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74)화 (374/449)
  • 외전 구염상 1-23

    주소유는 심장을 후벼 파는 고통을 느꼈다. 분노에 찬 눈빛은 더욱 흉악해졌고, 초췌한 얼굴은 온통 노기로 가득했다. 원망으로 똘똘 뭉친 주소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마치 웃음거리를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며느리를 귀신처럼 노려보았다. 구염상은 마치 자신이 세운 만반의 계획을 조롱하듯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냐,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다 구염상 저 요녀의 잘못이야… 그러니 저 계집은 죽어야만 해. 그러면 사사는 여전히 내 말에 죽는 시늉까지 하는 착한 아들일 테고, 누구나 그런 아들을 둔 날 부러워할 거야! 구염상 저 계집은 반드시 죽어야 해!’

    일순간 흉악한 눈빛을 보인 주소유가 바닥에 놓여 있는 화병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오싹한 표정으로 돌연 구염상을 향해 화병을 던졌다.

    퍽!

    “아악!”

    “도련님!”

    집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꺅! 둘째 도련님이 피를 흘리십니다! 어서, 어서 의원을 부르세요!”

    구염상은 헌원사책의 품에 안겨 있었다. 구염상을 보호하는 그의 이마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매우 섬뜩한 광경이었다.

    헌원사책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두 여인 모두 그가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헌원사책은 형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분명 이 가문이 그녀에게 잘못하지 않았던가. 갖은 꾀를 부려 고귀한 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해 놓고 이렇게나 박대하다니!

    ‘어머니께서 어찌 형수님을 죽이려 든단 말인가! 어찌 이럴 수가 있어!’

    놀란 주소유가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피 흘리는 아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저히 믿지 못 하겠다는 듯 멍하기 그지없었다.

    ‘아냐…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구염상에게 던진 거야… 헌데 어찌 내 아들이 다친 거야!’

    눈 깜짝할 사이 두 사람에게 달려든 주소유가 아들의 품에서 구염상을 끌어냈다. 그 순간 그녀는 구염상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 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아들을 품에 안은 주소유가 피가 멈출 기미가 없는 아들의 머리를 허겁지겁 틀어막았다.

    “괜찮다… 이 어미가 있으니 괜찮다. 사책아, 괜찮아…….”

    주소유의 두 손이 순식간에 선혈로 물들었다.

    “의원… 의원! 내 아들을 살려 줘……. 어서 내 아들을 살려 내란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초점 없이 주소유를 바라보던 구염상이 조용히 주소유의 귓가에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자업자득.”

    순간 이성을 잃은 주소유가 미친 듯이 구염상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그 서슬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던 헌원사책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큰소리를 냈다. 계속해 어머니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던 헌원사책은 무어라 채 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놀란 주소유가 아들을 껴안으며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냈다.

    복잡한 눈빛으로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한 번 쳐다본 구염상은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구염상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후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잔인했다. 어머니가 이를 대놓고 드러낸 것에 비해 그녀는 줄곧 위선적이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만약 그럴 만한 이유가 주어진다면 구염상은 모후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었다.

    구염상은 씁쓸함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 스스로와 지금 이 상황을 비웃었다. 자신은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헌원사책의 상처는 심각했다. 머리에 중상을 입은 데다 의식을 잃은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의원은 앞으로 일상생활이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내렸다.

    의원의 말을 증명하듯 의식을 되찾은 헌원사책의 눈은 멍하니 생기가 없었다. 의원은 조금만 회복하면 괜찮을 거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헌원사책의 반응이 느려졌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가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옆에 두고는 돌아서자마자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장군인 헌원사책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헌원씨 가문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이 사실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대책을 마련하려던 부모의 뜻과 달리 헌원사책은 이 사실을 자발적으로 상부에 보고한 후, 관직에서 물러나 별 볼 일 없는 관청에 들어갔다.

    비록 둘째의 부상으로 첫째가 집을 떠나지는 못했으나, 첫째와 둘째 아들이 모두 관직에서 물러난 헌원씨 가문은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처럼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자칫하면 가문이 와르르 무너질 위기였다.

    생각지 못한 결과에 고통스러워하던 주소유는 병환이 깊어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빠르게 여위어 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구염상을 욕하며, 제 명에 죽지 못할 거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이 정도로 끝났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헌원씨 가문 내부의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도유망한 두 아들은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도 모자라 직접 황제에게 사직원을 제출했다. 심지어 둘째 헌원사책은 개인적인 이유로 다시는 전장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헌원씨 가문의 셋째와 넷째는 겨우 관직을 보전했다. 아직 어린 다섯째는 이제 겨우 1차 과거 시험에 합격한 풋내기에 불과했다.

    여섯째는 황자와 혼담이 오가고 있었으나, 황제가 좀처럼 마음을 돌리지 않아 태자 책봉에는 기약이 없었다.

    헌원상은 사실 본인의 실력에 의해 대사마란 지위까지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름을 날린 전투는 모두 황제가 헌원상의 면을 세워 주기 위해 부관에게 대신 싸우도록 하여 얻은 가짜 승리였다.

    전장에서 헌원상은 그저 탁자 아래 숨어 먹기에만 급급했을 뿐, 실질적인 공은 모두 장서전이나 당자와 같이 실력을 갖췄으나 인정받지 못한 인재들이 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식들이 문무의 요직을 모두 잃자 조정과 연경에서 헌원씨 가문의 존재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미미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황제의 총애 외에는 별 볼 일 없던 가문이었으니 대신들이 가차 없이 구는 것도 당연했다. 이들 가문이 중요할 리가 없지 않은가.

    본래 명문가일수록 대대로 이어지는 혈통을 중시하는 법이다. 헌원씨 가문은 헌원상의 부친인 헌원오마 대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헌원상에 이르러 겨우 2대째 체면을 세웠으니, 대대손손 이름을 떨쳐 온 진정한 명문가에서 이들 가문을 인정할 리 만무했다. 대사마가 된 헌원상은 콧대 높은 세도가에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일개 농신弄臣(임금의 놀이 상대가 되는 신하)에 불과했다.

    변화는 금세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소 주소유를 만나러 오던 명문세가 부녀자들의 방문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과거 공손한 태도로 일관하던 고명 부인들 역시 고개를 빳빳이 세우며 툭툭 말을 내뱉었다. 이들은 심지어 주소유가 좋아하는 정교한 수예품을 지적하며 입방아를 찧었는데, 살림이 좀 부유해졌다고 없는 사람들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훈계조였다.

    원체 예민한 성정을 가진 주소유는 치솟는 화로 인해 점점 더 쇠약해져 갔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가슴에 쌓인 분노를 꾹 억누르며 정작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이지 못하니, 오히려 스스로를 괴롭히다 반쯤 죽게 된 형국이었다.

    이씨 가문에서 헌원사책과의 혼약을 파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때, 주소유는 죽을 힘을 다해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는 구염상을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헌원사책이 파혼 당한 뒤, 구염상은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하여 아픈 시어머니를 보러 왔다. 병이 난 시어머니가 나날이 초췌해져 바싹 시들어 있는 것에 비해 몸을 회복한 구염상의 뽀얗고 부드러운 살결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른 주소유는 구염상의 존재만으로 또 다시 까무라쳤다.

    여섯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생사를 오가는 아픈 어머니를 본 그녀가 원망에 휩싸여 구염상과 싸우기 시작했다.

    사실 싸움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상황이었다. 계속해 도발을 시도하던 여섯째는 있는 힘껏 발을 구르며 구염상을 저주했으나 그대로 하인들에 의해 저지당한 채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 했다.

    좋은 일은 문밖으로 나가지 못 하지만, 나쁜 일은 천 리까지 전해진다. 연경에는 헌원씨 가문의 막내 아가씨가 교양이 부족하고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소문과 함께, 그녀가 올케에게 욕설을 퍼부을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들을 잔인하게 해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간 별 걱정을 하지 않던 황궁의 귀인이 헌원씨 가문에 파혼을 통보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파혼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현재 황실에는 황자가 곧 국보일 정도로 귀했다. 상대가 신하의 자식이라면 파혼은커녕, 실수로 죽였다고 해도 죄를 물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막내의 파혼은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주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딸이 파혼을 당했단 얘기를 듣고도 구염상을 찾아가 큰소리를 내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구염상이 염장을 지르러 찾아왔을 때, 주소유는 표정 없는 창백한 얼굴로 한 마디만을 던졌다.

    “네가 한 짓이지? 여섯째에 대해 그런 악독한 소문을 퍼뜨리다니, 어찌 그리 심보가 못된 것이냐?”

    구염상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아주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날로 수척해지는 주소유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

    “어찌 그런 속상한 말씀을 하십니까. 본 공주가 한 말에 거슬리는 점이 있으셨다면 말을 전한 이에게 고치라 할 터이니,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주소유는 웃고 있는 구염상을 노려보며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 뼈만 남은 손을 꽉 쥔 그녀가 속으로 자제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잠시 후면 몰래 부른 아들들이 옆방에 도착할 것이다. 어쩌면 이미 도착해 있을지도 몰랐다.

    주소유는 반드시 구염상의 진면목을 폭로하고자 했다. 모든 식구들에게 구염상이 얼마나 악독한지, 이 악독한 계집이 가문을 어느 지경까지 파탄 냈는지 낱낱이 알려야 했다.

    ‘내 아들들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한 것도 모자라 여섯째까지 망치려 해? 우리 가문 전체를 박복한 네 년과 함께 끌어내리려는 것이냐? 어림없는 소리!’

    주소유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과거 예리했던 눈썰미는 병세가 중해지며 이미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 내면서도 가문이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어디 한 번 말해 보거라. 대체 어찌해야 그만둘 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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