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66)화 (366/449)

외전 구염상 1-15

주소유가 다급히 올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올케의 요구가 결코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처럼 조카가 흥분한 상태라면 사사에게 한 번 찾아가 보라고 권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우선 상심한 조카부터 위로한 뒤 다시 방법을 찾다 보면 결국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게다가 두 사촌 남매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다행히 주소유가 본 상 공주는 기질 자체가 착하고 주관이 없었다. 잘 구슬러서 남편이 첩을 들일 수 있게 황제와 황후에게 청해 달라고 한다면, 어쩌면 일이 자연스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급선무는 리아를 위로하는 일이었다.

주소유가 옆에 있는 시녀에게 다급히 분부했다.

“가서 큰 도련님을 불러오너라.”

헌원사사는 금세 도착했다. 외숙모를 본 그가 인사를 하려는 찰나, 갑자기 그녀가 먼저 시조카에게 무릎을 꿇었다.

서둘러 시선을 거둔 헌원사사가 옷을 젖히고 꿇어앉았다.

“외숙모, 어찌 이러십니까. 일어나십시오.”

순간 헌원사사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주소유의 올케 장 씨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울면서 시조카를 향해 애원했다.

“이 외숙모가 너를 난처하게 하고 있다는 걸 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공주가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좋지 않겠지만… 하지만 리아는 네 사촌이잖니……. 사사야, 이 외숙모가 부탁하마. 가서 리아를 좀 만나 주렴. 감히 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네가 위로만 해 주어도 괜찮아질 거야. 사사야…….”

주소유 역시 기대하는 눈빛으로 헌원사사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헌원사사의 냉담한 눈빛이 촛불 아래 비치는 어른들의 얼굴을 정중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손바닥을 뒤집어 외숙모의 손을 잡은 그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외숙모, 리아도 이제 어리지 않으니 제가 가서 위로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겁니다. 모두가 안 된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구태여 다시 희망을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 씨가 낙담한 듯 헌원사사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주름진 눈가로 비통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외숙모도 안다, 알아… 하지만…….”

가문에서 그토록 체면을 구기는 딸이 나온 이상 장 씨 역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선비 가문으로 일컬어지는 주 씨 가문은 무엇보다도 가문의 평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일이 알려지면 백 년을 이어온 주 씨 가문의 명성에 오점이 생길 게 분명했다.

‘대체 이게 무슨 업이란 말인가!’

주소유는 슬프게 우는 장 씨를 보며 애원하듯 아들을 바라보았다. 뛰어난 아들 때문에 득의양양하기도, 조카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했다.

“사사야…….”

“어머니.”

헌원사사가 한 발 앞서 어머니의 말을 잘랐다.

“군자에게는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정말로 리아를 위하신다면 어서 리아에게 꼭 맞는 혼처를 찾아 주셔야 합니다.”

주소유는 결연하게 말하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 일이 바깥에 알려진다면 아들의 장래에 필시 좋지 않을 것이다. 황후를 거스르는 건 아들에게 있어 불운을 자초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러 상황들을 따져본 끝에 주소유는 아들이 조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몸을 돌려 올케를 부축한 주소유가 마찬가지로 괴롭다는 듯 말했다.

“언니, 사사의 말도 일리가 없지 않아요. 리아도 이제 다 컸으니, 우리…….”

장 씨는 조금 전 철석같이 약조한 시누이가 말을 바꾸자 벌컥 화를 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가씨, 분명 사사가 리아를 첩으로 들일 방법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어찌…….”

장 씨의 말에 놀란 헌원사사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더 이상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 했다. 순간 헌원사사의 머릿속으로 구염상의 반짝이는 눈과 천진난만한 얼굴, 그리고 어머니를 공경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토록 사리에 밝은 공주가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니. 그는 구태여 부인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식은 결코 어머니의 과오를 말할 수 없는 법이다. 헌원사사가 구염상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어머니가 위험을 무릅쓰고 금비와 대적한 결과였다.

헌원사사는 앞으로 어머니가 진심으로 구염상을 좋아하도록 마음을 쓴다면 두 사람이 모녀처럼 돈독한 정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주소유는 벌컥 화를 내는 올케를 위로하고 싶었으나 옆에 아들이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손을 흔든 그녀가 아들에게 이만 나가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아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주소유는 목소리를 낮추고 올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언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사사가 알게 되는 날 리아는 정말로 끝이에요. 사사가 끝까지 거부하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한들 리아를 맞이할 재간이 있겠어요? 비록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는 했지만, 부인에게 못마땅한 점이 생기면 사사에게 첩을 들이라고 권할 수 있으니 일단은 기다려야 해요. 상 공주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저 조용히 지켜볼 수 밖에요.”

장 씨는 원망을 멈추었으나 주소유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말은 참 쉽게 하시는군요. 사사는 지금 리아를 만나 보려고도 하지 않는데, 그때가 되어서 아가씨의 말을 따라줄지 어떻게 알겠어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장 씨가 비아냥거리듯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듣자 하니 상 공주가 그 모친보다 훨씬 아름답고 성정도 좋다지요? 사사가 리아가 누군지도 잊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상 공주의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나 않을지 걱정되네요.”

그 말에 주소유는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그럴 리가요! 사사는 제 뱃속에서 나온 제 아들이에요. 제가 어찌 사사를 모를 수 있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미인을 만났다고 해서 사사가 누구에게든 다르게 행동하는 걸 보신 적이 있나요?”

주소유가 자랑스레 언급했다.

“언니,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사사는 가족과 국가를 무엇보다 중시 여기는 아이예요. 상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것 역시 제가 원했기 때문이고요.”

주소유가 한숨을 쉬었다.

“저도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나마 황실에서 성정이 온화하고 줏대가 없는 상 공주를 선택한 거예요. 그게 아니었다면 예락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야 했겠죠. 그 아이 성격이 어떤지는 언니도 잘 아시잖아요. 절대 리아를 첩으로 들이지 못 하게 할 거예요. 하필 금비가 그렇게 나오는 바람에… 리아는 제 친조카인데, 저라고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어요?”

주소유가 눈물을 닦으며 장 씨의 고통을 공감했다.

“언니, 저를 믿으신다면 돌아가서 리아에게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세요. 리아가 아직 저를 시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어한다면, 저 주소유는 절대 리아의 기다림을 헛되게 하지 않을 거예요!”

장 씨가 주소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누이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시누이의 말이라면 분명 터무니없는 다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사가…….”

장 씨는 조금 전 헌원사사가 보인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주소유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올케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사사는 고지식한 아이예요. 하지만 제게는 사사를 타협하게 만들 방법이 있어요.”

장 씨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저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럼 저는 아가씨만 믿을게요.”

장 씨를 배웅한 뒤 한숨을 돌린 주소유는 더 이상 득의양양할 수 없는 표정으로 달을 바라보며 냉소했다.

‘내 아들이 얼마나 뛰어난데!’

만약 별것도 아닌 가문에서 며느리를 들였다면 잘난 척하길 좋아하는 장 씨가 주소유를 가만히 뒀을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알아서 부탁을 하러 오지 않는가.

아들로 인해 거만하게 기를 편 주소유가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쭉 폈다. 사사처럼 특별한 아들을 낳은 데다 또 그 아들은 유일하게 권씨 가문의 제자로 들어갔다. 주소유는 대단히 영광스러웠다.

* * *

한편, 서방에서 잠시 뒤척이던 헌원사사는 결국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냉정한 표정으로 후원으로 돌아갔다.

구염상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붉은 천이 아직 걷히지 않은 침대 위 이불은 옥처럼 하얗고 작은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달콤하게 잠든 작은 얼굴 밑으로 무방비 상태의 손이 새빨간 침대 위에 걸쳐져 있었다. 넓게 퍼져 있는 검고 긴 머리카락은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따뜻한 이불 속으로 갑자기 냉기가 스며들자 구염상은 불편한 듯 소리를 내며 따뜻한 곳을 찾아 몸을 뒤척였다. 구염상을 바라보는 헌원사사의 눈에 짙은 욕망이 스쳤다.

돌아와서 다시 잠을 청할 생각이었던 헌원사사는 처음으로 계획을 어겼다. 겉옷을 벗은 그가 꿈결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위로 올라갔다.

깜짝 놀란 구염상이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헌원사사가 마음껏 즐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구염상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듯 한숨을 쉬며 본심과는 달리 두 손을 부마의 목에 둘렀다. 낮은 목소리로 살려 달라고 가볍게 애원하는 소리에 위에 올라선 남편은 과연 빠르게 투항했고, 그녀의 목덜미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구염상은 책이 자신을 속이지 않은 것은 물론, 반년 전 배웠던 지식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녀가 이러한 행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직 어린 탓에 헌원사사 쪽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구염상은 어머니가 아니었기에 즐겁지 않다는 이유로 상공을 향해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언젠가 마마는 남자들이 그런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따라서 그녀는 지금 간접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생을 함께 지내야 하는 부부라면 마땅히 공통점을 찾아야 했다. 누군가 만족하는 상황이라면 상대가 양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테면 지금 두 사람처럼 말이다. 그녀는 남편이 만족했다면 자신도 목적에 도달한 거라 믿었다.

물론 헌원사사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세상에 구염상보다 그의 이성을 잃게 하는 존재는 없었다. 특히 새끼 고양이 같은 소리를 들으면 자극이 더욱 심해졌다.

여운이 지나간 뒤, 헌원사사는 구염상을 품에 안고 비단 같은 머리칼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사실 그는 어색함을 숨기고 있었다.

“내가 깨웠군요. 뭐라도 좀 먹겠어요?”

구염상은 헌원사사의 품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부드러운 향기가 휘장 안에 가득했고, 힘이 없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안 먹을래요, 졸려요…….”

헌원사사는 조금 전 가라앉았던 불길이 다시 솟아오르는 걸 느끼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군.’

“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