. 기분 좋게 떠나지도 않는 데다 뜬금없는 소리나 일삼고, 할 일이 없으면 자신의 영혼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이상한 노인이었다. 구염락은 이따금씩 잠을 자다가도 그가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럴 때면 너무나 그를 밀어내고 싶었다.

‘죽지도 않는 망할 늙은이! 언젠가 국사에게 반드시 그 늙은이의 영혼이 벼락을 맞도록 빌라고 해야지!’

* * *

구천을 떠돌던 구염락의 혼백 하나가 사라졌다. 죽은 뒤 영혼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혼백이 사라진 것이다. 죽은 구염락은 조급하게 영혼을 다시 끌어모으려 했으나 도저히 모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끌어왔던 영혼들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독선과 오만이 더욱 강해졌다. 땅에 끌리는 긴 용포 자락과 함께 눈처럼 하얀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냉담하고 위엄 있는 표정은 늙어서도 그대로였고, 오히려 자신감이 더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힘과 민첩한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부드러움에 빠져 멋진 척하는 젊은 자신에게 이런저런 권유를 늘어놓는 게 귀찮을 때가 더 많았다. 매일 대전에 앉아 한 해 한 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 보면, 분명 젊은 구염락은 죽은 뒤 자신이 말한 사랑이라는 게 그저 누군가에게 속은 결과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후에 그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볼 수 있길 기다렸다.

몇 년간 자세 한 번 바꾸지 않고 조정에 앉아 있던 백발의 구염락은 문득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장서열이 읊조리던 기도가 생각났다. 관심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전장에서 죽을까 두려워 하고 있었다.

백발의 구염락은 당시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젊은 자신이 장서열을 걱정하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그의 마음 속을 가득 메운 짙은 감정은 너무나 낯설어서 도저히 경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젊은 자신이 행복해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불순한 마음으로 시작된 관계가 어찌 서로 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적어도 자신이었다면, 그 지저분한 일들을 처리하기 귀찮아서라도 절대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이랑,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시면 안 돼요. 자포자기하시는 건 더더욱 안 되고요! 지금 부인이 감히 이랑에게 손을 대는 건 순전히 멍청하기 때문이에요!”

분의粉衣는 금용의 얼굴에 난 손바닥 자국에 약을 발라 주며 격분했다.

“폐하께서 더 이상 이랑을 도와주시지 않는 게 뭐 어때서요? 이랑에게는 아직 이 공공이 계시잖아요! 우리가 다른 마음이 있길 해요, 궁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길 해요?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이 공공은 여전히 금 이랑의 벗이에요.”

분의는 차분하게 금용을 다독이며 맞아서 여기저기 상처가 난 뼈만 남은 몸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주인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이랑, 이렇게 오랫동안 부인이 이랑을 괴롭힌 건 이랑이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이랑이 노야의 총애를 받게 될까 두려워서지요. 하지만 이랑은 분명 아직도 의지할 곳이 있어요. 그걸 잠시 간과하신 것뿐이라고요.”

분의의 말을 듣던 금용의 멍한 눈에 점점 생기가 돌아왔다. 삼 년이었다. 무려 삼 년 동안이나 주소유는 금용을 때리고 싶을 때, 욕하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이를 실행했다. 처음에는 금용도 반항했지만, 황제라는 뒷배가 사라지고 난 뒤 그녀는 이 저택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원하는 만큼 충분히 금용을 못살게 굴었다.

헌원 노부인은 더욱이 며느리 주소유의 노여움을 사려 하지 않았다. 별것 아닌 7품 관리인 아들 헌원상과 달리, 며느리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벼슬길에 오를 희망이 없는 헌원상은 놀랍게도 주소유를 아내로 맞이했고, 헌원씨 가문 사람들은 주소유를 감싸기에 급급해 그녀가 아무리 금용을 학대해도 개의치 않았다.

금용은 주소유를 증오했다. 주소유는 거들먹거리며 금용을 벌레처럼 짓밟았다. 별것도 아닌 그 계집은 매일 자신을 하녀처럼 부리며, 겨울이면 온 집안의 옷을 다 빨게 했고 여름에는 장작을 패게 했다.

분의의 말에 희망이 생겼지만, 거칠어진 손과 상처 자국으로 가득해진 몸, 그리고 쇠락한 얼굴을 바라본 금용은 순간 주소유보다 못한 모습에 열등감을 느끼며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분의는 약삭빠른 여인이었다. 열세 살부터 남자들을 접대한 그녀는 사람의 기분을 살피는 일에 능했다.

“이랑, 뭐가 두려워서 그러세요.”

분의는 침대 위에 꿇어앉아 노동으로 딱딱하게 굳은 금용의 어깨를 풀어 주었다.

“남자들은 미녀를 좋아하지만, 또 약자를 동정하기도 하죠.”

분의는 자신을 바라보는 금용을 마주보며 확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세요, 이랑은 노야의 첩실이잖아요. 어쨌든 자신의 여인인데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게 노야라고 마음이 편하겠어요? 이랑께서는 부인보다 가냘프고 여린 몸매에, 부인보다 완벽한 얼굴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거기에 삶의 굴곡을 겪은 이 처량함까지 더해지면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배길 리가요.”

물론 모두 금용을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분의 같은 뒷배가 없는 여인에게 외모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또 방법이란 머리를 굴려야 생기는 법이었다. 남자가 오지 않으면 달라붙어서라도 쟁취해야 했다.

첩실이면 첩실답게 굴어야지 굳이 정실인 척 고상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오히려 정실인 주소유가 체면을 불사하고 매일같이 남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헌데 일개 첩실인 금용이 자중할 게 무어란 말인가.

금용이 희망에 찬 눈빛으로 분의를 바라보았다.

“그래? 노야가 정말로 나를 좋아할까? 정말 이 지옥에서 벗어날 희망이 있는 거야?”

“그럼요.”

금용의 손을 잡은 분의가 주인의 마음을 현혹시켰다.

“이랑, 노비가 반드시 이랑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노비는 영원히 이랑 뒤에 서 있을 거예요. 이랑께서 잘 지내셔야 노비도 따라서 덕을 볼 수 있잖아요.”

분의는 그동안 금용과 고생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몇 년 동안이나 빨래를 해 본 적이 없던 그녀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주인을 따라 옷을 빠는 노동을 하고 있었다. 고생에서 벗어나려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물론 금용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주 맞다 보니 겁이 났을 뿐, 누군가 돌파구를 주고 자신감을 심어 준다면 그녀는 언제든 빠르게 일어나 재기할 수 있었다.

분의는 먼저 금용이 줄곧 자신에게 잘해 줬다고 입에 달고 사는 그 ‘이 공공’이란 자를 금용과 연결시켜 주기로 했다. 금용이 ‘이 공공’이라는 수를 쓰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일 터였다.

* * *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자신에게 들어온 서신을 본 후, 소리자의 마음은 바늘에 찔린 듯했다. 금용이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낼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사람들을 모두 물린 소리자는 홀로 비단이 깔린 의자에 앉아 손에 들린 편지를 꼭 쥐었다. 허탈한 마음에 안색이 침울해졌다.

‘금용도 마땅히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누렸어야 했는데……. 만약 당시에 금용이…….’

서신을 소중히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소리자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 의지했던, 언제나 꿋꿋하게 미소 짓던 소녀를 떠올렸다. 사람들은 금용이 분수도 모르고 높은 곳을 바라봤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가 보기에 금용은 여인이었기에 어렸을 때 자신을 지켜 준 폐하가 마땅히 흥망성쇠를 함께할 거라 믿었을 뿐이다. 그러나 폐하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은 금용은 공교롭게도 가차 없이 버려졌다.

최근 몇 년간 소리자는 황제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금용을 보러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금용이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을 줄이야…….

서신 속 내용을 떠올린 소리자의 불안감이 점점 강해졌다.

‘그냥 한번 보러 가는 건 괜찮지 않을까?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돌아온다면…….’

며칠간 번뇌와 두려움에 시달리던 소리자는 결국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출궁했다. 그는 기회를 틈타 허물어져 가는 사당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금용을 만났다.

‘저 여인이 정녕 예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금용이 맞단 말인가?’

소리자는 깜짝 놀랐다. 어떠한 장신구도 없이 하인의 의복을 입고 있는 금용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각하게 여위어 있었다. 눈과 볼이 푹 꺼진 탓에 동그랗고 큰 눈은 오히려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소리자를 본 금용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어떠한 연기도 필요 없이, 가슴 속 그리움과 우정이 그녀의 방어막을 뚫고 나왔다. 달려나간 금용이 멍하니 서 있는 소리자를 끌어안고 구슬프게 울었다.

“소리자… 소리자! 드디어 와 줬군요. 저는… 저는 당신이…….”

잠시 망설이던 소리자 역시 금용을 끌어안았다. 손에 들어오는 느낌이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금용, 금용…….”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간의 설움을 털어놓으며 두 사람은 다시금 우정을 확인했다.

조금 더 이성적인 소리자가 먼저 슬픔을 억누르고 금용의 안부를 물었다. 금용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소리자는 놀랍고도 마음이 아팠다. 헌원 부인이 금용을 그리 괴롭혔을 줄이야. 그녀는 금용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토록 콧대가 높던 금용이 몇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굴욕을 참았을지 소리자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 소리자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걱정 마라. 내가 헌원부로 찾아갈 테니.”

소리자의 한 마디에 금용의 눈에서 서러움이 사라졌다. 슬픔과 절망뿐이라 생각했지만 멀리 돌아와도 자신에게 가장 잘해 주는 건 역시 소리자였다.

소리자가 헌원씨 가문에 금용을 보러 가는 건 일종의 경고였다. 황제가 금용을 중시하지 않으면 또 어떠한가. 그녀는 여전히 황제의 곁을 지키는 최측근과 막역한 사이였다.

하물며 개를 때릴 때에도 주인의 얼굴을 봐야 하는 법이었다. 소리자의 신분은 분명했다. 만약 그가 누군가를 난처하게 하고 싶다면 평소처럼 황제와 한담을 나누며 공연히 한두 마디를 흘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헌원상은 황제에게 더 없이 망신스러운 수모를 당해 왔다. 헌원씨 가문이 조심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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