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61)화 (361/449)

외전 구염상 1-10

놀란 두 사람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봉익을 쳐다보았다.

봉익은 태연했다. 최근 연경에는 상 공주에 대하여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이제 겨우 열세 살인 그녀가 언니들을 제치고 다급히 정혼을 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며, 이에 웃전에서 황실의 명예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 빨리 그녀를 시집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구염상의 혼사가 공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소문이 퍼졌다면 봉익은 자신이 마음을 담아 건네 준 선물을 핑계로 미리 계획했던 부담을 떠맡았을 것이다. 그리고 약해 보이지만 내면은 신중하기 그지없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저 어린 녀석들을 놀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봉익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갑작스레 구염상과 헌원사사의 정혼 소식이 전해졌다. 그가 할 수 있던 일이라고는 고작 황제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아버지를 설득한 일뿐이었다. 그러나 부친이 미처 황제를 알현할 틈도 없이 성지가 내려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귀가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을 마주하자 봉익은 더는 집에 머물 용기가 없었다. 이곳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은 다 그 때문이었다.

갈순근과 헌원사사의 눈빛에 봉익이 웃으며 말했다.

“신기할 게 뭐가 있지? 다들 최근 연경에 퍼진 소문을 못 들은 게야? 그건 모두 사실이라네.”

어쩌면 이것이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인지도 모른다.

순간 귀를 쫑긋 세운 갈순근이 묘한 시선으로 헌원사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참지 못하고 봉익에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 소문들이 전부 유언비어가 아니라고요? 어찌 그게 진짜일 수 있어요? 누군가 황후를 이기지 못해 퍼뜨린 소문이 분명해요. 아무리 훌륭한 가문이라 한들 뒤가 구린 일을 피할 수 없는데, 하물며 황실에서 가장 불안정한 내명부야 더 말할 것도 없죠. 안 그래요, 형님?”

말을 마친 갈순근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헌원사사를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모욕감을 느낀 그가 비이성적인 일을 벌일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갈순근의 염려는 기우였다. 헌원사사는 평소와 같이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과하게 긴장한 갈순근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긴장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기까지 했다.

갈순근은 공연히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짧은 그는 이미 자신이 이 여우 같은 두 남자를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봉익 역시 줄곧 헌원사사를 바라보았다. 한결같은 그의 모습이 어찌나 흐뭇한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언젠가 구염상은 분명 헌원사사를 사랑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저 마음으로 남을 자신의 연정은 끝내 아무도 묻지 못 할 터였다.

헌원사사를 바라보며 봉익이 일깨워 주듯 말했다.

“알겠지만 내명부는 확실히 평안하지 않아. 그날 나와 네 동생 사책은 상 공주를 만났지. 그녀는 하인의 복식을 하고 있었어. 서너 명의 호위에 둘러싸인 다른 공주를 쫓으며 뛰고 있는 도중,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그녀를 납치하려고 했지. 그 순간 우리를 만난 거고. 궁중에서 상당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해.”

이 나라에서 치열한 궁중 암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황후는 줄곧 금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금비는 어린 시절부터 황제를 모셨다는 과거에 기대 있었고, 황후에게는 황후라는 지위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황후가 승기를 잡아 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헌원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금비가 황후를 원망하고 있겠군요.”

봉익은 굳이 상 공주를 언급하지 않는 헌원사사에게 더 이상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자신은 며칠 사이 영문도 알 수 없이 한 사람을 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 보탤 입장이 아니었다.

“아마 그렇겠지. 허나 그래 봐야 조정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

“그렇지요.”

대화는 구염상으로 시작해 궁중 암투로 종결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봉익은 곧장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고 홀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스스로 반듯하게 성장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단 한 번 주어진 유일한 기회를 쟁취하지 못해 결국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만약 자신이 적극적으로 상 공주에 대해 알아보았다면, 혹은 선입관에 사로잡힌 어머니가 상 공주를 거부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걸 마냥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구염상의 혼사가 담긴 성지는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 자신이야말로 황후가 마음에 들어 했던 사윗감이 아니던가.

봉익은 쓴웃음을 지었다. 더 해 봐야 소용없는 생각일 뿐이다. 이미 성지는 내려졌고, 부마는 자신이 아니었다.

‘한 집안의 형제 같다고?’

봉익의 입꼬리가 자조하듯 올라갔다. 자신에게는 포도를 먹고 시다고 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었다.

사실 교묘하게 눈치를 주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만에 하나 헌원사사가 구염상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은 내색을 보이면 나서서 뒷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헌원사사는 언제나처럼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봉익은 전혀 개의치 않는 헌원사사의 표정을 떠올리며 마음이 몹시 불쾌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일이다. 더욱 기쁘게 표현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설마 상 공주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건가?’

봉익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불온한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렇게 홀로 분풀이를 하는 것 외에 감히 황제의 성지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 * *

연경의 백성들이 헌원사사를 동정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권서함의 제자로 이제 막 한림원에 들어간 우수한 청년이자 부귀한 헌원씨 가문의 공자는 곧 상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예정이었다. 이후 질투하는 시선이 줄어든 만큼 헌원사사를 불쌍히 여기는 눈빛들이 늘어났다.

헌원사사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사람은 늘 이렇게 이상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뜻을 이루지 못하면 마치 자신이 뜻을 이룬 것처럼 굴었다.

헌원사사는 스승인 권서함의 말을 떠올렸다.

“말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덤덤하게 굴면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어찌 거스르려 하는가.”

헌원사사는 권서함의 처세술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됨됨이를 존경했다. 모두들 헌원사사가 권씨 가문의 고리타분함을 배웠다고 말해도 헌원사사는 전처럼 의연했다. 평생에 걸친 스승님의 철학을 어찌 ‘고리타분’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 * *

약 반년간 내명부는 결코 유쾌하지 못 했다. 황후는 결국 금비의 뺨을 두 대 후려쳤고, 그것으로 모자라 금비에게 곤장 이십 대를 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금용은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침대에 엎드린 그녀가 장서열을 저주했다.

“멍청한 주제에 우쭐대기는! 부친이 제 손으로 서녀를 궁에 들여보낸 상황에서 과연 언제까지 날뛸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마마, 소리를 낮추셔야 합니다. 황후는 지금 다시 마마를 잡아들이기 위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금용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녀는 오랫동안 악독하고 성질이 급한 장서열을 참을 만큼 참아 왔다. 그런데 아직도 참아야 한다고? 대체 언제까지 참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느냐! 그래 봐야 골이 빈 여인일 뿐인데!”

다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금비의 성질을 자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픈 엉덩이를 들어올리던 금용은 까닭없이 침대에 엎드려 울었다. 대체 시녀 출신이 뭐가 대수라고 매번 이렇게 못살게 군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장서열과 평화롭게 지내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망하겠지!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누구일지 어디 두고 보자!’

화가 난 금용이 주먹을 쥐었다. 침대 머리맡을 때리던 그녀는 곤장을 맞은 상처 부분이 당기는 바람에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야 했다.

* * *

이듬해 버들가지가 흐드러지는 아름다운 봄날, 한림원에 들어간 지 막 반년이 된 헌원사사는 권 각로의 추천으로 호부戶部의 행주行走가 되었다. 5품 관직이었다.

연경의 백성들이 모두 그를 부러워했음은 물론이다. 곧 성질 사나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평소 함께 차를 마시자 청하던 동료들조차 그를 잡아먹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터였다.

헌원사사는 더욱 몸을 낮추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의 지위와 앞날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정작 호부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하고 예측하기 어려운지는 알지 못했다.

권서함은 헌원사사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호부는 가장 힘들면서도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지기 어려운 곳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부지런한 탓에 호부가 담당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온통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원사사는 호부를 선택했다. 그는 스승님이 안일함을 추구하는 제자보다 모험하는 학생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스승님처럼 누군가 하지 않는 일을 나서서 하는 사람을, 어째서 다른 이들이 전부 ‘고리타분하다’고 폄훼하는지 헌원사사도 의아했다. 이는 사람들의 눈에 뭔가 씌었거나, 혹은 그들이 스승님의 발자취를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혼삿날이 점점 다가왔다. 봄의 끝자락, 초여름 첫 비가 온 뒤 어느 날, 헌원씨 가문은 적공주의 십리홍장十里紅粧(십리까지 길게 늘어진 혼수의 행렬)을 맞이했다.

황제의 딸이 혼인을 하는 날이었다. 홍장은 그보다 더욱 길게 이어졌다. 바다처럼 넘치는 혼수와 몸종과 장원, 그리고 내시에 마마까지 그 위용은 모든 왕조의 공주를 뛰어넘을 정도였다. 혼수의 규모와 금액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날의 행렬은 세상 모든 물건들이 순식간에 그 빛을 잃을 만큼 장엄했다.

상 공주의 출가는 황실의 격식이 무엇인지, 황실의 씀씀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끝을 알 수 없는 혼수의 행렬에 성미가 나쁘다는 이유로 공주를 맞이하려 들지 않던 공자들조차 자신을 팔아서라도 이 모든 걸 누리고 싶다는 강렬한 염원을 갖게 되었다.

그날, 봉익은 잔뜩 취했다. 그는 방 안에서 두문불출한 채 사람들에게는 외부에서 공무를 처리하는 중이라고 알렸다.

‘이제 상 공주에게 준 물건들은 아마 다시는 찾을 수 없겠지…….’

봉익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구염상은 그의 선물을 보며 단 한 번도 그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뿐, 딱히 다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는 구염상이 여태껏 가장 많이 보아 온 사내가 바로 아버지인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뛰어나도 세상에서 그녀의 아버지만큼 준수한 외모에 멋진 체격을 가진 사내는 없었다. 하물며 그런 아버지는 햇살처럼 눈부신 어머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러한 광경을 보며 살아 온 구염상이 순진한 어머니처럼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혼사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게 오히려 어불성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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