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1-21
구염상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은 멈춰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크나큰 모욕감을 참고 있는 것처럼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헌원사사가 다가가 위로하기도 전에 구염상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헌원사사는 다급히 구염상을 쫓아 나갔다. 누구라도 누이동생의 말을 들으면 견디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하물며 자존심이 센 부인이 견딜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헌원사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급히 부인을 쫓아 나갔다.
셋째는 다급히 형수님을 쫓아 나가는 큰형님의 뒷모습을 보며 순간적으로 강렬한 호기심에 휩싸였다. 대체 큰형님과 어머니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기에 오늘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일까?
‘형수님 때문인가?’
셋째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형수님은 평소 말수도 적었고, 특히 얼마 전까지 폐후의 일로 바쁘게 뛰어다니다 이제 겨우 상황이 정리 되어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딱히 어머니와 갈등을 일으킬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 때문에 큰형님과 어머니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일까…….’
게다가 어머니는 형수님을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 * *
의식을 회복한 주소유는 모든 아들이 다 모인 가운데 첫째만 보이지 않자 분노하여 하마터면 다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
아내가 걱정된 헌원상이 말했다.
“첫째는 떠나지 않았으니 마음을 편하게, 그저 편하게 가지시오. 첫째는 의원을 배웅하러 갔소.”
혹시나 주소유가 잘못될까 염려한 헌원상은 조금 전 벌어진 소동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다.
이번 일을 겪으며 구염상을 향한 주소유의 증오심은 더욱 커졌다. 심지어 둘째가 ‘화근’이라는 단어 때문에 여섯째를 가두고 금족령을 내렸다는 소식에 주소유는 솟구치는 분노로 인하여 뒤로 넘어갈 뻔했다.
“당장 그 불효자를 불러오너라!”
헌원사책은 금방 도착했다. 그는 찻잔이 날아오는 걸 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머니가 얼굴에 던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몸을 스치며 먼 곳으로 날아간 찻잔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헌원사책은 울화가 치미는 동시에 마음이 아팠다. 선한 본성을 지닌 어머니에게 대체 무슨 사악한 기운이 씐 걸까. 어머니는 기필코 형수님과 결판을 낼 심산이었다.
“네가 정녕 미친 게냐? 네 누이동생은 엄연히 정혼까지 한 몸인데 이런 식으로 벌을 주다니! 이 소문이 밖에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우리 헌원씨 가문이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
“어머니, 어머니께서 사정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섯째는 응당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입니다. 앞으로 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지 않도록 단속해야 하니까요!”
주소유는 듣지 않았다.
“당장 금족령을 풀어라. 아직 너는 이 집안에서 결정권이 없다.”
헌원사책은 어머니가 누이동생을 풀어 주리라는 걸, 그리고 자신은 그 결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개입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그저 좋은 말로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어머니, 리아부터 돌려보내시지요. 이 집안에서 리아를 보는 형수님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미 집안에는 견디기 힘든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게다가 형수님은 모후라는 커다란 버팀목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 어머니의 박대는 형수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분명했다.
헌원사책의 말에 결국 주소유가 폭발했다.
“어찌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안채에서 벌어진 일이다. 어디 네가 관여할 일이더냐? 황제 폐하를 잘 보필하여 성실하게 네 할 일을 하고, 한시라도 빨리 이씨 가문 아가씨와 혼인하는 것이야말로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이 어미가 있는 한 네가 쓸데없이 집안일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헌원사책 역시 안채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어머니가 옳지 않았다.
“어머니, 아랫것들이 수군대는 이야기가 얼마나 귀에 거슬리는지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대관절 리아가 여기 머물며 굳이 어머니의 수발을 들 이유가 무엇입니까! 머지않아 리아도 혼인하여 제 가정을 이뤄야 하는데, 어머니께서 이리 하시는 건 분명 좋지 않습니다.”
주소유가 대답했다.
“뭐가 좋지 않다는 게냐? 정 그러면 네 형이 리아를 부인으로 맞이하면 그만이다. 나쁠 게 뭐가 있느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헌원사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형님과 형수님의 금슬이 얼마나 좋은데 그런 형님에게 첩을 들이라니요, 형수님이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어머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 공주가 이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지, 헌원사책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큰형님은 지금 상 공주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찌 상 공주의 유일한 위로를 빼앗겠다는 것인가!
헌원사책은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문득 지금까지 감히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던 마음 속 깊은 목소리가 어슴푸레하게 머리를 내밀었다.
‘만약… 만약에 큰형님이 상 공주를 놓아준다면, 그때는 나에게도 기회가…….’
즉시 머릿속을 떠도는 더러운 생각을 없앤 헌원사책은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 *
주소유와 헌원사사는 철저히 틀어졌다. 비록 계획한 대로 나가지는 못했으나 헌원사사는 한 달에 두 번씩 갖던 가족 식사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주원에도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족들과 왕래를 끊자 사실상 분가한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었다.
헌원씨 가문의 분위기는 빠른 속도로 침체되어 갔다. 과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화목한 집안에는 메워지지 않는 균열이 생겼다.
하인들은 행동을 조심하고 삼갔으며, 헌원사사의 손님은 측원側院으로만 다니기 시작했다. 근거 없는 소문들이 순식간에 연경에 퍼졌다. 주소유가 엄하게 단속한 탓에 가족들은 빠르게 소식을 전해 듣지는 못했지만, 온갖 유언비어가 판을 치고 있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주소유로서는 유언비어를 듣는 것만으로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헌원상과 혼인한 이후 줄곧 순탄하기만 하던 삶이 어긋나고 있었다. 그녀는 일사천리로 일을 해결하고자 했다.
‘흥, 다들 씹을거리가 필요하다 이거지? 아주 원없이 떠들게 해 주마!’
주소유는 손을 썼다. 그렇게 바깥에 돌게 된 소문은 이러했다.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는 것을 안 상 공주는 주씨 가문의 적녀를 받아들이자고 했다. 그러나 시어머니 주소유는 공주의 청을 물리며, 비록 아이를 낳을 수 없다 해도 공주는 여전히 헌원씨 가문의 좋은 며느리라고 다독여 주었다. 공주는 울면서 주소유에게 청을 들어달라고 애원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주소유는 줄곧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단속했으나 사람들의 추측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인품 좋고 마음 여린 상 공주가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데다 모후라는 세력까지 잃었으니 첩을 들이자고 부마를 설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 *
“공주 전하, 셋째 공자께서 그 일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구염상은 포도나무 받침대 아래 앉아 침착한 표정으로 책을 뒤적였다.
“증거를 넘겨주도록 해라.”
“네.”
헌원씨 가문의 셋째는 경악했다. 어머니가 이런 일까지 하셨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유산된 아이는 어머니에게 백방으로 효도하는 상 공주의 아이이자 어머니의 손자였다. 그런데 가장 악독한 방식으로 상 공주를 망가뜨리다니!
심지어 지금 연경에는 해괴한 유언비어까지 퍼지고 있었다. 그는 대체 어머니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셋째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모두를 죽여 없앴다. 뛰어나고 대범한 자의 행동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서웠다. 심지어 언제나 주소유를 옆에서 모시던 시녀까지 제거되었다.
주소유는 즉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셋째 아들이 처음으로 엄격하게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누구도 이 일을 다시 언급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어머니도 상 공주에 대한 압박을 즉각 멈추시고, 앞으로는 큰형님이 하시는 일에 일절 관여하지 마십시오!”
상황상 더는 속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주소유는 가장 아끼는 아들을 옆으로 오게 하여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다 네 형님이 잘 되라고 한 일이다. 이 어미는…….”
그러나 셋째는 듣지 않았다.
“리아를 돌려보내십시오.”
“안 된다.”
“어머니께서 안 보내시면 제가 보냅니다.”
셋째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설마 어머니께서 절망하여 망연자실해 있는 며느리를, 볼 때마다 점점 더 헐렁해지는 그녀의 옷을 보지 못 했을 리 없지 않은가. 지금 공주에게는 어머니에게 맞설 만한 힘도 없는데 어찌 어머니께서는 그녀를 용납하지 못 하시는 걸까……. 공주가 그리 야윈 것은 모두 어머니께서 고의적으로 해친 결과다. 어찌 그리 그녀를 싫어하신단 말인가!’
셋째는 어머니가 계속해 잘못된 선택을 하며 힘없는 공주에게 손을 뻗치는 걸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주소유는 셋째가 떠나려 하지 않는 조카딸을 강경하게 내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셋째는 어머니에게 방에서 안정을 취하라고 권하는 것과 동시에 형수님을 불러 어머니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형수님을 안심시킬 만한 말을 해 주라고 당부했다.
셋째는 당연히 상 공주가 어머니가 저지른 일을 모르고 있다고 여겼다. 그는 그저 어머니께서 잘못을 인정하고, 고부 간의 관계를 개선하여 다시 화목한 가족이 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셋째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철저히 사내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고, 따라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주소유가 구염상이 가져온 약사발을 손으로 쳐냈다. 뜨거운 약을 들고 있는 상 공주가 델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할 리가 없었다.
“안 마신다! 내 수발을 들러 올 필요도 없다. 정말로 효도가 하고 싶다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구염상은 손수건으로 옷소매를 툭툭 두드리며 쏟아진 약들을 닦아 냈다.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짓고 있던 무기력하고 조용한 표정이 갑자기 비꼬는 듯한 미소로 바뀌었다.
방 안의 하인들을 모두 물린 구염상이 융단 위에 떨어진 약사발을 다시 들었다. 닦지 않은 사발 그대로, 그녀가 다시 주소유를 위해 약을 가득 따랐다.
주소유는 깜짝 놀랐다. 평소 전혀 존재감이 없던 구염상이 갑자기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뭐… 뭘 하려는 것이냐? 나는 안 마신다. 어디서 더러운 그릇을…….”
구염상이 담담하게 웃었다.
“그래서요,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더 더러운 일도 하셨는데… 이런 보잘것없는 먼지는 별것도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