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78)화 (378/449)
  • 외전 구염상 2-1

    구염상이 번쩍 눈을 떴다. 높이 던져진 그녀의 눈앞에 남자의 웃는 얼굴이 커다랗게 들어왔다. 순간 저절로 숨이 막히는 걸 느낀 그녀는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고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칠 뻔했다.

    “서열아, 얼른 와 봐! 상아가 이상해. 갑자기 웃지를 않는데… 어디가 아픈 건가?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정말이야!”

    장서열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긴 머리카락을 닦으며 서둘러 나왔다. 그녀의 뒤에는 주인을 뒤쫓아 나온 완정과 농교가 있었다. 촛불이 비춘 그녀의 얼굴은 결코 상냥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괴롭히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한사코 듣지 않더니 결국 상아를 놀라게 했군요!”

    구염락을 노려본 장서열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뒤, 그의 손에서 구염상을 받아 들어 어깨에 얹고 살살 달랬다.

    “상아, 착하지……. 무서웠지? 아바마마는 나쁜 사람이란다.”

    구염황이 짧고 굵은 다리로 욕실에서 빠르게 뛰어나왔다. 겨우 이런 일로 놀란 누이동생이 가소로웠지만, 자리를 차지한 부황의 모습에 비웃을 수 없었던 아이는 다시 짧은 다리를 이끌고 허둥지둥 달아났다.

    공처럼 뚱뚱한 모습을 쫓는 구염상의 눈빛은 너무나 놀라 있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는 헌원상보다도 더 뚱뚱해 보였다. 언뜻 눈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이목구비조차 분별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둥글둥글한 얼굴은 잘생겼는지 아닌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괜찮다, 괜찮아… 우리 상아, 착하지. 아바마마는 신경 쓰지 말거라. 아주 이상한 사람이니까.”

    장서열이 부드러운 손으로 구염상의 등을 토닥였다.

    구염상은 어머니가 말하는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가 과연 같은 사람인지 고개를 돌려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의 기억 속 아버지는 언제나 엄했고, 눈빛은 녹지 않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버지의 오만한 말투를 대할 때면 누구든 자신이 잘못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했다.

    그런데 조금 전 어머니의 남편은 분명 자신을 보고 웃었다. 비록 순식간에 당황한 표정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건 순전히 놀라서 그런 것뿐, 구염상이 알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만만했고,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감히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의 어머니가 유일했다. 할머니인 태후라고 해도 아버지 앞에서는 절대로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태의를 부를까?”

    심지어 이 질문은 조심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아예 태의원 전체를 다 깨우지 그러세요? 마지막에 웃음거리가 되는 게 당신일지, 아니면 내가 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요. 또 본궁이 사소한 일로 소란을 떤다고 말이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잖아도 탄핵을 당해 심사가 편하지 않은 장서열이 구염락을 비꼬았다.

    작년, 호국과의 전투에서 일차로 승리를 거둔 구염락은 겨울에 회군하여 돌아왔다. 상소문을 올리려던 문신들은 감히 구염락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못 한 채 그 분노를 장서열에게로 돌렸다. 이들은 황후의 의식주부터 말투 하나까지 꼬투리를 잡아 그녀가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왔으니 즉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머지않아 그들은 처형되는 것으로 진정한 재앙을 맞이했다. 장서열은 그들을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시체를 밟고 올라가려 한 자들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짐의 핏줄이니,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큰일이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구염상의 시선이 다시 사내에게로 향했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준수하고 엄숙한 아버지가 불과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무한한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과장된 말투 이면에서 거짓이나 제멋대로인 느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으스스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부황은 분명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아이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에게서는 높은 지위에 오른 중년 특유의 득의양양함도, 권세와 영광이 만들어 준 안하무인한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떨릴 정도로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존재였다. 구염상의 아버지이자 하나뿐인 부황. 그녀의 자랑이었지만, 결국 그녀의 편은 아니었던 사람.

    구염상은 갑자기 젊어진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 위엄을 떨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돌연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구나…….’

    구염락은 딸이 울자 가슴이 철렁했다.

    “상아가 울지 않느냐, 어서 달래 주거라! 다들 멍하니 서서 뭣들 하는 것이냐! 공주가 우는 것이 안 보이느냐!”

    * * *

    보름 후, 구염상은 평안한 표정으로 마음껏 뛰노는 오라버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시선을 고정하며 어화원의 익숙한 경치를 바라보곤 했다. 네 살 아이의 얼굴에 무엇인가 추억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어마마마도 나와 같은 상황이신 거겠지? 대체 무엇이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던 어마마마를 오늘처럼 권위에 녹아들도록 만든 걸까?’

    비록 부드러움 속에 잘 감춰져 있었지만 구염락을 바라보는 장서열의 눈빛에는 구염상처럼 어딘지 모르게 본능적인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구염상은 이러한 스스로가 익숙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과거에는 냉담하게 구는 아버지에게 발을 동동 구르며 손찌검까지 일삼지 않았던가.

    ‘무엇이 어마마마를 변하게 한 걸까?’

    오늘날 어머니는 굴욕을 불러올 만한 상황을 정확히 터득하고, 자식과 가족을 위하여 본래의 성격을 거둔 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상아! 상아! 여기야, 여기!”

    풀숲에서 튀어나온 둥글고 두툼한 손이 즐겁다는 듯 구염상을 끌어당겼다. 구염상은 살며시 웃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사이로 온갖 꽃이 흩날렸다.

    “가요.”

    모처럼 쉬는 날을 맞이한 구염황은 평소처럼 굳은 얼굴로 기요처에 갈 필요가 없었다. 오랜만에 긴장을 푼 그는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굴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여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라버니가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태자로 봉해진 오라버니가 있으니 무슨 일을 하든 안정된 장래와 의지할 곳이 생긴 듯했다. 사람들은 모두 이들 오누이에게 경외심을 가졌고, 앞다투어 환심을 사려 했다.

    구염상은 이러한 한가함이 좋았다. 오늘날 후궁은 화려한 꽃들이 모두 진 뒤의 고요한 들판과도 같았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으며 피비린내 묻힌 영혼을 지닌 구염상은 헌원씨 가문의 패가망신에 일말의 동정심도 일지 않았고, 심지어는 약간 무관심하기까지 했다.

    구염상은 그런 스스로가 싫었지만, 또 그 모습이 바로 자신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녀의 뼛속 깊이 새겨진 어떤 것들은 이따금씩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더 이상 과거의 순수한 공주가 아니라고, 또 벽지원에서 금과 향 하나로 만족하던 소녀가 아니라고.

    “상아! 또 정신을 팔고 있구나!”

    구염황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뚱뚱한 몸은 두어 번 떨렸지만, 호흡이 가빠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숨이 차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구염상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손을 잡고 즐겁게 앞으로 뛰어갔다. 구염상은 웃으며 눈앞에서 움직이는 둥글둥글한 형체를 따라갔다. 단순하면 또 어떠하랴? 살면서 여러 일을 겪은 자만이 비로소 누군가를 해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 고작 여섯 살인, 누구보다 바보처럼 웃을 줄 아는 구염황은 기요처에서는 아버지보다도 더 바른 자세로 곧게 서 있었으며, 형을 집행하는 현장에서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결국 이 황궁에서 가장 단순한 건 여전히 구염상 자신이었다.

    구염상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평온했다. 그대로 먹고 마시면서 언젠가 죽는 걸 기다리는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교를 부리고 장난을 치는 것도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누구의 안색을 살피거나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헤아릴 필요도, 누군가의 호의를 사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에 구염상이 건드리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그녀를 건드릴 수 없는 사람들만 있을 뿐.

    구염상은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게을러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가 궁의 인사 배치와 구염황에게 부탁한 조정 관원의 명단을 들춰보았다.

    ‘어마마마께서 금용을 헌원상에게 보냈구나. 게다가 헌원상의 관직이 이렇게 낮다니……. 그런데도 주소유가 헌원상에게 시집을 간 건가?’

    구염상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마마도 성격이 많이 죽으셨군.’

    주소유를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헌원상 옆에 묶어 둔 건 명예와 이익에 눈이 먼 주소유에게 확실히 적지 않은 타격이리라.

    하지만 그런 파렴치한에게 어찌 한 번의 타격만으로 성이 차겠는가.

    ‘착한 내가 몰락한 금비마마를 도와줘야겠지?’

    침대 위에 엎드린 구염상이 머리를 받친 채 두 다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주소유를 위하여 금용이 서출을 낳을 수 있도록 힘을 써 줄 생각이었다.

    구염상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도록 소란을 피울 필요 없이 어머니가 자신에게 감격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구염상은 깔끔한 일처리에 능했다. 고맙게도 황궁에는 감히 그녀의 성질을 건드릴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구염상은 일의 결과까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시중을 드는 마마에게 용모가 아름다운 기녀를 사게 한 구염상은 계집을 팔려 간 시녀인 것처럼 꾸며 헌원씨 가문에 들여보냈다. 기녀는 금용이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시녀가 되어야 했다.

    일을 꾸미는 데 있어 구염상은 조금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간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의 그 사람이면서, 놀랍게도 이번만큼은 자신의 편이라는 걸 간파했다. 아버지는 무슨 짓을 하든 뒤에서 자신을 지켜 줄 터였다.

    구염상은 황공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이번 생은 소중하고 또 소중했다.

    * * *

    한편, 구염락에게는 비밀이 없었다. 일등공의 보고를 듣고도 그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회군할 당시 구염락은 호국에 주국의 백만 대군을 남겨두었다. 양쪽 군대는 교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언제든 2차 전투가 시작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호국의 광활한 토지를 손에 넣을 생각에 구염락의 마음이 일순간 벅차올랐다.

    구염락은 손에 든 지도를 집중하여 바라보고 있었지만, 전장에서 용포를 입고 있던 백발의 자신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입을 열지 않아도 온몸으로 보여 주던 두려움 없는 기개와, 모든 이들을 깔보던 자신감.

    백발인 그의 눈앞에는 큰 힘을 가진 호국과 끝없이 펼쳐진 토지가 주는 유혹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는 모든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 그에게 더 이상 가치가 있는 것이 없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구염락은 백발의 그가 부러우면서도 두려웠다. 그의 시간 속에 함축된 지혜가 부러웠고, 두려울 게 없어 보이는 냉담함과 절로 느껴지는 그 피비린내가 두려웠다. 스스로 그러한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보니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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