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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68)화 (368/449)
  • 외전 구염상 1-17

    남편을 배웅한 구염상은 평소처럼 장부를 처리하기 전 남편에게 줄 겨울 신발을 만들고 있었다. 시녀들은 그릇을 정리 중이었고, 이를 바라보는 대마마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구염상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마마, 별거 아닌 작은 일일 뿐이야. 구태여 화를 낼 필요가 있을까?”

    잠시 고개를 든 구염상이 대마마를 향해 능글맞게 웃어 보인 뒤, 다시 바쁘게 고개를 숙였다. 대마마는 약간 놀랐으나 뒤이어 깨달음을 얻은 후 주름살을 펴고 활짝 웃었다. 가슴 속부터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흥! 공주 전하는 이제 겨우 열다섯이야. 어차피 독수공방에 신경 쓸 나이도 아니라고!’

    심지어 요 며칠 공주는 편히 잠을 잤다. 대마마는 생각할수록, 정신을 차릴수록 더욱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감히 이런 수를 쓰다니, 나중에 공주께서 부마의 시중을 들지 않는다고 원망이나 하지 마시지!’

    그렇잖아도 주소유는 무려 보름 동안이나 계속해 큰아들에게 궁의 여인들이 얼마나 음험한지, 얼마나 악독한 수법으로 남자들을 힘들게 하는지를 주입시키고 있었다.

    헌원사사는 화가 났다. 그는 자신이 노력하면 어머니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어머니는 오히려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어머니! 공주는 제 아내이고, 어머니의 며느리입니다. 덕德, 현賢, 용容, 도度, 어느 하나 빠지지 않으니 어머니께서는 앞으로 심사숙고하시고, 다시는 부인을 중상모략하는 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말을 마친 헌원사사는 즉시 몸을 돌려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날 밤 공주의 침실에서 밤을 보냈다.

    헌원사사는 한창때였다. 보름 동안 손도 대지 못한 아내를 보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열정이 끓어올랐다. 어린 아내는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목이 메어 울었고, 결국 그의 품속에서 잠이 들었다.

    깊은 밤, 잠이 든 구염상을 안고 있는 헌원사사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렇게 영리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인데, 어머니께서는 어찌 좋아하지 않으시는 거지?’

    헌원사사는 이미 현 상황을 알아볼 만큼 알아본 상태였다. 부인은 어머니에게 잘했다. 비록 모든 며느리들이 하는 것처럼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지는 않았지만, 존귀한 황실 출신으로 그녀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부인은 아직 어린데, 뭘 알겠는가?’

    그리 어머니의 맘에 들지 않는다면 직접 고쳐 달라 얘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뒤에서 비방과 비난을 서슴지 않다니. 헌원사사는 평소 엄격하고 위엄 있는 어머니가 처음으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헌원사사가 품에 안은 이를 꽉 껴안았다. 아련한 마음이 더해졌다. 이렇게 어린데, 웃을 때조차 그렇게 조심하며 웃는 사람인데 어머니는 어찌 그렇게 무자비한 말씀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다음 날, 아들이 공주의 침소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주소유는 화를 내며 가장 아끼는 찻잔을 박살냈다. 공주에 대한 원망이 한층 더 깊어졌다.

    ‘며느리를 잘못 들이는 바람에 말 잘 듣고 철이 든 아들까지 물이 들었군! 정말이지 밉상이로구나!’

    “부인, 셋째 도련님이 문안인사를 드리러 오셨습니다.”

    셋째 아들은 주소유가 매우 아끼는 자식이었다. 셋째는 마음에 꼭 드는 말만 하는 데다 재능 또한 출중했고, 무엇보다 부모를 기쁘게 할 줄 알았다. 주소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셋째 아들을 지나치게 귀여워했다.

    온몸으로 바람처럼 맑고 뛰어난 느낌을 주는 셋째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차를 따라 드리고, 손수 머리를 빗어 드리기도 했다. 비록 서툰 빗질로 인해 머리가 엉망이 되어 결국 시녀들이 다시 만져 주어야 했지만 그래도 주소유는 즐거워했다.

    아끼는 셋째를 보자 자연스레 자신을 거스르는 큰아들이 떠오른 주소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 너희를 키우며 고생한 것도 다 너희들 잘 되라고 그런 것이지, 아무렴 이 어미가 너희를 해치려고 그랬겠니?”

    “무슨 일 있으세요, 어머니?”

    즉시 공감을 표한 셋째가 어머니 옆에 웅크리고 앉아 위로를 건넸다. 주소유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네 큰형님이 말이다…….”

    주소유는 상 공주가 꼬리를 치며 유혹하는 바람에 소중한 큰아들이 매일 공주의 침실에서 떠나질 못한다고 한바탕 원망을 해댔다.

    마지막 말까지 끝낸 주소유는 아무래도 셋째가 자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네게 이런 얘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궁에서 여인들이 어떤 짓을 벌이는지 네가 알 턱이 있나.”

    말을 마친 주소유가 억울한 듯 눈물을 흘렸다.

    “혼인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네 큰형님은 이제 어미의 말도 듣지 않는구나.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면 네 형수는 사사를 손아귀에 넣고 우리를 괴롭힐 게다.”

    셋째는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의 말에 맞장구를 치지도, 공동의 적을 향해 적개심을 불태우지도 않았다. 큰형님이 보름 동안 공주의 처소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만족하지 못할 뿐이었다.

    아무 말이 없는 셋째 아들을 보면서도 주소유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는 장래에 꼭 청렴결백한 가문에, 신분이 낮은 이를 아내로 맞이하도록 해라. 어미가 네 아내에게까지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말이다.”

    셋째는 더더욱 말이 없어졌다. 어머니는 잘못된 말을 하고 있었다. 형수님은 줄곧 공손했으며, 시동생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친절했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모든 시동생에게 직접 만든 귀한 먹과 벼루를 선물하기도 했다.

    ‘형수님이 잘해 보려는 뜻이 이렇게 명백한데, 어머니께서 사람을 잘못 보신 것 아닌가?’

    * * *

    그 후로 하루하루가 평온하게 지나가는 듯 보였다. 구염상은 매달 말일이 되면 궁에 들어가 어머니를 알현하는 것 외 다른 날들은 모두 헌원씨 가문의 저택에서 조용한 일상을 보냈다. 모든 사람이 칭송하는 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한 것이 헌원씨 가문에 천운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헌원사사 역시 공주를 많이 아껴 주었다. 그는 매일 귀가하기 전 설령 몇 길을 돌아가게 되더라도 꼭 공주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서 돌아갔다.

    한편, 봉익은 더더욱 침묵을 지켰다. 마음에 둔 이가 행복하게 지내는 것보다 더욱 사람을 조용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연경의 치안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봉익은 가혹한 형벌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며 범죄율을 급격히 낮추었다.

    헌원사책은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반년 전에는 전장에 나갔다. 울어서 수척해졌던 주소유는 반년 후, 둘째 아들이 금의환향하며 돌아오자 곧장 찬란한 웃음을 보이며 아들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삶이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며느리의 혼수를 눈독들이고 있으면서도 잘못된 일은 하지 않는 시어머니, 문관으로서 앞길이 구만리 같은 큰아들, 무관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둘째 아들, 효심이 지극한 셋째 아들과 점차 장성하고 있는 넷째와 다섯째, 그리고 곧 황실로 시집을 가게 될 딸아이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주소유의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편 헌원상이었다. 그는 공주를 며느리로, 황자를 사위로 맞이한 데다 우애 좋은 자식들을 두고 있었다. 헌원씨 가문은 마땅히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좀처럼 무너질 틈을 찾을 수 없는 미래의 세도가였다.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상 공주의 회임 소식이 전해지며 집안 전체가 조용히 기뻐하는 가운데, 화가 나 눈이 벌개진 사람도 있었다.

    ‘그저 회임을 했을 뿐 아직 낳은 것도 아닌데, 무슨 국보처럼 애지중지를 해?’

    주소유는 궁에서 여러 가지 선물을 보내와도 시큰둥했다.

    살면서 한 번도 부산하게 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일을 처리하던 주소유의 큰아들은 어디선가 구하기도 힘든 백병옥관음白甁玉觀音을 구해 왔다. 관음보살의 미소는 생동감이 넘쳤고, 투명한 정병淨甁(승려가 손을 씻는 그릇)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아래로 드리워진 버드나무 가지는 마치 실제로 자라난 듯 끝없이 신성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주소유는 하마터면 눈이 뒤집힐 뻔했다. 그녀는 큰아들에게서 단 한 번도 이토록 귀중한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큰아들은 한동안 상 공주의 말이라면 두말없이 따르며 언제나 그녀의 곁을 지켰다. 집에 있는 날이면 심지어 걷는 아내의 발걸음을 대신해 주지 못해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전쟁터에 나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둘째는 무려 스물네 폭이나 되는 병풍을 보내왔다. 기요처의 것과 버금갈 만큼 정교한 물건이었다.

    줄곧 부모를 공경할 줄만 알던 셋째는 그간 형수님에게서 받아 온 셀 수 없는 선물들을 의식한 듯 재정적인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오래된 금을 선물했다. 심지어 역사를 따져 보면 남편인 헌원사사가 고생해서 공주에게 찾아 준 것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했다. 대학사 권서함조차 좋은 금이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주소유는 노발대발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이렇게 난리들이라니, 장차 손주가 태어나면 오히려 헌원씨 가문이 며느리의 성을 따르게 생기지 않았는가!

    게다가 구염상은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며느리였기에 주소유는 사방에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러다가는 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권세를 자랑하는 당당한 헌원씨 가문이 공주의 후광에 묻힐 참이었다. 뛰어난 아들이 평생 부인의 시중이나 들면서 살게 된다면…….

    ‘안 된다! 절대 안 돼!’

    누구도 헌원씨 가문을 제 발밑에 두거나 그 능력을 덮을 수 없었다. 주소유는 큰아들이야말로 가문의 영광을 책임진 사람이라 믿었다.

    주소유가 구염상을 싫어할 이유는, 그리 마땅하지는 않았으나 일단 무척 많았다. 예를 들어, 점점 더 자신을 책망하는 듯한 큰아들의 눈빛이라든지, 어머니가 부인을 못 살게 구는 걸 언제든 대비하겠다는 표정이라든지, 혹은 자신의 말을 듣기는커녕 매일 제 부인의 옆에서 밤을 보내는 아들의 행동이라든지. 그녀는 아들을 탓하지 않고 모두 구염상의 잘못이라 여겼다.

    그중에서도 주소유를 가장 화나게 했던 건 회임한 구염상이 자신의 명의로 된 자산을 주변의 마마에게 관리하도록 명한 일이었다. 쌓이고 쌓인 원한이 한데 겹쳐지면서 주소유는 구염상이 안하무인이며, 그녀의 혼수에 신경을 쓰는 시어머니를 철저히 방어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사람은 일단 누군가가 한 번 눈에 거슬리게 되면 상대가 무슨 짓을 하든 전부 고까워 보이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상대가 아무리 평범한 행동을 했다 해도 어떻게든 불합리한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사람이었다.

    주소유가 바로 이러했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구염상이 눈에 거슬리다 못해 심지어 자신의 뛰어난 아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오히려 더 철이 들고 효심이 있는 쪽은 그녀의 조카 리아였다. 아들 때문에 초췌해진 조카를 보자 주소유는 구염상이 자신의 아들을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노비처럼 만든 것 같아 더욱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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