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76)화 (376/449)
  • 외전 구염상 1-25

    “큰형님, 제발 제 얘기를 들어 보세요.”

    언제나 웃음을 띠고 있던 헌원씨 가문 셋째의 얼굴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준수하던 풍채마저 흐트러진 그가 자신의 방을 찾아온 큰형님을 마주했다. 큰형님은 냉정한 모습으로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형수님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 항상 시중을 드는 시녀들과 함께였다. 게다가 자신 역시 주변에 항상 사람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셋째는 큰형님에게 명확하게 설명하기만 하면 될 일이라고, 형님은 절대로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큰형님, 제가 한 말은 모두 진실이에요. 저는 한 번도 사사로이 형수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헌원사사는 뒷짐을 진 채 말없이 오래도록 서 있었다. 어린 시절 언제나 자신의 뒤를 쫓아다니며 큰형님을 외치던 사내아이는 오늘 이렇게 경솔한 태도로 자신의 앞에 선 채 잘못을 시인하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가문이 대체 어찌 되려고…….’

    헌원사사는 돌연 서늘해지는 등줄기와 함께 무기력함을 느꼈다. 불과 이 년 사이, 정말로 이 저택이 과거 가족들이 서로 힘을 합하고 웃음소리가 넘쳐나던 곳이 맞는지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헌원사사는 다급히 초조한 감정을 거둬들였다. 아우의 애타는 변명을 들으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셋째는 예상대로 큰형님이 바깥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믿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한 모습일 리 없었다.

    물론 헌원사사는 그 소문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설명을 하고 있는 셋째의 말을 불쑥 끊었다.

    “알겠으니, 이제 그 그림을 내게 주거라.”

    순간 셋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형님! 지금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믿는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니 어서 그림을 내놔!”

    헌원사사는 매우 확고했다. 셋째에게 구염상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는 절대 이 사실을 용인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큰형님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정성껏 설명을 하던 셋째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그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큰형님, 어찌 저를 믿지 못 하신단 말입니까!”

    헌원사사가 의아한 눈빛으로 셋째를 바라보았다. 줄곧 고분고분하던 아우가 거짓말을 하다니?

    ‘그 그림 때문에 나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헌원사사의 마음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문득 바깥에 떠도는 유언비어들이 반드시 틀린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셋째가 상아를 좋아한다는 그 부분만큼은 진짜일 가능성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헌원사사가 순간 비틀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정말로 사실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 그런데 셋째가 정말 형수를…….

    절대로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던 헌원사사가 분노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당장 내놓지 못 해?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게냐!”

    셋째는 분노한 큰형님을 보며 어차피 숨겨 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형님이 자신의 마지막 체면조차 살려 주지 않는다면 그에게도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셋째가 즉시 분노에 찬 눈길로 형님을 쳐다보았다.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왜 모르겠습니까? 대체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저 그림 한 점일 뿐입니다. 마음이 가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뿐인데, 그게 뭐가 그리 잘못입니까? 제가 형수님께 말을 한 마디 더 했습니까, 아니면 큰형님의 생활을 방해했습니까? 어머니께서 뜬금없이 이 일을 거론하지만 않았더라도……!

    큰형님, 대체 제 사랑이 뭘 어쨌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저 혼자만 사랑하겠다는데, 이것이 대체 형님네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셋째는 헌원사사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저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다른 사람이 알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방에서 그 그림을 본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셋째의 표정이 돌연 일그러졌다.

    “…상 공주가 형수님이 되는 그 순간, 저는 이미 그 그림을 훼손시켰다고요…….”

    “…….”

    “제가 어찌 그 그림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누군가가 보게 되면 즉시 형수님의 행실을 공격할 만한 빌미가 될 텐데요.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셋째가 허탈하게 웃었다.

    “제가 지금 남겨 둔 것은 그림의 표지일 뿐, 인물은 사라진 지 오래됐습니다. 저는 그저… 그저 형님께서 저를 찾아와 그림을 달라고 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 했습니다.

    형님, 어찌 그리 자신이 없어지신 겁니까? 설마 다른 사람이 형수님을 빼앗아 갈까 두려우세요? 형님의 나약함이 두 분의 아이를 해친 살인자를 내버려 둔 것도 모자라 지금 그 칼날을 형수님께 겨누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형수님이 알게 될까 두려우신 거예요?

    형님은 아무 것도 못하고 계시잖아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계시잖아요! 형님은 그녀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어요!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제가 먼저였어요……. 제가 형님보다 먼저 구염상을 보았고, 먼저 사랑했다고요. 그런데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건 형님이었죠.

    그녀가 폐후의 딸일 거라고, 그 지독한 여인의 핏줄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러니 연경에서 그림 속 여인을 사랑하게 됐던 모두가 다 잘못 짚은 거죠. 다들 형님을 증오하고 있어요. 단지 예락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기 위해 그녀를 방패로 쓰고는, 심지어 이런 집안으로 끌어와 그녀를 나락에 떨어뜨렸잖아요!

    형님만 아니었다면! 형님과 어머니가 그토록 이기적이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그 해 연회에 얼굴을 드러냈을 테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좇는 여인이 되었겠죠. 저는 장담할 수 있어요. 설령 이미 형님과 혼담이 오갔었다고 해도 결코 막지 못했을 거예요. 그녀를 사모하게 된 수많은 가문에서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 집안과 체면을 불사하고 다투었겠죠! 그런데!

    다 어머니의 이기심 때문이에요. 상 공주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먼저 알게 된 어머니께서 황후를 움직여 사람들 앞에 공주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수를 썼기 때문에, 형님은 어부지리로 부마가 된 거라고요! 그런데 그런 상 공주를 집에 데려다 놓고 형님과 어머니는 대체 어떻게 대하셨어요? 말해 보세요, 형님. 어디 한 번 말해 보시라고요!”

    셋째는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는 큰형님을 노려보았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기등등하게 소리를 질렀다.

    “형님이 누구도 아내로 맞이하려 하지 않는 상 공주를 구원해 줬다고 생각하세요? 천만에요! 심지어 폐후조차도 그 대단한 부마의 덕을 요만큼도 보지 못했어요. 형님은 최소한 이 알량한 가문의 힘을 빌려 무언가를 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요!

    그러니 형님은 절대로 그녀의 구원자가 아니에요. 이 가문은 더더욱 아니고요! 형님은 상 공주에게 계속되는 어머니의 괴롭힘을 참고 견디라고 말할 자격이 없어요!”

    줄곧 고통을 억누르고 있던 헌원사사 역시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 새빨개진 눈으로 조급한 얼굴을 한 그의 처량하고 슬픈 목소리가 갈라졌다.

    “입 닥치거라! 네가 뭘 아느냐! 네가… 네가 뭘 안다고……!”

    고통에 못 이긴 헌원사사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과거 품위와 자신감이 넘치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셋째보다 훨씬 괴로워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담겨 있었다.

    “내가 어찌 할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병세가 위중하여 더 이상 충격을 받으시면 아니 된다. 그런데 내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도대체 내가 어찌해야…….”

    셋째는 바닥에 주저앉은 큰형님에게서 무거운 짐에 짓눌려 모든 것이 무너진 사내를 보았다. 그는 형님을 계속해서 비난할 자신이 없어졌다.

    형님이라고 어찌 지옥이 아니겠는가. 어머니는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헌원사사는 구염상에게 어쩔 수 없이 한 번만, 또 한 번만 더 어머니를 참고 견뎌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주소유는 계속해 구염상에 대한 비방을 멈추지 않았고 헌원사사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차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은 오죽했을까.

    두 형제는 상처 앞에 고통스럽게 웅크린 채 서로 다른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발버둥쳤다.

    두 형제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방 안에는 구염상이 있었다. 그녀는 주소유가 와르르 무너진 채 대성통곡을 하며 바닥에 검붉은 피를 토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지난번 어머니께서 제게 쓰려던 방법을 역으로 제가 돌려드려 보았습니다. 어때요, 재미있지요?”

    구염상이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듯 늙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누더기 천 같은 몸을 한 주소유는 현재 말로 다할 수 없이 병세가 위중한 상태였다.

    “저는 지금까지 상공이 이렇게 무능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저는 어찌 이렇게 순진하고 나약한 남자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일까요? 아, 아니지… 제가 어머니의 아들을 이리 비난해서는 아니 되지요. 어머니의 아들은 순전히 저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부 관계에서 이런 고통을 선택한 것이니까요.”

    구염상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헌데 저는 전혀 필요가 없는데 어쩌지요? 어머, 부인, 왜 그러세요? 어디가 불편하세요? 그런데 아직은 죽지 마세요.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적장자가 과연 어디까지 나약해질 수 있는지 아직 다 보지 못 하셨잖아요. 이렇게 편히 돌아가시면 아니 됩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는 손주라면 앞으로 차고 넘칠 거라고 제 앞에서 떵떵거리셨는데…….

    하하, 과연 다들 효자들이로군요. 대체 누구에게 먼저 손을 대야 어머니를 더 즐겁게 해 드릴지 모를 정도예요. …여봐라, 부인을 모시고 물러가라! 매일같이 욕설을 지껄이는 건, 어차피 앞으로 말을 하지 못 하게 될 테니 그냥 내버려 둬도 상관없다.”

    분노한 주소유가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으로 구염상을 가리켰다. 그녀의 눈에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두 아들을 향한 슬픔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주소유의 자랑이었다. 천하를 아우르며 높은 관직을 꿈꾸던, 세상의 그 어떤 어머니라도 자랑스러워할 만한 그런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뛰어나던 자식들이 자신과 구염상 때문에 희생자가 되었다. 위중한 병세로 인해 자리보전을 할 수밖에 없던 주소유는 방금 옆방에서 싸움을 벌인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내 아들들이라니… 내 아들들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