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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70)화 (370/449)
  • 외전 구염상 1-19

    좋은 핑곗거리를 찾은 주소유는 톡톡이 재미를 보았다. 그녀가 구염상에게 세 번째로 은자를 요구했을 때, 구염상은 아버지가 최소한 누군가의 간청으로 ‘폐후’라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황제는 폐후가 궁에서 천수를 누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언만큼은 승낙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주소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구염상은 봉익을 찾아가 부탁했고, 그녀를 위해 봉익은 권 승상丞相을 추천했다. 권 승상과 봉 노야는 충왕부의 세자와 함께 황제를 찾아가 읍소했지만, 손에 잡히는 대로 종이 한 장을 던진 황제는 더는 같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의 지위가 사라졌기에 망설일 수도 있었으나, 구염상은 더는 자신에게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황후의 딸이 아닌 그저 구염상일 뿐, 더 이상 인내할 필요가 없었다. 더는 착한 척하며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지도, 혹시나 잘못하여 어머니가 창피를 당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구염상의 눈에 주소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주소유의 아들, 헌원사사의 감정 또한 천성적으로 마음이 삭막한 구염상에게 주소유를 쉬이 놓아줄 이유가 되지 않았다.

    * * *

    어두컴컴한 밀실 안, 처량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카로운 목소리는 울다 지쳐 쇠잔해져 있었다. 여인은 음산하고 축축한 구석에서 피투성이가 된 몸을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었다.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다 말씀드렸어요…….”

    촛불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창백해진 주먹을 꽉 쥔 채, 탁자에 기대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거대한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어머니께서 부인을 해치려 하셨다고……? 어째서! 그 아이는 내 자식이면서 어머니의 손자인데!’

    “대… 대인…….”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하인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주인이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헌원사사는 낭패스럽다는 듯 몸을 돌렸다. 다른 이야기는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부인을 이렇게 미워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헌원사사는 하인으로부터 아이가 잘못된 일에 다른 속사정이 있다는 밀고를 전해 들은 후 진상을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마주하게 될 줄이야…….

    밀실에서 나온 헌원사사는 창백한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고개를 든 그가 상심한 눈빛으로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을 쳐다보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해가 지자 헌원사사는 마음을 정리한 두, 공주의 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 들어서자 세 개의 큰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열린 상자 안에는 각종 도자기와 장식품, 비단이 들어 있었다.

    헌원사사는 조금 수척해지긴 했지만 왠지 며칠 전보다 더 활기가 도는 듯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물건들은 모두 구염상이 가져온 혼수품이었다.

    ‘대체 이것들을 꺼내서 뭘 하려는 거지?’

    헌원사사를 본 구염상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이를 만났다는 듯 그에게 다가간 그녀가 팔짱을 꼈다.

    “어머니에게 드릴 것들이에요. 어머니께서 어마마마를 도울 방법이 있다고 하셔서…….”

    구염상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어마마마께서 잘 지내실 수만 있다면… 딸인 제게는 어마마마를 구할 능력이 없으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순간 헌원사사의 눈 속에 불같은 분노가 가득 찼다.

    “어머니께서 그러시던가요? 당신이 도울 수 있으니, 이것들을 달라고?”

    헌원사사에게 잡힌 팔이 아픈 듯 구염상이 잠시 몸부림쳤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어머니께서 처음 도와주시는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 화를 내세요.”

    그 말을 들은 헌원사사의 눈 속에 난폭한 기운이 더욱 거세졌다.

    “그러니까… 지금 어머니께서 물건들을 요구하신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겁니까?”

    구염상은 팔의 고통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느끼며, 헌원사사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공! 어찌 그렇게 말씀하세요?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바쁘게 다니시다 보면 경비가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에게든 일 처리를 부탁해야 하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요. 제가 어찌 그 비용을 어머니께 부담시킬 수 있겠어요?”

    동시에 구염상을 놓아 준 헌원사사는 눈을 번뜩이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구염상은 자신의 다급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바람처럼 주원으로 떠나 버린 헌원사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랫사람에게 상자를 정리하고 제비집 죽을 가지고 오라고 분부했다.

    상황을 지켜본 대마마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는 공주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공주 전하, 오늘 부마께서 이상하다는 걸 못 느끼셨습니까?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디를 가시는 걸까요?”

    구염상은 은수저를 든 채 차분한 표정으로 그릇에 담긴 죽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그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를 가든 이미 나가셨으니, 나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지.”

    대마마는 공주를 쳐다보면서 공주의 말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 *

    주원의 침실 안, 주인은 하인들을 모두 물린 채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헌원상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둥그런 몸을 이끌고 계속해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 모자가 대체 무슨 일로 싸우는 건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연신 땀을 닦던 헌원상은 한편으로는 화가 나서 노발대발하는 부인의 등을 떠받치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사야, 그만하거라! 그저 필요한 곳에 사용하려는 것뿐, 네 어머니가 공주를 속이기야 하겠느냐. 필요하지 않으면 공주에게 돌려줄 거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시지 않느냐!”

    헌원사사는 우스운 이야기라도 들은 양 비꼬며 웃었다.

    “필요하지 않다는 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어머니, 지금 황후마마께서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미 궁에서는 황후마마를 뼛속까지 증오하는 금비가 절대, 누구도 폐후를 돕지 못하도록 손을 쓴 상태라고요!

    이건 어머니께서 갖다 바칠 물건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세월 쌓인 황후와 금비의 원한 문제입니다. 누가 어떤 핑계를 대든 금비는 절대 냉화궁에 있는 폐후가 보살핌을 받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요!

    그런데 지금 어머니께서 감히 금비에 대적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하, 어머니! 언제부터 어머니의 능력이 폐하와 금비를 뛰어넘는 것도 모자라, 이 아들이 여러 방도로 알아본 절대적인 결과까지 무시할 만큼이 되셨습니까? 어머니의 힘이 황궁 안까지 미치게 되다니요!”

    화가 난 주소유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헌원사사는 그녀에게 가장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아들이 예법도 무시한 채 자신의 코에 삿대질을 하며 훈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나가! 당장 나가거라!”

    당연히 나갈 생각이었지만 헌원사사는 할 말은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는 줄곧 어머니가 단순히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댔고, 심지어 그 일로 부인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헌원사사는 대체 부인이 무슨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를 저질렀는지 묻고 싶었다. 대체 부인이 헌원씨 가문에 무슨 잘못을 그리 했다고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단 말인가? 아이를 잃고, 모후를 잃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기회를 틈타 부인의 재물을 갈취하려 했다. 헌원사사는 한 번도 어머니가 이렇게 흉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어찌 내 아이를 해친 뒤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위로했단 말인가……!’

    심지어 당신이 해친 사람을 속여 마지막 무기인 은자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니.

    꾹꾹 누르고 있던 헌원사사의 고통이 완전히 폭발했다.

    “나갈 겁니다! 당연히 나가야죠! 어머니 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이, 저는 오늘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이 말에 주소유의 호흡이 가빠졌다. 화가 난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헌원사사를 가리켰다.

    “네, 네 이놈……!”

    주소유는 곧장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밖으로 나가 버린 헌원사사의 뒤로, 초조해진 헌원상이 큰소리로 사람들을 불렀다.

    밤사이 소란이 지나간 뒤, 주소유는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 정신을 차린 후 그녀는 하염없이 울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관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냐! 다 공주가 꼬드겨서 그런 게지. 감히 아들이 어미에게 대들게 만들다니…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주소유는 계속해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아들이 자신을 모욕한 것과 볼썽사나운 짓을 벌인 사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공주가 아들을 부추겨 어미와 맞서게 했으니, 앞으로 살아서 무얼 하느냐는 말만 읊을 뿐이었다.

    같은 시각, 구염상은 주렴으로 나뉜 대청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소유의 푸념을 듣고 있었다. 구염상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렴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구염상이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느닷없이 왼쪽에서 그녀를 휙 밀쳤다. 멀리 서 있던 마마들은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곧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구염상을 바라보았다.

    구염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헌원사책이 다급히 그녀를 부축한 뒤, 빠르게 손을 거둬들였다.

    “형수님, 조심하십시오.”

    그가 불쾌한 표정으로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뭐하는 짓이냐! 형수님께서 몸이 편치 않으신 것을 모르는 게냐!”

    동시에 구염상과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던 헌원씨 가문의 셋째가 막 다가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가문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자라 건방진 소녀가 구염상을 가리키며 분노했다.

    “둘째 오라버니! 어째서 저 여자를 보호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 못 들었어요? 이게 다 저 여자 때문이잖아요! 큰오라버니가 언제 어머니랑 다투는 거 봤어요? 심지어 쓰러진 어머니를 내팽개치고 혼자 가 버리기까지 하다니요!

    어머니는 분명 저 여자가 나쁜 마음을 품고 큰오라버니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까지 이간질시키려는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특히나 궁에서 나온 저런 여자야말로 아주 음험하고 악독하다고, 궁에서 나온 사람들 중 꿍꿍이가 없는 사람들은 몇 안 된다고 하셨다고요! 보세요, 허구한 날 불쌍한 척만 하고 있잖아요! 이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면 뭐죠? 저 여자는……!”

    “그만하지 못해!”

    입을 연 건 둘째 헌원사책이 아닌, 무표정한 얼굴의 셋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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