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1-20
“곧 출가할 여인이 그 무슨 망발이냐! 우리 헌원씨 가문에서 정녕 너를 이렇게 가르쳤다는 말이냐!”
헌원씨 가문의 여섯째가 지금껏 자신을 애지중지 아껴 주던 셋째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이러한 질책을 받아본 적이 없던 그녀의 눈에 즉시 눈물이 고였다.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까지 저에게 어찌, 어찌…….”
여섯째는 크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 어머니에게 통곡하며 하소연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우같은 계집 때문에 그동안 자신을 제일 아껴 주던 셋째 오라버니조차 더 이상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소동을 지켜 본 구염상은 쓴웃음을 지은 후, 어쩔 수 없이 인사를 고하고 물러나왔다.
헌원사책과 셋째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형수님과 상관없는 일이다’, ‘형수님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누이동생이 철이 없어 그런 것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 등의 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누이동생과 함께 흐느끼며 상 공주를 모욕하느라 적개심을 불태우자 둘은 도저히 입을 뗄 면목이 없었다.
넷째와 다섯째 역시 자신들에게 잘해 주는 형수님이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어째서 형수님을 모욕하는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주원에서 나온 구염상은 그 안에서 벌어진 일이 마치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다시금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모처럼 마주한 햇빛 아래 구염상의 발걸음 역시 한결 경쾌해졌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헌원사사는 낮에 벌어진 일을 듣고 어두워진 얼굴로 곧장 주원으로 향했다. 그는 시중을 드는 하인들조차 무시한 채 직접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아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니 함부로 모함하지 마십시오! 저도 면목이라는 게 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저지른 그 엄청난 만행을 제가 어찌 감히 상아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소자, 헌원씨 가문의 마지막 남은 체면조차 지킬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헌원사사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놀란 주소유는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아들이 사람들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걸 보고 일단 안심했다.
헌원사사가 아무리 심하게 나온다 해도 주소유가 어머니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비록 저를 위해 한 일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아들은 부인을 위해 어머니를 사지로 내몰지 못할 것이며, 어머니가 부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더더욱 세상에 알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소유가 세상에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주소유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딸을 달래며 만면에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구염상이 아무리 남자의 환심을 산다 한들 어찌하겠는가. 그건 남편의 어머니가 자신이라는 사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직 솜털도 제대로 가시지 않은 어린 소녀가 어머니라는 이름이 지닌 우위를 이길 리 만무했다.
주소유는 반드시 구염상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감히 내 아들을 구슬려 나와 맞서도록 해? 네가 정녕 내 아들을 망칠 작정이로구나. 그래, 누가 누구를 먼저 망가뜨리는지 어디 두고 보자!’
주소유는 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 * *
다음날, 주씨 가문의 적녀가 고모의 병문안을 왔다. 밖에 서 있던 구염상은 쓸쓸하게 음식을 내려놓은 후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구염상은 주채를 빼고 약을 마신 뒤,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한동안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쓴 탓에 휴식을 취해야 했다.
비록 진상을 알게 된 남편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그래도 어머니에게 더 이상 심한 말을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구염상은 잘 알고 있었다. 헌원사사는 며칠간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후회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정도가 그의 한계일 것이다.
구염상은 빠르게 잠이 들었다.
하루 사이, 헌원씨 가문의 저택에는 무성한 소문이 나돌았다. 노부인이 조카인 주리아를 더 좋은 며느릿감으로 여기고 있으며, 공주는 오만한 데다 자식을 낳을 수 없기에 큰도련님도 이제 끝이라는 내용이었다. 아이도 가질 수 없는 며느리를 노부인이 싫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공주의 팔자가 아무리 좋다 한들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 좋은 일생을 누릴 목숨이 있어야지!
소문을 들은 주소유는 너무나 통쾌했다. 사실 멀쩡했으나, 그녀는 조카가 먹여 주는 쓴 약을 두 모금이나 더 마셨다. 누가 퍼뜨린 소문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마음에 쏙 들었다.
문득 주소유의 눈빛이 의뭉스럽게 변했다. 그녀는 구염상이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자식도 낳지 못할 그 몸뚱이로 과연 언제쯤 아들에게서 떨어질지!
구염상은 한동안 점점 더 수척해졌다. 헌원사사는 혼자 달을 보며 멍하니 서 있는 부인의 모습과, 이따금씩 한밤중에 잠에서 깬 부인이 얇은 옷을 걸친 채 창문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헌원사사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아이를 잃었다는 먹구름 속에서 빠져나온 뒤 부인은 한동안 잘 회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부인을 욕하는 저택 사람들과 사촌동생 주리아의 존재가 다시금 그녀에게 압박을 주고,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흐릿한 촛불을 통해 구염상의 허약한 모습을 바라본 헌원사사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일으킨 그가 얇은 겉옷을 들고 그녀에게 걸어갔다.
“부인, 우리 나가서 삽시다.”
부인은 마음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환경이 바뀌고 자신이 세심하게 보살펴 준다면 분명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구염상은 약간 놀란 모습이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어요? 부모님께서 여기 계시는데, 나가서 사는 건 도리가 아니지요.”
그러나 헌원사사는 분가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병이 난 척하던 주소유는 진짜로 화병이 났다. 큰아들이 자신의 뺨을 때리려 들지를 않는가! 정말로 큰아들 내외가 분가를 한다면 그녀는 앞으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분명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리라. 자세한 연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고부 사이에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있고, 자신이 아들과 며느리를 내쫓았다고 생각할 터였다.
특히 지금은 황후가 실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공주가 모든 재산을 빼앗긴 채 내쫓겼다고 한다면, 앞으로 주소유는 어디서도 체면치레를 할 수 없었다.
“감히 나가서 살겠다고? 내가 머리를 박고 죽는 걸 보여 주지!”
분노로 가득 찬 주소유는 열 몇 첩의 약을 먹고도 상태가 호전이 되지 않았다. 누렇게 뜬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서 과거의 혈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헌원사사는 더 이상 강경한 태도로 분가를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처소를 정리하고, 새로운 물건까지 모두 장만한 상황에서 정말로 기둥에 머리를 박은 어머니가 사흘 밤낮을 의식불명 상태로 있었다. 헌원 씨 가문의 의원은 원기가 상했으니 앞으로 안정을 취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침대 옆에 선 구염상은 누워서 힘겹게 숨을 쉬는 시어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주소유의 머리를 감은 붕대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속으로는 냉소가 나왔으나 겉으로는 슬픔을 참는 척, 말없이 눈물을 흘린 구염상이 계속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 제가 못난 탓입니다…….”
이 말에 즉시 발끈한 헌원씨 가문의 여섯째가 어디선가 빗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올케를 쫓아내기 위해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다.
“다 너 때문이야! 여기서 위선 떨고 있을 필요 없어! 지금 어머니가 너 같은 게 보고 싶겠어? 꼴도 보기 싫을 거라고! 네가 나가서 살자고 큰오라버니를 꾀어내지만 않았어도 어머니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 네가 화근이야! 네가 시집온 뒤로 우리 집안에 편한 날이 없었어! 나가, 당장 나가!
우리 사사 오라버니와 리아 언니야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네가 뭔데? 네 모친이 뻔뻔하게 억지를 부리며 너를 우리 가문에 시집보내지만 않았어도 지금 이 자리에는 예락 공주가 있었을 테고, 그게 화근인 너보다 백 배 나았을 거야!”
구염상은 일순간 몸과 마음이 다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섯째의 몸종이 초조하게 아가씨의 입을 막았지만 주인의 힘이 워낙 센 탓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구염상의 눈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었다.
‘계속 지껄여 보시지. 더 심한 말을 해야 그만큼 실수를 하지!’
주소유는 구염상에게 저지른 짓에 대해 절대로 떳떳할 수 없었다. 잠시 구염상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그녀는 곧 상처와 무력감을 회복했다.
의원을 데리고 온 헌원사사와 세 동생은 난장판이 된 집안을 목격했다. 하인들은 빗자루를 휘두르는 누이동생을 막고 있었고, 상 공주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헌원사사는 순간 가슴을 쥐어짜듯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한쪽은 그가 마음 깊이 사랑하는 여인이었고, 한쪽은 그의 가족이었다. 그에게는 양쪽 모두가 다 소중한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은 물과 불처럼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한쪽이 무고한 다른 쪽을 삼키려 했다.
‘대체 어찌하여 따스했던 집안이 이토록 독사와 맹수처럼 변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안쓰러운 소녀조차 용납해 주지 못하는 집이 되었단 말인가!’
걸음을 옮긴 헌원사책이 누이동생의 손에서 빗자루를 빼앗아 한쪽으로 던져 버렸다. 전장에서 쌓아온 막강한 기세와 웅장한 몸집이 누이동생의 앞을 막아섰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구나!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아느냐?”
거센 기운을 드러낸 헌원사책이 흉악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멍하니 서서 뭣들 하고 있는 게야! 어서 아가씨를 데리고 물러가라! 내가 분부하기 전까지 방문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충격에 휩싸인 여섯째가 건장한 하인들의 손에 잡힌 채 있는 힘껏 발버둥쳤다.
“둘째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의 누이동생이에요! 오라버니가 잡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저 여자라고요! 오라버니! 오라버니!”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둘째 오라버니의 모습에 순간 여섯째의 가슴 속에서 분노가 솟아올랐다.
“설마 오라버니도 저 여자에게 미혹된 거예요? 여우에게 홀려 정신을 잃은 거냐고요! 역시 궁에서 나온 것들 중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 악!”
순간 헌원사책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으나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서 아가씨를 데리고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