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77)화 (377/449)
  • 외전 구염상 1-26

    시간은 마치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유령처럼 유유히 흘러갔다. 흐르는 세월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 옆으로 도망을 치거나, 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마음껏 뛰어다녔다.

    몇 년간 주소유는 참는 법을 배웠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약을 먹었으며, 마치 이제야 철이 든 사람처럼 상 공주를 살뜰히 보살펴 주기까지 했다. 상냥한 얼굴을 한 그녀는 구염상에게 친어머니보다도 더욱 친근하게 굴었다.

    구염상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웃고 있는 주소유를 볼 때마다 그보다 더욱 친절하게 반응했다. 마치 지금껏 누려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양, 그녀는 선의를 가장한 주소유의 검은 친절함 속에 몸과 마음을 전부 밀어 넣었다.

    그렇기에 구염상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는 일이었다.

    상 공주의 죽음은 다시 하나가 되어 가는 듯 보이던 헌원씨 가문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주소유는 억울한 얼굴로 울면서 맹세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어찌 며느리를 죽일 수 있겠냐고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공주의 측근인 대마마는 마지막 순간 피를 토하듯 주소유를 가리키며 노부인이 공주를 죽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노부인이 마침내 바라던 대로 공주를 죽게 만들었으니, 앞으로 더 이상 부마를 힘들게 할 일도, 다른 아들들이 어머니에게 대들 일도 없을 거라고 말했다.

    헌원씨 가문을 덮친 거대한 슬픔과 고통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류했다. 그간 고부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던 이들이 드디어 수렁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돌연 상 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은 사람들을 더 깊은 심연 속으로 빠뜨렸다.

    상 공주가 죽었다.

    모두들 주소유가 구염상을 죽였다고 믿었다. 이미 수많은 증거들이 그녀가 결코 상 공주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아들들의 날선 질책에 분노한 주소유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한 일이면 또 어떻다는 것이냐? 그 계집이 정말로 독을 넣은 탕을 마실 거라는 기대는 나도…….”

    순간 주소유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중요한 자백은 모두 입 밖에 나온 채였다.

    정말로 어머니의 짓이었다.

    당황한 주소유가 계속해서 고함을 질렀다.

    “아니, 내 말을 좀 들어 보거라!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고 이건 음모다! 구염상 그 계집의 음모가 확실해! 그러니까, 그 계집이 다 알고 일부러 먹은 것이다. 우리 모자 사이를 끝내 갈라놓으려는 수작이란 말이다! 사사야, 사사야…….”

    서둘러 헌원사사에게 다가간 주소유가 큰아들을 흔들었다.

    “어미를 믿지? 반드시 어미를 믿어야 한다! 분명 그 아이의 음모라니까! 그 아이가 고의로 그리 된 것이니, 절대로 이 어미를 원망해서는 아니 된다! 안 돼!”

    헌원사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가 살인자이니, 상아에게 어머니를 조심하라고 알려 주지 않은 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 어머니께서… 기꺼이 이 아들을 위해 선입견을 버리고, 상아를 받아들일 거라고 믿었던 제 자신이 정말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 제가 그녀를 해친 거예요. 제가…….”

    “아니다, 아니라니까! 네가 아니라 그 아이 스스로 그리 된 것이다! 너희들 모두 들었지? 그 아이가 스스로 떠난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아서는 안…….”

    순간 귀를 찢는 비명 소리가 모든 이들의 고막을 바람처럼 뚫고 지나갔다. 온몸에 한기가 불어 닥칠 정도로 놀라운 음성이었다.

    * * *

    주소유는 사람이 죽는 건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고 믿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시간은 흐를 것이고,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분명 아들이 곧 구질구질한 모습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장 우수한 아들이 되리라 믿었다.

    어쩌면 아들은 자신을 원망할 수도, 다시는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떠한가. 어쨌든 이긴 건 주소유 자신이었다. 적은 죽었고, 그녀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었다. 따라서 자신에게는 아직 재기할 기회가 있었다. 여전히 자식들을 키우고, 첫째를 다시 관직에 복직 시킬 수 있는 기회가.

    구염상이 죽은 지 백 일 후, 주소유는 허약한 몸을 일으켜 서둘러 아들들을 위해 장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던 그녀는 큰아들을 위해 혼기가 지난 금 귀비의 딸 예의禮儀 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하기로 했다.

    주소유가 수완이 좋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지혜롭고 계략에 능한 데다 갖가지 서적들을 섭렵한 덕분에 우수한 아이들을 길러 냈다. 가히 제갈량에 견줄 만했다.

    주소유는 헌원사사의 명성을 재정비했다. 그녀의 아들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고,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읍하여 국사에 온 힘을 쏟는 충직한 신하였다. 또한 그는 이번 생에 미련이 없을 정도로 죽은 아내를 사랑한,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지고지순한 사내였다.

    금용의 딸 예의 공주는 과연 주소유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소문을 들은 그녀는 자신의 언니처럼 주소유를 실망시키는 일 없이 정복욕을 불태웠다. 그녀는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기로 유명한 상 공주의 남편을 정복하고 싶어 했다.

    예의 공주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일찍 혼인하여 딸 셋을 낳고, 매일 같이 부마의 가족들과 전쟁을 벌이는 생각 없는 언니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인물이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예의 공주는 그저 하늘에 제를 올리러 갈 때마다 헌원사사가 수행 예관으로 따라가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헌원사사가 다시 벼슬길에 오른 건 모두 구염상 덕분이었다. 주소유와 구염상의 관계가 호전되던 그 해, 구염상은 직접 부황에게 요청해 남편의 사직을 무마시켰다. 비록 몇 계급 강등되었지만 헌원사사가 노력하면 이전만큼 높은 지위에 오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주소유는 이 부분만큼은 걱정이 없었다. 이제껏 아들의 능력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는 주소유는 헌원사사가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예의 공주가 손쉽게 걸려들자 주소유는 더 이상 약을 먹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속이 시원해졌다.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온몸에 힘이 넘쳤다. 그녀는 여인인 이상 누구든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의 공주가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의 공주가 혼인 성지를 요청하기만 하면 내 아들은 귀비의 번듯한 사위가 된다. 그때가 되면 금 귀비라고 별 수 있을 리가 없지. 내 아들을 위해 매사 뒤에서 애를 쓰고 은자를 대주지 않고 배기겠는가!’

    주소유는 다시금 기고만장할 미래를 상상하며 속으로 통쾌해 어쩔 줄을 몰랐다. 과거 예락 공주를 선택하지 않았던 건 당시 자신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 딸이야 그저 그래도, 금 귀비가 실세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금 귀비는 최근 몇 년 동안 계속해 승승장구했을 뿐더러 은밀히 내명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금 귀비라는 뒷배를 얻기 위해서라면 희생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게다가 누가 되었든 구염상보다는 다루기 쉬울 것이다.

    지난번 며느리에게서 교훈을 얻은 주소유는 구염예의에 대해 더욱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녀는 구염예의가 잔머리는 좀 쓰지만 구염상처럼 의뭉스러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한 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구염상에게 당한 뒤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부귀영화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주소유는 고작 가능성 없는 위험 때문에 아들이 다시 한 번 부마가 될 기회를 날려 버릴 수 없었다. 특히나 헌원사사는 관직에서 물러난 전력이 있었기에 지금은 무조건 위로 올라가는 시간을 단축시켜 줄 강한 신분과 배후세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주소유는 약삭빠르고, 자기 사람을 위해 계획을 세울 줄 아는 금 귀비를 선택했다.

    헌원사책은 더 이상 어머니의 만행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최근 몇 년간 기력을 회복하고 있던 그는 죽은 형수님을 위해 일 년 동안 향을 올린 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렇게 헌원사책은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심지어 억울한 이의 존재를 없애려 하는 사람의 도구가 되는 삶을 거부했다.

    셋째는 권세에 빌붙어 이익을 꾀하기에 급급한 어머니가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그를 어느 고관의 이혼녀와 맺어 주려 하자 편지 한 통만 남긴 채 집을 떠나 버렸다.

    화가 난 주소유가 손에 든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이 멍청한 놈 같으니!”

    이후 주소유의 모든 희망은 큰아들 헌원사사가 되었다. 특히나 넷째 아들이 학문을 싫어하고, 다섯째가 유흥에 물든 걸 발견한 뒤에는 더더욱 큰아들에게 정성을 쏟았다.

    주소유가 갖은 애를 쓴 결과 구염상이 죽은 이듬해, 마침내 헌원씨 가문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예의 공주를 새로운 며느리로 맞이했다.

    길을 걷는 주소유의 발걸음은 마치 날아갈 듯했다. 예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뒤 헌원사사는 어머니의 예상처럼 과연 상승일로를 걸었다. 금 귀비는 물심양면으로 부마를 도와 길을 닦아 주었고, 그가 조정에서 자신의 힘이 되어 주길 바랐다.

    예의 공주는 콧대가 높았다. 매일 싱글벙글 웃고 있는 공주에게 무릎을 꿇는 것을 제외하면 주소유의 삶은 정해진 목표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주소유는 앞으로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오직 저 능글맞은 예의 공주를 상대하는 일일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염상이 세상을 떠난 지 삼 년이 되는 날 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당연히 주소유조차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헌원사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발견 당시 대사공大司空(공조판서) 헌원사사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상 공주의 묘 앞에 앉아 있었다. 인자한 얼굴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어째서! 도대체 왜!’

    주소유는 미쳐 버렸다.

    심혈을 기울여 계획하고 준비했다. 큰아들은 주소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자신의 뜻대로 되었을 텐데, 분명 모든 일이 다 잘 되었을 텐데, 어째서!

    큰아들의 죽음으로 주소유의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머리가 하얗게 센 부모가 칠흑 같이 검은 머리를 가진, 그것도 가장 우수한 자식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동시에 삼 년 동안 구천을 떠돌던 구염상의 영혼은 주소유의 말로를 본 뒤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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