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69)화 (369/449)

외전 구염상 1-18

‘앞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가문이 구염상의 손에 놀아나게 되는 것 아닐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손자에 대해 주소유는 전혀 아쉬운 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헌원사사 외에도 아들이 무려 세 명이나 더 있었다. 앞으로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며느리들이 얼마든지 손주들을 낳아 줄 것이다.

심지어 이를 뒷받침하듯 주소유의 주변에는 가문이나 인품 어느 것 하나 뒤처지지 않는 조카딸이 그녀의 아들에게 재주껏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예락 공주 역시 그녀의 아들에게 시집오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았는가.

덕분에 주소유는 구염상의 뱃속 아이가 장손이든 아니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헌원씨 가문에서 딱히 손주가 아쉽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럴수록 주소유는 구염상을 더욱 온화하게 대해 주었다. 그녀는 말끝마다 손자, 손녀를 입에 달고 살며 상 공주가 가문에 공이 크다고 칭찬했고, 대사마에게 후한 선물을 준비하도록 부탁해 황제와 황후에게 이렇게 훌륭한 공주를 보내 준 것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주소유는 뒤에서 은밀히 손을 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순조롭지 않았다. 구염상이 자신의 정원을 빈틈없이 관리한 탓이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경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집안의 절차에 따라 맡은 일에 충실하고자 했다. 성숙한 시어머니를 만났다면 살림살이를 잘한다고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으나, 아쉽게도 구염상이 만난 건 주소유였다.

몇 차례 실패를 경험한 뒤, 주소유는 구염상이 찔리는 게 많은 탓에 도리어 철저히 단속을 한다며 남몰래 울분을 토했다.

‘감히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주소유는 점점 더 대담하게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이지. 절대 우리 헌원씨 가문을 구염상과 황후의 손 안에 놀아나게 둘 수 없어!’

아무리 구염상의 주변이 신중하다 해도 주소유가 마음만 먹는다면 계략을 꾸미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녀는 복중 태아의 친할머니였다. 감히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태의를 통해 태아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말을 들은 뒤, 구염상은 적당히 움직이며 햇볕을 쬐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어느 가을 날, 화원에서 넘어진 구염상은 삼 개월 된 복중 태아를 잃었다. 심지어 피를 너무 많이 흘리는 바람에 앞으로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다.

주소유는 속으로 너무나 통쾌했다. 속도 없이 웃고 있는 공주의 모습을 볼 때면 항상 허공에 주먹질을 하고 있는 느낌에 특히나 기분이 좋지 않았던 주소유는 창백한 안색에 초점을 잃은 구염상을 보며 통쾌해 어쩔 줄을 몰랐다. 온몸이 다 개운할 지경이었다.

‘공주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내가 다스리는 가문에 시집을 왔으면 마땅히 공주라는 신분을 내려놓고 내 집에서 성실하게, 죽은 듯이 헌신해야지!’

헌원사사는 상심한 구염상을 보며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감춘 채 공주가 우울감에서 빠져나오도록 격려했다.

구염상이 겪는 고통은 오로지 그녀 자신밖에 알지 못했다. 남편이 아무리 마음을 다해 위로한다 한들, 이미 삶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그녀가 한 번 사라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혼인한 지 어언 일 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감히 행복이라는 사치를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구염상에게 어느 날 갑자기 행복이 다가왔다. 하지만 행복이란 그저 물속에 비친 해와 달일 뿐, 어떤 것들은 지나치게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흘 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던 구염상이 결국 남편을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울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언행에 각별히 주의했고,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따스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나친 바람이었다고,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헌원사사의 마음은 더욱 서글퍼졌다. 항상 따뜻한 표정으로 웃고 자신을 생각해 주던, 굳세고 예의 바를 뿐이었던 그녀가 이렇듯 살얼음판 같은 삶을 살아오며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헌원사사는 마치 자신이 그녀를 잘 돌보지 못한 탓에 아름다운 꿈을 깨뜨리고, 그녀를 슬픔에 빠뜨린 것만 같았다.

헌원사사는 몹시 자책했다. 그의 가슴 속에 부인에 대한 애정과 존경 이외에 짙은 안쓰러움이 더해졌다. 낮은 소리로 울고 있는 구염상을 품에 안은 그가 계속해서 부인을 위로했다.

“나에게는 형제가 많으니 부인만 좋다면 앞으로 한 명을 양자로 들이면 됩니다. 내가 약속하지요. 당신은 앞으로도 가장,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공주일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헌원사사에게 이 세상에서 유일한 공주였다. 앞으로 그들 사이에 아이가 있는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이 가문에서 굳이 그가 대를 이을 필요는 없었다.

한 달 뒤, 구염상은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헌원씨 가문의 둘째 공자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비록 헌원사책이 올린 차를 웃으며 마셨으나 그녀가 애써 강인한 척 버티고 있다는 건 숨길 수 없었다.

머리를 숙인 채 술을 마시던 헌원사책은 가슴이 아파 순간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는 내색 없이 다음 사람에게 술을 올리러 갔다.

남편의 옆에 앉은 주소유는 자신들을 둘러싼 왁자지껄한 친척들과 조정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들의 조심스러운 행동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구염상을 보며 기분이 더욱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로부터 또 한 달이 지난 뒤, 구염상의 마음은 많이 호전되었다. 가끔 허전한 듯 주위를 돌아보며 아파하긴 했으나 그녀는 괴로워해 봤자 정해진 사실을 바꿀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영원히 슬픔에 잠겨 있으려고만 한다면 주변 사람들도 지쳐 떠나거나 자신을 버릴지 몰랐다.

구염상에게는 총애를 받는 어머니도, 자신을 목숨처럼 여겨 주는 아버지도 없었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벌써 대마마에게 점포 몇 채를 빌릴 수 없냐고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구염상은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라면 언젠가 슬픔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재산조차 사라질 터였다.

구염상은 여전히 삶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찍부터 스스로 모든 걸 감당하는 일에 익숙했던 그녀는 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강인한 삶을 살아 내려 했다. 특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머니를 걱정시킬 수는 없었다.

구염상은 누군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일부러 꾸민 일이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저 산책을 하던 날 비가 내려서 미끄러진 것뿐이다. 그녀는 엄마가 되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했다.

어느 날, 상심한 구염상이 주변을 물린 채 홀로 슬퍼하고 있을 때였다.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대화로 인해 구염상은 온몸에 한기가 도는 걸 느꼈다. 손발이 새하얘졌다.

“어머니, 제가 왜 셋째 도련님의 첩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어린 소녀의 울음에는 옅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소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어머니는 부인을 대신해 큰일을 하셨잖아요. 그런데 부인께서 왜 어머니의 체면을 깎으려 하겠어요? 그냥 어머니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거겠죠! 저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신 거잖아요!”

이에 대응하는 늙은 여인의 목소리 역시 낮았다. 하지만 구염상은 그녀가 시어머니를 모시는 하인들 중 가장 유능한 시녀라는 걸 즉시 알아보았다.

“이 어미가 어찌 너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겠느냐! 글쎄 셋째 도련님의 첩이 되어 봐야 좋을 게 하나 없대도! 반듯한 가문에 시집을 가 정식으로 부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 떳떳한 일이다. 비록 고생을 많이 한 사내이긴 하나 내 보기에 인품과 재능이 모두 훌륭한 수재이니, 너는 반드시 그 사람과 혼인해야 해.”

늙은 여인은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권력을 잡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더욱 분노하며 말했다.

“싫어요! 저는 셋째 도련님이 좋아요. 보잘것없는 수재는 필요 없다고요! 저는 그 집에 시집 안 가요. 셋째 도련님의 이랑이 될 수 없다면 전 어머니와 부인께서 몰래 상 공주를 유산하게 만든 일을 공주에게 폭로할 거예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구염상의 전신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이 망할 것 같으니! 살고 싶지 않은 게냐?”

“살고 싶지 않은 건 어머니와 부인이지요. 심지어 공주를 유산시킨 뒤에도 약을 써서 몸을 더욱 상하게 만들었잖아요.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쨌든 저는 셋째 도련님의 이랑이 되어야겠으니, 나머지는 어머니가 알아서 해 주세요!”

말을 마친 소녀는 자신만만하게 소매를 뿌리치고 떠났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온 구염상은 평온한 얼굴로 세수를 했다. 그녀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기도 전, 갑작스레 어머니가 냉궁에 유폐되었다. 후궁이 낳은 황자를 살해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황급히 입궁한 구염상은 아버지에게 너그러운 처분을 간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살인 혐의에서 벗어나 투기가 심하고 덕이 없어 폐위된 것으로 이유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구염상은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요처에서 나오던 그녀는 득의양양하게 웃는 금비를 마주쳤을 때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답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어머니가 금비의 충동질에 넘어가 아이에게 손을 댔던 것이다.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누가 옳고 그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구염상에게는 그리 뜻밖의 일도 아니었다. 도리를 중시하나 무정한 황제는 누군가 자신의 한계를 건드리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는 여인이었다. 그런 일을 저지른 상황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건 오직 냉궁뿐이었다.

이는 아버지가 다른 여인들을 냉궁에 가둬 버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냉궁으로 향한 구염상은 어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냉정해야 한다고 재차 삼차 당부했다. 그리고 하마터면 맞을 뻔한 뒤,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린 그녀는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남일이 아니라는 듯 정원에서 구염상을 기다리고 있던 주소유는 사람을 보내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황후를 구해 오겠다고 했다.

구염상은 눈을 반짝였다. 만약 시어머니가 가문의 힘을 이용해 어머니를 곤경에서 빠져나오게 해 준다면 그녀는… 아이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었지만, 시어머니가 저지른 일을 문제 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어 주소유는 횡설수설하며, 안타깝게도 자신의 은자를 쓰기가 불편한 상황이니 우선 네 돈으로 사람을 쓸 수 있는지를 물었다.

구염상은 웃었다. 웃음 속에는 마지막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대마마에게 금을 내어 주라고 분부한 뒤 떠나는 시어머니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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