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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65)화 (365/449)

외전 구염상 1-14

헌원사사는 아직 휴가 중이었기에 부인을 방으로 돌려보낸 뒤 괜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서방으로 향했다.

구염상은 분주했다. 그녀는 혼수를 정리하고, 원의 하인들을 알아갔다. 동시에 그녀의 뇌리에는 조금 전 대청에서 예의를 잃던 주 씨의 모습이 생생했다.

구염상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 씨가 겉으로 표현하는 것과 달리 자신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구염상은 스스로 총명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궁에서 오래 생활한 덕분에 사람을 보는 눈이 없지 않았다. 주 씨는 아들이 공주를 맞이하는 것보다도 공주가 아들에게 미칠 영향에 매우 신경을 쓰는 게 분명해 보였다.

구염상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새로운 삶에 엄청난 희망을 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어머니를 만나는 것도 썩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것은 앞으로 그녀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보살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구염상은 애써 기운을 불어넣었다. 어쨌든 홀로 고군분투하는 건 익숙했고 이곳이라면 황궁보다 더 많은 일에 결정권을 가질 수 있으니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마마, 내일 아바마마께서 보내신 혼수 관리인을 좀 만나게 해 줘.”

“네. 공주 전하.”

구염상은 생각보다 그리 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누군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때에는 더더욱 비위를 맞춰 주지 않았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존재였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이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일수록 비위를 맞추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구염상은 굳이 힘을 들여 시어머니의 환심을 사기보다 자신이 실수를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구태여 서로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함께 평안할 수 있었다.

구염상은 특히 장부 관리를 좋아했는데, 덕분에 그 분야에 있어서는 모든 공주를 통틀어 가장 정통한 수준에 속했다. 비록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그녀에게는 일찍이 이를 가르치는 스승이 적지 않았고, 일찍부터 장부 관리를 배워 둔 건 혼인 이후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구염상은 자신이 걱정이 많은 사람이란 걸 인정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불화를 보아 온 탓에 혼사와 남편을 믿지 않았다. 또한 구염상은 사랑이 깨진 후에도 끝끝내 아버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당신의 지위를 관리하지 않는 어머니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구염상은 어머니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독립적이고 굳건해져야 했다.

구염상은 빠르게 움직였다. 사흘 후, 보유하고 있는 모든 마을과 산지, 그리고 점포들을 한 차례 둘러본 그녀는 해마다 받게 될 이자와 세를 정리해 두었다. 장방賬房(회계를 맡아보던 곳)에 들러 각지의 총관總管들을 만나 본 그녀는 부황의 권위를 빌어 말귀를 알아듣도록 적당히 그들을 타이른 후, 장부만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내보냈다.

구염상은 자신이 사사로이 키워 온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각 마을에서 보내온 장부들을 대조해 보았다. 이들은 대부분 태감과 궁녀들로, 혼인 전부터 궁에서 보아 온 노인들이었다. 그녀가 일찍부터 스승을 청하여 이들에게 특별히 훈련을 시킨 건 바로 이날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구염상은 아랫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 속으로는 진정 따르지 않는 하인의 일탈을 방지하고자 했다. 이렇게 장방 관리인과 총관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지 않으면 그들이 나이 어린 공주를 업신여기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구염상은 낮에는 장부를 관리하느라, 밤에는 헌원사사에게 줄 옷을 만드느라 바빴다. 비록 훌륭한 재주가 아니라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썩 봐 줄 만했다.

헌원사사는 최근 이틀간 방으로 돌아올 때마다 창문 아래 앉아 있는 공주를 발견했다. 긴 머리칼을 틀어 올려 작은 머리 위에 고정시킨 그녀는 옥 같은 목을 드러낸 채 진지한 얼굴로 손에 들린 옷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든 구염상은 돌아온 헌원사사를 보며 달빛이 넘실대는 양 웃어 보였다.

“오셨어요.”

재빨리 고개를 돌린 헌원사사가 갑자기 빨라진 심장박동을 진정시켰다.

“예.”

옷을 내려놓은 구염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방에 식사가 다 준비되었는데, 드시고 다시 서방으로 가시겠어요?”

최근 헌원사사는 종종 곧장 서방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혼인 후 사흘 동안은 반드시 안채에서 쉬어야 한다는 예법을 지킨 뒤 이틀을 서방에서 보냈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그러지요.”

구염상은 하인에게 식사 준비를 서두르라고 분부했다. 헌원사사는 조금 전 구염상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옷감 옆에 놓여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소로에게 녹두탕을 준비하라고 분부하던 구염상은 헌원사사가 자신이 보던 책을 넘겨 보자 즉시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픈 발을 잡힌 작은 토끼처럼 창피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헌원사사가 얼른 말했다.

“저도 예전에 비슷한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부인처럼 정통하지는 못할 뿐입니다.”

물론 헌원사사가 본 책은 수놓기가 아닌, 산업 기술을 논하는 책이었다. 그러나 공주가 부끄러워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낮추어 그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정말요?”

진짜라고 믿은 구염상은 확실히 기뻐했다. 헌원사사에게 다가간 그녀는 이 책이 얼마나 까다롭고 배우기 어려운지를 늘어놓으며 불평했다. 혼인 전 궁에 있을 당시 그녀는 하루 일과의 절반 정도를 성가신 자수에 힘써야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장서열은 딸이 수놓는 걸 좋아한다고 여겨 굳이 스승을 구해 주기까지 했다.

작은 입을 쭉 내민 부인이 쉬지 않고 불평하는 모습을 보며, 헌원사사는 손에 든 책을 내려놓고 손을 뻗어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그는 구염상이 자신의 귓가에 낭랑한 목소리로 늘어놓는 원망을 들었다.

하인들을 이끌고 저녁 식사를 가지고 돌아오던 마마는 공주 부부의 금슬 좋은 모습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물론 성품 좋고 외모까지 아름다운 공주를 부마가 어찌 감히 싫어할 수 있겠는가?

구염상은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다 보니 금을 연습할 시간도 없었어요.”

헌원사사가 곧바로 물었다.

“금도 탈 줄 아십니까?”

“물론이죠!”

금을 타는 일이야말로 구염상의 가장 큰 취미였다. 그녀는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발끈했다.

‘당연히 탈 줄 모른다고 생각한 거지? 너무해!’

마치 화가 난 고양이가 털을 세운 듯한 모습에 헌원사사가 참지 못하고 아름다운 콧날을 건드렸다.

“알았어요. 남편이 잘못했습니다. 뉘우치는 뜻으로 좋은 금을 선물하도록 하지요. 가요, 가서 식사합시다.”

구염상은 생각이 깊은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모든 일에 통달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나이가 어린 그녀에게 부부 사이의 기쁨과 그로 인한 인생의 즐거움을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부부가 함께 하는 것에 대해 그녀가 아는 것이라곤 스스로 찾아낸 엉터리 법칙들뿐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술과 밥을 배불리 먹은 뒤, 서방으로 가고 싶지 않은 헌원사사에게 구염상은 친절하게도 겉옷을 가져다주며 사근사근히 말했다.

“서방에서 책을 보실 때는 건강에 유의하셔야 해요. 밤에는 바람이 차니 창문도 잘 닫으시고요. 서방의 이불은 충분히 두텁나요? 침대는 딱딱하지 않고요? 아니면 내일 탑을 바꿀까 해요.”

떠나고 싶지 않은 헌원사사는 난처할 뿐이었다.

하지만 헌원사사 역시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다. 그는 겉옷을 들고 현모양처가 되어 신이 난 듯한 아내의 모습을 보자 도저히 남고 싶다고 말할 면목이 없었다.

결국 헌원사사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서방으로 떠났다. 공주에게 겉옷을 걸쳐 달라고 부탁한 그는 헤어지기 섭섭해 하는 부인의 눈빛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구염상은 헌원사사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방으로 뛰어들었다. 기분 좋게 한숨을 돌린 그녀는 침대로 돌진해 즐겁게 뒹굴거렸다.

대마마는 못 본 척 아랫사람에게 공주의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 * *

같은 시각,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채에서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뜰은 손님이 도착하자마자 누구도 출입할 수 없도록 봉쇄되었다.

방 안에는 눈물을 흘리며 주소유에게 하소연을 하는 부인이 있었다.

“저와 오라버니 사이에 자식이라고는 딸 하나뿐인데 제가 어찌 살겠어요. 시녀가 일찍 발견하지 못 했다면 하마터면 우리 리아理兒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을 거예요! 그 바보 같은 아이가 오래도록 사사를 좋아한 데다, 우리가 또 하필 사촌 오라버니에게 시집보낼 수 있다고 한 얘기까지 몰래 엿듣는 바람에 일편단심으로 사사에게만 마음을 쏟았으니… 대체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 부인은 체면치레를 위해 화장을 한 채였다. 그러나 화장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랑곳없이 그녀는 서럽게 울었다.

주소유에게서 평소처럼 남의 불행을 즐기는 거만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매우 초조해 했다.

“언니, 그만 우세요. 리아理兒는 지금 어떤가요? 괜찮은 거죠?”

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가능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저랑 어머니가 간신히 달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긴 했는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촌 오라버니를 찾던 딸이 떠오른 부인은 다시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무탈히 깨어난다 해도 딸아이가 온전하지 못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딸아이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아가씨,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부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소유의 마음 역시 아팠다. 리아는 그녀의 조카로, 오라버니의 딸이었다. 주소유는 리아가 자라는 걸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리아를 며느릿감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만약 금비가 한바탕 소란을 피우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오늘 리아가 자신의 며느리가 되어 있는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기에 헌원사사는 당분간 첩을 들일 수 없었다. 심지어 공주가 별다른 잘못을 하지 않는다면 가문에서도 아들에게 첩을 들이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아무리 조카를 아끼는 주소유라도 지금은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우선은 리아를 좀 위로해 주세요. 제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부인은 더욱 슬퍼하며 울었다.

“제가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가씨도 잘 아시잖아요.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부탁을 드리러 온 거예요. 리아가 극단적인 시도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저와 오라버니가 매번 리아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 딸이 여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면 우리도 어찌할 수 없었겠죠. 하지만…….”

주소유를 쳐다보던 부인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아시잖아요, 아가씨. 저한테 자식이라고는 리아 하나뿐이라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하며 키웠어요. 아가씨, 선심을 좀 베풀어 주세요. 사사에게 가서 리아를 만나 보고, 약조라도 하라고 해 주세요. 설령 꿈이라도 좋으니 리아가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게 말이에요. 저랑 오라버니는 더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가슴이 찢어지듯 우는 부인에게서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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