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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64)화 (364/449)

외전 구염상 1-13

대청 밖까지 걸어온 구염상이 막 다리를 들고 문지방을 건너려 할 때였다. 한 발 앞서 나온 헌원사사가 손을 내밀어 구염상을 부축해 주었다. 두 사람은 훌륭한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 문지방을 가볍게 넘었다.

미처 살피지 못했다는 듯 구염상이 헌원사사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뺨이 붉어진 헌원사사가 태연한 척 시선을 돌리며 평온한 얼굴을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사람들이 앉아있는 대청에 서 있었다.

둥글둥글한 헌원상을 부축한 주소유가 한 발 먼저 일어났다. 마치 꽃이 핀 듯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사람들은 주 씨를 따라 다급히 몸을 일으킨 후, 뒤에서 주 씨를 따라 상 공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헌원사사 역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대열에 속해 있었다.

부드럽게 웃어 보인 구염상이 직접 주 씨와 헌원 대사마를 부축하려 했다. 맑고 깨끗한 웃음이 담긴 목소리에는 온화한 힘이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이러지 마세요. 이제 한 집안 사람이니 제가 두 분께 절을 해야 마땅합니다.”

무릎을 약간 구부린 구염상이 머리를 기울이며 인사했다. 주 씨는 과분한 대우에 놀랍기도, 기쁘기도 했으나 감히 공주의 인사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저 가볍게 몸을 굽힌 것뿐이었지만 그조차도 안 될 일이었다. 특히 상 공주가 가져온 혼수를 빼돌리려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주소유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즉시 구염상을 일으켰다. 눈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공주께서 저희를 난처하게 하시는군요. 공주 전하를 부인으로 맞이한 건 사사가 몇 대에 걸쳐 쌓아온 복이고 우리 헌원씨 가문의 복이기도 합니다. 이제 모두 가족이니 공주께서는 낯선 부분이 있거나 머무는 데 불편한 점이 생기면 얼마든지 말씀하시지요. 제가 각별히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주소유가 구염상의 손을 잡았다. 구염상은 거절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공주의 머리 위에 장식된 눈부신 잠화簪花(머리에 다는 꽃 모양 장식)에서 시선을 돌리던 주소유는 그제야 상 공주의 고양이 같은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에 가슴이 철렁했다. 놀란 주소유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큰 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평소처럼 평온한 아들이 모습에 주소유는 왠지 모르게 긴장됐던 마음이 일순간 안정되는 걸 느꼈다. 공연한 걱정을 하지 않았는가.

주소유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아들은 이렇게나 뛰어났다. 상 공주의 외모가 아무리 출중하다 한들 어쩌겠는가. 어차피 이 뛰어난 아들을 빼앗아 도망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주소유가 더욱 유쾌하게 웃었다.

“내 정신 좀 봐, 기뻐하느라 정신이 없었군요. 공주 전하, 어서 앉으세요.”

구염상은 웃으며 조금 전 주 씨의 실례를 보지 못한 듯 행동했다.

“어머니께서 상석에 앉으시지요. 아버님께서도요. 며느리가 아버님, 어머님께 차를 올리겠습니다.”

재미있는 구경을 하기 위해 모여 있던 사람들은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시부모의 환심을 사는 며느리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 아이가 황후가 낳은 공주란 말이야? 조금도 안 닮았어! 황후는 고약한 성미를 갖고 있는데, 눈앞의 이 아이는 전혀 다르군!’

짧은 순간이었으나 상 공주의 낭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단 몇 마디만으로 그녀의 온화한 성품을 금세 깨닫게 했다.

공주는 순진하다기보다 맑고 깨끗했다. 사람의 마음을 씻어 주는 맑은 샘물 같은 느낌이었다.

악독하기로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황후에게 이렇게 고운 딸이 있었다니! 사람들은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행운 중 행운이었다.

주소유는 차분한 구염상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공주는 신분상 굳이 시부모에게 차를 올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예법에 맞게 며느리가 올리는 차 한 잔쯤 마시고 싶지 않은 시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구염상은 흠 잡힐 데 없이 행동했다. 가볍게 몸을 굽힌 그녀는 듣기 좋은 말을 건네며 웃는 얼굴로 시부모님께 공손히 차를 올렸다. 모든 몸짓은 대범하면서도 단정했다. 무릎을 꿇지 않았어도 진심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의아한 기색을 거둔 헌원사사는 더욱 깊어진 눈빛으로 구염상을 바라보았다. 문득 한 가지 다짐이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부인에게 잘해 주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고 결심했다.

한편, 헌원사책은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한 표정에 코웃음을 쳤다. 상 공주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이 무지한 친척들이 감히 이해할 수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헌원사책은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여인은 비록 흐릿한 뒷모습만을 보여 주었으나, 그녀가 웃을 때 보여 주는 고요함과 반짝이는 눈빛은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생생했다.

‘왜 하필이면 큰 형님의 아내란 말인가!’

헌원사책은 처음으로 야속한 운명을 원망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상실감이었다. 분명 먼저 그녀를 만난 것은 자신인데, 그 역시 헌원 대사마의 아들인데, 그녀가 헌원씨 가문의 며느리이기만 하면 되었을 텐데… 어째서 그녀를 차지한 건 형님이란 말인가!

‘하필이면 큰 형님이라니!’

헌원사책은 마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반발하거나 빼앗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큰 형님이라면 달랐다. 헌원사책에게는 큰 형님의 손에서 상 공주를 빼앗아 올 능력이 없었다.

헌원사사는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우수했고, 일찍이 권서함의 눈에 들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 큰 형님과 비교하면 헌원사책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형님을 저지하고 그녀의 곁에 설 수 있겠는가.

하지만 헌원사책은 여전히 두 사람의 혼사가 달갑지 않았다. 심지어 형님이 그 냉정한 성격으로 과연 그녀에게 잘해 줄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평소 공무로 바쁜 형님이 과연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한담을 나눌 수 있을까? 형님 때문에 앞으로 집에서 답답하지는 않을까?’

시선을 돌린 헌원사책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고개를 돌리던 그는 문득 멍하니 형수님을 쳐다보고 있는 셋째의 눈빛에 발로 동생을 걷어찼다.

담담하게 고개를 돌려 둘째 형님을 바라본 셋째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헌원사책이 한숨을 내쉬었다. 셋째는 변덕스럽고 의뭉스러운 성격이었다. 평소 약삭빠른 행동으로 잘난 체하기를 좋아하는 셋째는 하필 또 정말로 총명해서 형제들 중 가장 머리 회전이 빨랐다.

하지만 헌원사책은 그런 셋째가 음흉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조금 전 상 공주를 바라보던 셋째의 멍한 눈은 직감적으로 헌원사책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 시각, 고개 숙인 헌원씨 가문 셋째의 마음에는 둘째 형님보다 더욱 거센 파도가 일고 있었다. 사실 그는 형수님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림 속에서였다. 호수를 마주한 선녀가 금을 타는 모습은 바람처럼 경쾌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비천한 느낌이 들게 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이었다.

줄곧 허황된 상상이 낳은 작품이라 여겨 왔다. 어찌 그림 속 여인이 실제로 존재하겠는가? 아름다운 자태는 결코 현실 같지 않았고, 입가의 웃음은 흩어질 듯 부드러웠다. 그림 속 여인의 눈은 마치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해, 감히 오래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셋째의 서방에 소장된 그 그림의 행방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림 속 여인을 실제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며느리로 맞기 위해 남몰래 계획한 여인이었다니…….’

아무리 세상일이 예측하기 어렵다 해도 이렇게 황당한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첫 인사와 함께 시부모가 주는 선물을 받은 구염상은 자연스레 시동생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을 준비했다.

헌원사책 앞에 선 구염상이 눈을 깜빡이며 웃어 보였다. 그녀가 준비한 선물을 대범하게 내밀었다. 작년 그가 내밀어 준 도움의 손길에 감사하는 마음과 앞으로 한 집안 사람이 된다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다급히 선물을 받아 든 헌원사책이 ‘형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실례를 범해 구염상을 난감하게 할까 봐 두려웠다.

손에 선물을 쥔 셋째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들어 올리지 않았다. 구염상은 의아했지만 곧장 넷째 시동생 옆으로 다가갔다.

모두를 돌아본 뒤에도 구염상의 웃는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예의 바른 태도에 깃든 온기와 기품은 그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한편, 줄곧 부인의 곁을 지키고 있던 헌원사사는 왠지 모르게 둘째와 셋째의 태도가 매우 거슬렸다.

‘셋째는 지금 어디서 성질을 부리는 거지? 형수가 처음으로 직접 선물을 주는 자리에서 고개조차 들지 않다니, 이것이 우리 가문의 예법이란 말인가! 형수님을 공경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려 줘야겠어.’

지루한 자리는 해가 중천에 뜰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식사를 마친 후, 헌원사사는 방으로 돌아가는 부인을 배웅했다.

구염상은 기분이 좋았다.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헌원씨 가문을 칭찬하는 그녀의 눈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기뻐하는 어린 아내의 모습에 헌원사사의 마음 역시 가벼워졌다. 셋째를 보며 느낀 불쾌함이 가라앉을 정도였다.

“이제 한 가족이니, 가족들을 칭찬하는 건 곧 부인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이지요?”

헌원사사는 부인의 팔목을 부축하며 그녀의 무게를 분담했다. 구염상의 미소가 더욱 밝아졌다.

햇빛이 두 사람의 몸에 떨어졌다. 마치 서로 손을 잡은 듯한 그림자를 보며 구염상은 이렇게 서로 존중하는 시작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따뜻했다.

한편, 머리를 높게 치켜든 주소유는 말문이 막힌 사람들을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앉아있는 모든 친척들을 향해 웃었다.

‘다들 내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려고 기다렸겠지?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누가 될지는 모르는 거라고!’

이번 일로 주 씨는 그녀들에게 확실한 교훈을 준 셈이었다.

‘나 주소유가 능력이 없어서 그저 그런 황실의 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일곱 명의 고모와 여덟 명의 이모는 거만한 얼굴을 치켜드는 주 씨의 모습에 속으로는 빈정이 상했다. 하지만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상대는 헌원씨 가문을 이끄는 안주인이었다. 심지어 아이들의 앞날 또한 모두 대사마에게 달려 있었기에 이들은 대사마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 씨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친척들은 마치 조금 전 재밌는 구경을 하려던 사람이 아닌 척, 즉시 아첨하는 얼굴이 되어 주소유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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