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75)화 (375/449)

외전 구염상 1-24

“어머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과라도 좀 드시겠어요? 제가 깎아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구염상의 입가에 비아냥거리는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소쿠리에 담긴 사과를 제법 그럴 듯하게 깎으며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저를 싫어하신다는 걸 압니다. 연유를 알 수는 없으나 저는 더 이상 어머니께 저를 어여삐 여겨 주십사 강요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마 어머니는 모르시겠지만, 막 헌원씨 가문에 시집을 왔을 때 저는 이 저택이 조금도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상공을 살뜰히 돌보아 주시는 걸 보면서 언젠가 어머니께서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대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이렇게 부드럽고, 현명할 수 있다는 걸 몰랐거든요.”

구염상은 씁쓸한 듯 웃었다.

“다 제가 변변치 못한 탓이지요. 상공에게 아들딸을 낳아줄 수도 없으니……. 만약 그날 제가 정자에 가지 않았다면, 햇볕을 쬐러 가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머니께서 저를 싫어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들을 위해 아이를 낳아 줄 수 있는 첩을 들이려 하신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다 제 탓입니다. 제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린 탓이에요. 하지만 비록 저와 어머니가 친 모녀지간은 아닐지라도, 다른 시어머니와 며느리처럼 평화롭게 예의를 지키며 지낼 수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심지어 한 번도 어머니와 아버님께 깍듯이 공주에 대한 예를 갖추도록 명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이제야 저도 깨달았어요. 제가 어떻게 행동하든 어머니께서는 결코 저를 좋아하시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요……. 기왕에 좋아하실 수 없다면 마음이라도 편하도록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지내면 안 될까요? 어머니, 저는 상공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상공은 어머니와 저 때문에 요즘 웃을 일이 없어 보입니다. 만약 어머니께서 정말로 상공에게 첩을 들여 주고 싶으신 거라면, 그래야만 이 며느리를 놓고 아들 내외의 삶이 평온해지도록 해 주실 요량이시라면… 좋습니다. 어머니 뜻에 따르겠어요. 상공에게 첩을 들여 주세요. 저는 그저 어머니께서 상공을 마음 편히 놓아주시길…….”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은백색 옷을 입은 사내가 들어와 구염상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아니, 싫소!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니, 나는 그 누구도 들이지 않을 겁니다! 부인, 우리 같이 어머니께 청합시다. 제발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구염상은 다정한 눈빛으로 헌원사사를 응시했다. 눈에 감동의 눈물이 반짝였다.

“하지만…….”

헌원사사는 온갖 수난을 당한 이 연약한 여인을 마치 보호하둣 품에 끌어안았다.

“안심해요. 당신이 나를 위해 이러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나는 필요 없어요. 나에게 다른 여인은 필요 없단 말입니다! 자, 우리 같이 어머니께 청합시다.”

말을 마친 헌원사사가 사랑하는 이의 손을 꼭 잡고 꿇어앉았다. 두 사람의 앞에는 사색이 된 주소유가 있었다.

“어머니, 저는…….”

화가 난 주소유가 옥침을 들어 구염상을 내리쳤다. 하지만 옥침은 헌원사사의 허리에 떨어졌다.

즉시 남편에게 달려든 구염상이 소리 내어 통곡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등진 채 주소유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이를 본 주소유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통에 몸부림쳤다. 다시 주소유에게로 달려간 구염상이 시어머니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다급히 뒤따라 들어온 시동생들을 향해 어서 의원을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잠시 뒤, 방 안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구염상이 주소유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또 실패를 하시다니요? 과연 누가 저에게 소식을 알렸는지 맞혀 보세요. 대체 주변에서 누가 어머니를 배반했는지 말입니다. 이 은혜를 제가 어떻게 보답해 드려야 할지……. 아아, 이번에는 셋째 도련님을 건드려 볼까요? 셋째에게 본 공주의 초상화가 있다더군요. 심지어 매일 보물처럼 지키고 있다고 하던데… 설마 셋째 도련님은 그림을 지키듯 본 공주를 보호해 주려는 걸까요?”

주소유는 결국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뒤, 주소유가 큰소리로 셋째를 불렀다. 일그러진 얼굴로 셋째의 손을 그러쥔 주소유가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설마 네 형수를 마음에 두고 있느냐? 당장 태워라! 그 그림을 태워 버리란 말이다!”

창백해지는 셋째의 안색을 본 주소유는 마치 엄청난 망신을 당한 양 손발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문득 주소유는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남편의 당황한 시선과 일순간 고개를 숙인 두 명의 태의, 그리고 방 안을 채운 사람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이 서늘해진 주소유의 안색이 일시에 어두워졌다.

‘끝장이다……. 모든 게 끝났어!’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주소유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죠? 저는 아무 말도 안 한 거예요……!”

일순간 흉악한 눈빛으로 돌변한 주소유가 헌원상의 손을 잡고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이자들을 모두 죽여요! 다 죽이라고!”

헌원상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 사람도 남기지 말아라!”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궁에서 나온 두 명의 태의와 약동藥童, 그리고 넷째와 다섯째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

구염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제 명성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명성 따위는 사라져도 상관없었다. 누구를 위해 머물러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며 별거 아닌 명예에 연연할 필요는 없으니까.

헌원씨 가문의 셋째 공자와 그의 형수인 상 공주 사이에 애매한 일이 있다는 소문은 연경 바닥에 제법 생생하면서도 그럴 듯하게 퍼져 나갔다. 셋째가 형수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몰래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상 공주의 초상화를 시녀가 발견했다더라, 야심한 밤 당직을 서던 시녀의 눈에 셋째가 혼자 초상화를 아련하게 쓰다듬으며 대역무도하게도 상 공주의 이름을 부르더라는 이야기 등등.

뜬구름을 잡는 소문이 갈수록 늘어났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과거 헌원 씨 가문의 셋째 공자가 형수님에게 선물로 준 오래된 금을 구할 당시의 우여곡절을 더욱 과장하여 흥미진진하게 퍼뜨리기도 했다. 그것이 마치 셋째 공자가 형수를 사랑한다는, 지울 수 없는 증거인 것처럼.

헌원상의 비대한 몸은 최근 가문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로 인하여 마치 끊어진 연처럼 힘을 잃었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고,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주던 아내마저 앓아 눕자 조정에서까지 몇 차례 큰 실수를 저지른 상태였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헌원씨 가문의 마지막 보루마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헌원씨 가문에 관한 유언비어는 겨울철 흩날리는 눈처럼 순식간에 연경의 하늘을 뒤덮었다.

사람이란 본래 근질거리는 입을 주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소문과는 다른 현숙한 며느리를 맞이하여 교만해진 헌원씨 가문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싶은 탓이었을까. 시동생이 형수님을 사모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마구잡이로 퍼져나갔다.

누구도 이 소문에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가히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셋째가 상 공주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진 데에는 다 그만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특히 헌원씨 가문 안주인의 명성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감히 시동생이 형수를 불순한 눈으로 바라보다니? 이건 가문에서 제대로 자녀들을 교육시키지 못 한 탓이었다. 거기에 막내 아가씨의 파혼은 헌원씨 가문의 가풍을 헐뜯을 수 있는 유력한 증거가 되었다.

헌원씨 가문은 혼담을 건네는 데 있어 모든 가문의 기피 대상이 되었다. 불과 삼 년 전 사람들이 앞다투어 혼약을 청하던 상황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였다. 심지어 줄곧 시누이에게 혼사를 종용하던 주소유의 올케 장 씨마저도 딸 리아에게 앞으로 헌원사사의 이름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중병이 들어 병상에 누워 있던 주소유는 시녀가 전전긍긍하며 전하는 보고를 들은 뒤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처참한 얼굴에는 증오와 고통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반평생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계집의 손에서 무너졌다.

“하하… 하하하!”

울음 섞인 주소유의 웃음에서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상냥하고 선량한 구염상, 폐후와는 다른 그 딸이 불쌍하다고? 오늘날 헌원씨 가문을 이 지경까지 무너뜨리고, 남은 여생 동안 누리려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그 계집이 불쌍해?’

갑자기 밑에 깔린 이불을 꽉 쥔 주소유가 흉악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구염상, 네 이년! 너는 결코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이 천벌을 받을… 컥! 쿨럭!”

“큰일 났어요! 큰일이요! 부인께서 피를 토하셨어요! 부인께서 피를 토하셨다고요! 어서 도와주세요!”

* * *

봉익은 구염상을 만나고 싶었다. 대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기에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명성조차 개의치 않고, 심지어 이를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상 공주는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는 것일까? 이제 주변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봉익은 구염상이 느끼는 외로움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평소 말과 행동을 삼가는 그녀가 어찌하여 남편조차 믿지 못한 채,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위해 홀로 싸우고 있는 걸까.

비록 구염상은 자신의 명성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봉익은 달랐다. 봉익은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구염상보다도 그녀를 그리 움직이게 만든 부정적인 감정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렇기에 봉익은 헌원 노부인이 구염상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헌원 노부인은 어찌 그리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주 씨는 구염상의 일생과 모든 희망을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 심지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실의 자리까지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솔직히 말해, 봉익에게는 구염상이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았다면 더 놀라울 일이었다.

오늘날 숨가쁘게 돌아가는 상황을 봉익은 더욱 빨리 받아들였다. 구염상은 부드러운 외형과 달리 고집이 아주 셌기 때문에 그녀를 흔드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마도 상 공주는 특수한 유년 시절로 인해 착하지만 결코 우유부단하지 않은 성격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그녀는 폐후보다 목표 설정이 더욱 명확했고, 한 번 결정한 일은 신속하게 처리했다. 그녀는 적을 처리할 때 절대 모후처럼 대충 간지럽히다 마는 수준이 아닌, 정확한 치명상을 입혔다.

헌원 노부인은 오래 살지 못할 터였다. 구염상은 시어머니가 고통 받는 표정을 모두 지켜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작은 호의나마 베풀어 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봉익은 자신도 모르게 서방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초상화를 꺼내어 펼쳤다. 궁에 있는 상 공주를 그린 것으로, 다른 초상화들과는 다른 그림이었다.

그림 속 소녀는 뻣뻣한 회색 옷을 입고, 억울하지만 차마 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눈빛으로 소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치 소매 사이로 자신이 싫어하는 물건들이 넣어질까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봉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긴장해 있는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음이 확실히 부드러워졌다.

봉익은 헌원씨 가문의 셋째 역시 자신과 같은 심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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