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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63)화 (363/449)
  • 외전 구염상 1-12

    헌원사사는 까닭없이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얼굴이 편안해졌다. 그가 취기에 불편해진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밖에서 먹은 덕분에 배가 고프진 않습니다. 부인은요?”

    구염상이 달콤한 표정으로 웃었다.

    “저도 먹었습니다. 상공의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그 모습에 헌원사사는 문득 조금 전 맑아졌던 정신이 다시 흐려지는 걸 느꼈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미소가 그리 예쁘고 보기 좋을 순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자신을 상공이라 불렀다. 분명 흔한 호칭이었으나 얇고 반짝이는 입술에서 흐르는 단어를 들으니 무엇인가 심장에 걸린 것처럼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헌원사사는 여색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 운우지정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는 조금 전 일어난 순간적인 충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구염상은 침묵에 어색해졌다. 음식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처음 만난 낯선 사람과 더 나눌 만한 화제가 없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구염상은 그저 헌원사사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표정을 관리하려 노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빠르게 화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내 좋은 생각이 난 구염상이 갑자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술이 깨시도록 차를 따라 드리겠습니다.”

    구염상은 마치 보물이라도 얻은 것처럼 서둘러 남편에게 줄 물을 가지러 갔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미소는 장난감을 쥔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그 순간 헌원사사는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혼인은 뭇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 공포스럽지도, 스승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심각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헌원사사는 이 순간을 누렸다. 신부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활발하면서도 침착했고, 천진난만하면서도 성숙했다. 분명 아직 어린 소녀였으나, 어른스럽게 행동하고자 노력하는 표정은 퍽 재미있었다.

    하지만 공통 화제는 언젠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헌원사사의 목욕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 끝이 난 다음, 달빛이 비추는 하늘은 대낮처럼 밝았다.

    하루 종일 바쁜 시간을 보낸 헌원사사는 분명 자신이 피곤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 누운 공주가 별보다 더 반짝이는 눈동자로 천진난만한 유혹을 던지자 순간 그는 가슴에 일었던 충동이 무엇인지를 돌연 깨닫게 되었다.

    헌원사사는 아버지로부터 배운 모호한 가르침에 생물로서의 본능이 더해지는 걸 느꼈다. 구염상을 끌어안는 순간 느껴진 부드러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을 스친 긴장감과 두려움을 목격한 헌원사사에게서 이제껏 찾아볼 수 없던 본능이 모습을 드러냈다.

    품에 구염상을 가둔 헌원사사는 그녀의 눈 속에 담긴 소녀의 마지막 매혹을 깨뜨리고 싶었다. 말할 때처럼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고 낮은 목소리로 애원하는 모습까지 매력적일지 궁금했다.

    입맞춤은 갑작스러웠다.

    구염상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날카롭게 소리쳐서는 안 된다. 하물며 남편을 밀어내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이제 그녀의 첫 번째 신분은 그의 아내였고, 그 다음이 공주였다. 부인은 남편을 밀어낼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얽히는 가운데 구염상은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헌원사사는 그녀에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고, 그녀는 죽을 것 같은 아픔에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긴장한 헌원사사의 위로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왠지 모를 억울함에 구염상은 울고 싶었다.

    헌원사사 역시 살면서 이렇게 허둥거린 적은 처음이었다. 눈물을 머금은 구염상이 괜찮다는 말을 건네던 순간, 그는 자신이 작고 약한 이를 괴롭히는 금수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헌원사사는 결국 금수보다 못한 사람이 되었다. 아기 고양이 같은 신음에 그는 더욱 격해졌다. 이제껏 스스로 한 번도 여색을 밝힐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헌원사사는 그렇게 색마가 되었다.

    다음 날, 눈을 뜬 구염상에 뒤이어 헌원사사 역시 잠에서 깨어났다.

    희미하게 눈을 뜬 구염상이 뻐근한 몸을 가누며 일어나 앉았다. 비단처럼 붉은 침대 위로 긴 머리칼이 떨어졌다. 침대 위를 받친 희고 긴 손가락은 푸른 잎 위로 드러난 붉은 빛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을 슬쩍 쳐다본 헌원사사가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를 위해 겉옷을 걸쳐 준 그가 먼저 침대에서 내려왔다. 연기처럼 아득한 머리카락이 늘어진 아름다운 외모는 매혹적이었다.

    헌원사사는 아무래도 나가서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움직이고 돌아와 세수를 한 뒤 그녀와 함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갈 생각이었다.

    헌원사사가 다시 돌아왔을 때, 구염상은 몸치장을 마친 단정한 모습으로 그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헌원사사 역시 부인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웃고 있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여기 서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어서 세수를 한 뒤 부인과 함께 어머니를 뵈러 가야 했다.

    구염상이 한 발 앞서 말을 꺼냈다.

    “뜨거운 물을 준비해 뒀으니 어서 가세요.”

    구염상은 직접 시중을 들지도, 자신의 시종들을 딸려 보내지도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생활 습관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는 남편을 지나치게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

    또한 그녀는 아직 남편에 대해 잘 알지 못 했다. 그런데 어찌 부부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자신의 방식대로 생활해야 하겠는가.

    헌원사사가 씻는 틈을 타 구염상은 만두를 먹고, 제비집탕을 마셨다. 예쁘게 반짝이는 눈과 아버지를 닮은 코끝은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이 더해져 매끄러웠다. 매미 날개처럼 얇고 반짝이는 입술이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자 구염상은 무의식적으로 편하게 발을 흔들었다. 이 모습을 본 대마마가 순간 엄격한 표정으로 구염상의 발을 밟았다.

    구염상은 즉시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앞으로 원하는 대로 하루하루를 보내 수 있다는 기쁨은 어찌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구염상은 먼저 자신의 은자를 더욱 불려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만에 하나 장래에 남편이 자신을 싫어하게 된대도 자식들의 혼사는 책임질 수 있으리라.

    또한 구염상은 외조모와 외숙을 보러 장부에 놀러갈 생각이었다. 기회가 생긴다면 차를 마시러 청산의 찻집에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구염상은 기분 좋은 생각에 들떠 있었다. 자신은 공주였고 어머니는 이 나라의 황후였다. 부마에게 아무리 큰 권세가 주어진다 한들 지금 자신의 신분이라면 그녀는 매일 집에서 시어머니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충분히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상황이었고, 구염상의 기대는 결코 지나치지 않았다.

    헌원사사 옆에 선 구염상은 단정하고 아름다운 적공주 그 자체였다. 뛰어난 외모에 깃든 은은한 미소에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기품이 있었다.

    그녀의 발이 닿는 곳마다 모두들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는 건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공주의 매력 앞에서 사람들은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시 후, 새로운 헌원 부인의 외모를 칭송하는 말이 그녀보다 한 발 앞서 주소유의 귀에 전해졌다. 대청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도 그저 아랫것들이 예의상 한 마디 덧붙인 말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래쪽에 앉아있던 헌원사책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둘째 아들의 모습에 주 씨는 아들의 반항심이 또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젯밤 둘째의 예의 없는 모습을 떠올린 그녀가 냉담한 표정으로 훈계를 늘어놓았다.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어린아이같이 구는 게냐? 어제 네 형님은 기쁜 날을 맞이했거늘, 아우인 네가 술 주전자를 들고 놓을 생각을 않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행동이냐! 점점 이치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구나. 공주가 차를 권한 뒤, 내 너를 어찌 벌하는지 보자!”

    헌원사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 씨는 속으로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둘째는 평소에 잘 웃는 데다 생각이 없는 탓에 조금만 예쁘장한 시녀를 보아도 곧잘 장난을 치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들은 요 며칠 말도 잘 하지 않았고, 시녀들과 어울리며 웃고 떠드는 모습도 도통 볼 수가 없었다.

    주소유는 진중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자식이 어린아이처럼 즐겁기를 바라지 않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고개를 돌린 그녀는 남편에게 사책의 주변 사람을 수소문 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라고 당부했다.

    대강의 해결책이 떠오른 주소유는 둘째 아들에 대한 생각을 멈춘 후, 다시 며느리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상 공주에 대하여 몰래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공주는 철이 들었고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특히 어제 며느리가 가지고 온 혼수를 생각하자 주소유는 만족감이 더 커지는 걸 느꼈다.

    주소유는 대학자로 유명한 주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사람들에게 존중은 받았지만 시대에 뒤떨어져 있어 세상살이에 무지했다. 집안에 묵혀 둔 골동품과 명화의 가치는 제아무리 어마어마할지라도 은자로 바뀌어 그녀에게 안길 일이 없었다. 주소유의 어린 시절은 존엄만이 존재했을 뿐, 호사스러운 생활이나 금은보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헌원상과 혼인을 한 이후, 주소유는 헌원씨 가문에 전문적으로 서무를 담당하는 관리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편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가문의 살림살이 역시 날로 좋아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소유는 언제나 부족함을 느꼈다.

    특히 이번에 상 공주가 가져온 혼수들을 보며, 주소유는 헌원 씨 가문의 재산이 황제가 딸을 시집보내며 내린 혼수보다도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소유는 가문의 재산에 혼수를 합치자고 구염상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직접 주어 대신 관리하도록 한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즐거운 가능성을 떠올린 주 씨의 눈가에 점점 자애로운 미소가 퍼졌다. 벌써부터 비옥한 토지와 셀 수 없는 금은보화를 손에 쥔 듯한 느낌이었다.

    주소유는 연약하고 주관이 없는 구염상의 성정을 생각하며 결코 자신이 멋대로 속이거나 무리한 걸 요구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인, 큰 도련님과 공주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방 안의 사람들은 즉시 자세를 바로했다. 일가 친척들은 모두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재미있는 구경을 할 준비를 마쳤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코 친척들의 반응이었다. 과거 그들은 자신의 아들을 헌원오마의 양자로 들여 헌원씨 가문의 대를 잇게 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헌원상이라는 외실의 자식이 나타나 그들의 희망을 모조리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헌원상의 관직은 점점 높아졌고, 분명 어려운 성격이 아니었던 주 씨는 점점 거만해지며 안하무인이 되었다. 친척들은 모처럼 찾아온, 드디어 헌원씨 가문을 비웃을 수 있는 오늘 같은 날을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이러한 친척들의 생각을 주소유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흥!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상 공주는 자신이 아들을 위해 선택한 며느리였다. 어찌 비웃음을 당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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