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62)화 (362/449)
  • 외전 구염상 1-11

    물론 구염상이 혼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누구보다 이 혼사가 흡족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귀엽고 건강한 아이들, 더불어 부마의 지위가 높아진다면 어쩌면 그녀에게도 자매가 한두 명쯤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예측해 본 구염상은 속으로 셀 수 없이 예행연습을 반복했다. 그녀는 일 년간 교양마마를 통해 어찌해야 현숙한 아내가 될 수 있는지, 어찌하면 황실의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기세등등하지 않은 며느리가 될 수 있는지를 배웠다.

    시간이 지나 구염상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끝도 없이 소란한 황궁에서 멀리 떠나 깔끔한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는 게 마음에 들었다.

    값진 보병寶甁(신부가 시집갈 때 가지고 가는 도기 항아리)을 받든 구염상은 ‘신랑 신부 합방’이라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무릎을 꿇었다가 마마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새로운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자신이 없는 궁에서 어머니가 속내를 헤아릴 수 없는 주변인들을 너무 거리낌없이 대하지는 않을지, 누군가의 흉계에 빠지거나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구염상은 후회했다. 이렇게 일찍 혼인을 해 어머니 곁에서 효도를 다하지 못한 자신을, 어머니를 비호해 드릴 수 있는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후회했다. 만약 어머니가 조금만 유하여 의지가 될 다른 자식을 두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 *

    멀리 조로전에서 장서열은 갑자기 주위가 텅 빈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따금씩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분명 그녀의 주변은 고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떠받들고 딸의 혼인을 축하하는 조정 관리의 부인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쓸쓸한 걸까?’

    자신의 유일한 분신이자 항상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고 그 뒤에 숨던, 문장을 쓸 때면 절묘한 문구가 떠오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던 아이가 곁을 떠나 한 사내의 아내가 되었다. 행여나 자신처럼 유쾌하지 않은 나날을 보내지는 않을지, 사위가 딸을 차갑게 대하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아무리 구염상이 공주라 해도 헌원사사는 십 년 안에 첩을 들일 것이다. 혹시 구염상이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영원히 첩을 들이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남자가 표정을 숨긴 채 여인을 괴롭히려 마음먹는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고, 흠이 잡힐 일도 아니었다.

    장서열은 갑자기 사람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졌다. 이 궁 안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이제 궁에는 자신만이 남아 영원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남자를 지키고 있었다.

    장서열은 냉정한 표정으로 자신을 싫어하는 게 분명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아첨을 늘어놓으며 억지로 웃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문득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무서운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헌원씨 가문에서 딸을 괴롭힌다면, 나는 가장 소중한 이 자리를 걸고서라도 반드시 그들을 죽일 것이다!’

    그러나 장서열은 살아있는 동안 딸을 위해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오히려 밖에 있는 딸이 어떻게 해서든 안에 있는 그녀를 보살피려 노력했다.

    * * *

    떠들썩한 소리가 서서히 사라졌다. 대부분이 떠난 헌원씨 가문의 저택에는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헌원상은 매우 기뻤다. 며느리를 맞이했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헌원상은 친구들을 붙잡고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헌원상 정도의 위치가 되면 절대적으로 자신할 수 있는 것도, 허튼 소리를 지껄일 때까지 술에 취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기껏해야 장황한 과거를 늘어놓으며 그 옛날 주 씨를 아내로 맞이할 때의 기억을 과장해서 말할 뿐이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당시 헌원 대사마와 주 태부의 딸은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하늘이 내린 인연이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술을 마시느라 시끌벅적한 바깥과 달리, 손님을 맞이한 하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붉은 초가 장식된 아름다운 신방 안은 매우 조용했다. 수많은 하인들은 모두들 움직임 없이 붉은 침대 위에 앉은 신부의 시중을 들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방 안을 지키고 있던 하인들은 마치 그간 흉물이라도 지키고 있었던 듯 왠지 모르게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짐을 벗게 해 줄 사람이 도착했다. 늙은 하녀와 시녀들은 하나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줄곧 공주를 모셔 온 유모는 침대 옆에서 마치 자는 듯이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떤 일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부마가 가까이 다가오자 유모는 ‘잠’에서 깨어나 그를 쳐다보았다.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침착한 표정에 예의 바르고 공손한 모습이었다. 일순간 유모의 눈 속에 찬사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악의적인 추측을 담아 공주를 바라보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오늘 유모가 본 사람들 중 유일하게 무해한 눈빛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비록 공주에게 거리를 두는 듯한 공손함이 엿보였으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번잡한 전례前禮를 마친 헌원사사가 빨간 장대로 붉은 천을 들어올렸다. 천이 올라가며 서서히 옥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순간적으로 커다래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여인은 수줍은 듯 주저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정말 아름다워요!”

    뛰어난 미색에 모두들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무방비 상태에서 멍해진 건 헌원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탓에 사람들은 누구도 상 공주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다. 설령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비록 얼핏 보았을 뿐이었으나 옥처럼 생기 있는 눈과 부드러운 피부는 순식간에 한 폭의 그림처럼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공주의 곁을 지키던 마마는 일부러 무거운 기침을 내뱉었다. 넋이 나가 있던 사람들은 순간 깜짝 놀라 다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조금 전 저지른 무례를 사죄했다.

    구염상이 고개를 들었다. 차분한 눈빛에 단정한 자태였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일어나라는 표시를 한 그녀에게서 소녀 특유의 부드러움과 황실의 기품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거라. 모두들 하루 종일 고생했을 터, 마마가 나를 대신해 고고들을 데리고 물러가라.”

    “네, 공주 전하.”

    하인들은 황공하고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공주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소녀는 놀랍게도 생기 넘치고 아름다웠다. 하인들은 긴장하여 두 다리를 떨며 자리를 떠났다.

    방에는 두 부부만 남게 되었다.

    헌원사사는 비록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 자신이 예의를 잊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잊게 하고, 완전히 얼이 빠진 모습만 남게 할 만큼 놀라운 외모였다.

    “공주께서도 고되시지요. 피곤하면 쉬시고,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좀 드십시오. 밖에 아직 손님이 계시니 저는 마저 접객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헌원사사를 바라본 구염상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부군을 마주할 때 느끼는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그때 헌원사사는 속으로 경문 한 편을 다 외우고 나서야 비로소 웃는 얼굴로 침착하게 떠날 수 있었다.

    방문이 다시 닫혔다. 문 밖에 선 헌원사사는 조금 전 부인의 용모를 마주한 후 백지가 된 스스로를 떠올리며 자조하듯 웃었다. 칼날 같은 미색에는 영웅조차 유순해진다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을 줄곧 믿지 않았던 건 그간 그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공주를 바라보던 그 순간, 헌원사사는 본능적으로 공주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한편, 문이 닫힌 방 안에서 구염상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는 서둘러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

    “큰일 날 뻔했네. 그래도 웃어서 다행이야.”

    구염상은 조금 전 웃을 수 없을까 봐 정말 두려웠다. 웃지 못했다면 현숙하지 못한 부인으로 낙인찍혔으리라.

    방금 전의 상황을 되짚던 구염상은 스스로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너무 긴장한 탓에 남편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 한 것이었다.

    구염상이 가볍게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정말 바보 같다니까.”

    동시에 인기척을 느낀 구염상이 재빨리 자세를 바르게 했다. 마마와 평소 시중을 드는 소로小路, 소상小象이 나타나자 그녀가 침대에 누워 불쌍한 척을 했다.

    “피곤해.”

    애지중지하는 공주에게 다가간 대마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 공주를 위로하며, 혼사란 원래 이렇게 피곤한 것이라고 다독여 주었다. 소로는 공주에게 물을 따라 주었고, 소상은 공주를 위해 먹을 것을 챙겨 주었다.

    두 시녀는 공주가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면서도 여전히 대마마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혼인을 한 후에도 여전히 아이같이 구는 공주가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구염상이 자신을 비웃는 두 시녀를 바라보았다.

    “한 번만 더 웃으면 벌로 곳간에 가서 일하게 할 거야.”

    소상이 겁 없이 대답했다.

    “공주 전하, 남편의 곳간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아, 하하, 간지럽히지 마세요! 노비가 잘못했어요. 앗, 잘못했어요!”

    * * *

    어두운 밤, 은빛 달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전원의 하객들은 천천히 줄어들었다. 마지막 하객까지 배웅을 마친 뒤, 하인들은 하루 종일 떠들썩했던 흔적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모두가 동정하는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헌원사사가 신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여전히 촛불이 밝혀져 있었으며 곳곳에 붉은 천이 덮여 있었다. 붉은 등불이 방 안 모든 곳을 붉게 비추었다.

    헌원사사는 정당正堂을 가로질러 병풍이 가른 내실의 주렴을 들어올렸다. 부드러운 촛불 속 붉은 옷을 입은 구염상이 탁자 위에 놓인 음식들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방으로 돌아온 헌원사사를 보자 생각에 잠겨 있던 구염상의 눈에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이 어렸다. 그녀는 미소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탁자 뒤 침대 앞에 선 채 조용한 얼굴로 헌원사사를 바라보았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는지 몰라 몇 가지만 남겨두었습니다. 좋아하지 않으시면 소로에게 다른 것을 준비하도록 이르겠습니다.”

    헌원사사는 구염상의 목소리가 퍽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귓가에 맴도는 낭랑한 음성은 옥구슬 같아 마치 제 것처럼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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