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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60)화 (360/449)
  • 외전 구염상 1-9

    손에 다 넣은 사위를 잃은 금비는 분노했다. 화가 난 그녀는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끊임없이 하소연하는 딸을 목 졸라 죽일 뻔했다.

    “그 입 다물지 못 해? 헌원사사는 구염상의 부마가 되었단 말이다!”

    ‘망할 장서열! 가는 곳마다 나를 짓누르려 하다니!’

    장서열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금용은 도저히 딸을 곱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시킨 일을 망친 것도 모자라 사람 하나도 똑바로 감시하지 못 하다니! 밥상을 차려 줘 봐야 뭘 하느냐! 넌 마음에 둔 사람을 빼앗겨도 싸다!”

    멍하니 풀이 죽어 있던 구염예락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바마마께서 분명 어머니께 허락하셨던 거잖아요! 헌원 공자는 제 남편이었는데 대체 왜 바뀐 거예요? 이럴 수는 없어요! 싫어요, 싫다고요!”

    순간 금용이 딸의 뺨을 한 대 후려쳤다.

    “어디서 소리를 지르느냐? 더 창피를 당하고 싶은 게야? 이러다 평판이 나빠지면 앞으로 시집은 어찌 가려고! 입 다물어라.”

    금용이 주변 사람들을 쫓아냈다. 구염예락은 얼굴을 감싸며 울었다.

    “어머니께서 분명 약속하셨는데… 약속하셨잖아요…….”

    구염예락은 슬프게 울었다. 그녀는 어젯밤에야 겨우 헌원 공자를 만났다. 그는 인품도 외모도 모두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밀려 넘어지려 했던 자신을 부축해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찌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이의 남편이 되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아바마마께 말씀 좀 드려 주세요. 아바마마는 어머니 말씀을 가장 잘 들으시잖아요. 저는 헌원 공자에게 시집가고 싶어요. 구염상 그 바보가 어찌 그 자리에 어울리겠어요……. 어머니, 제발 가서 말씀해 주세요. 네?”

    금용은 다시 한 번 딸의 뺨을 치고 싶었다. 멍청한 것! 딸아이는 잔꾀는 많았지만 생각이 짧았다. 차라리 머리는 작은딸이 더 좋았다. 정말이지 친자식만 아니었다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어리석은 아이였다.

    아무리 총비라 해도 금용은 그저 시녀에서 올라온 일개 후궁일 뿐이었다. 황제와 함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정 때문에 오늘과 같은 날을 맞이했을 뿐, 황제는 금용에게 그다지 깊은 감정이 없었다. 금용이 기댈 수 있는 건 과거 황제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는 사실 하나였고, 황후와 맞설 수 있는 무기도 그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금용은 황후와 싸우는 것이 아닌, 구염락의 딸을 상대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금용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미 성지聖旨가 내려졌다. 그런데도 소란을 피울 셈이냐?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야?”

    구염예락은 분에 못 이겨 울었다. 왜, 어째서? 이미 이야기가 끝난 일이었는데, 다 된 일이었는데! 그토록 비범한 헌원 공자가 어찌 그런 모자란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뛰어난 남자라면 자신과 혼인해야 마땅했다. 자신과 헌원사사야말로 천생연분이었다.

    “어머니……!”

    “닥치거라!”

    금용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이 일의 핵심을 생각하고 있었다. 황후가 심술을 부린 건지, 아니면 헌원씨 가문에서 손을 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괘씸한 황후 같으니! 대체 갑자기 헌원사사를 빼앗아 간 이유가 뭐야!’

    울고 또 울던 구염예락이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다급하게 말했다.

    “구염상은 어젯밤 두 명의 사내와 함께 있었어요! 제가 직접 봤어요. 그중 한 남자는 옷자락까지 잡아당겼어요. 어쩌면 둘 사이에 법도에 어긋난 감정이 있을지도 몰라요!”

    일순간 금용의 눈이 번득였다. 그녀가 현천기와 오랫동안 계획하며 바라 마지않던 게 바로 이런 결과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황제가 이미 성지를 내렸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금용은 다시금 의기소침해졌다. 말을 한다 한들 또 어쩌겠는가. 이미 황제가 혼사를 결정한 것을. 어차피 번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는 딸의 모습에 금용은 속에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황후를 떠올리자 더욱 화가 났다.

    순간 고개를 치켜든 금용의 눈에 냉혹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열심히 짜 놓은 판을 어찌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조금 더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금용은 당당한 적공주가 궁 밖에서 한밤중까지 시간을 보냈다는 추문을 어떻게 덮을 수 있을지, 그 사실을 알고도 공주의 정혼자가 앞으로 공주에게 얼마나 잘해 줄지 한 번 두고 볼 작정이었다.

    금용의 머리에 불이 켜졌다. 그녀는 감히 황제가 정한 혼사를 그르칠 수는 없었지만, 황후를 상대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 순간, 장서열 역시 누가 자신의 딸에게 마수를 뻗친 것인지 조사하며 천한 시녀 출신에게 창끝을 겨누고 있었다.

    내명부의 양대 세력이 또 한 번 맞붙기 직전, 궁은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사흘 후, 주국의 적공주를 대사마 가문의 맏아들과 혼인시킨다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깜짝 놀란 연경의 귀족들은 헌원 대사마에게 동정을 보내는 한편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되었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했다. 아울러 전시殿試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아들을 아쉬워하던 가문들의 분위기가 급격히 반전되었다.

    “장원급제를 하지 못하여 참으로 다행이구나. 하마터면 황후와 사돈을 맺을 뻔했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다행히도 시험에서 떨어졌으니 우리 가문을 지켜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사당에 절을 올려야겠다.”

    모두가 부러워하던 장원급제자는 하루아침에 안타까운 사람이 되었다. 적공주 구염상을 부인으로 맞이하는 건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처럼 보였다.

    장원급제자의 동창, 친구 모두가 그의 불행을 즐거워했다. 그의 친한 벗 역시 참지 못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예전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건 오직 당사자인 헌원사사뿐이었다. 자신을 비웃는 이들 중 제 마음대로 혼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누구를 아내로 맞이하든 헌원사사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주국의 문단은 현 황제가 천하를 평정한 이후 나라의 안정을 유지하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했기에 헌원사사는 줄곧 그러한 스스로에 대해 나름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청춘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전시에서 3등에 오른 친구가 차를 마시자며 헌원사사를 불러냈다. 남자의 외모는 평범했고 옷차림도 헌원사사와 비슷했다. 그는 주국에서 가장 부유한 갈씨 가문의 적장자로 어렸을 때부터 연경의 공자들 중 누구보다도 몸치장에 각별한 자였다. 덕분에 그는 연경에서 손꼽히는 고관의 아들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헌원사사와 함께 찻집에 앉은 갈순근葛恂謹이 차 세 잔을 다 비울 때까지도 봉익은 나타나지 않았다.

    “봉 형님은 요즘 공무가 바쁘신가? 어찌 아직도 안 오시지.”

    봉익은 셋 중 가장 연장자였다. 그래 봐야 한 살이 많을 뿐이었으나 그는 두 사람보다 무려 오 년이나 먼저 과거시험을 보았다. 당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황제는 그를 3등으로 정했다. 그 해 봉익은 한림원 관리가 되었고, 이듬해에 형부에 들어가 종3품에 오르며 실권을 장악했다.

    헌원사사도 봉익의 소식은 잘 알지 못 했다.

    “글쎄, 나도 최근에 몇 차례 약속을 했지만 만나지 못 했어.”

    갈순근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 형님이야말로 우리 또래 중 배운 것을 실제로 활용할 줄 아는 뛰어난 사람이지. 사실 처음에는 형님이 세자 서풍엽의 밑에 들어가는 걸 누구도 좋게 보지 않았잖아. 세자가 아무리 재능이 많고 정치적 업적이 탁월하다 해도 워낙 방탕한 데다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봉 형님이 장점만 골라서 배우고 단점은 피할 줄 누가 알았겠…….”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은빛 달이 그려진 금포錦袍를 입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차라리 내가 홍등가에 출입하지 않는 이유가 스승님께서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그래.”

    놀란 갈순근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했다.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실언일 뿐입니다.”

    살짝 눈을 들어 봉익을 바라본 갈순근은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에 그제야 하하 웃었다.

    “형님께서 동생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시네요.”

    자리에 앉은 봉익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갈순근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갈순근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지어 준 좋은 이름이 제값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갈순근은 갈수록 비뚤어졌다.

    “혼삿날은 정해졌나?”

    헌원사사는 말없이 봉익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봉익은 찻잔을 바라본 후, 다시 친구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그가 가장 좋아했던 아우가 전과 다름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봉익은 헌원사사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다.

    봉익이 스승님을 찾기 위해 홍등가에 빈번하게 출입했던 것과 달리 헌원사사는 권서함에게 가르침을 받았기에 인품으로는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다.

    봉익은 좋은 아우인 헌원사사에게서 조금의 결점도 찾을 수 없었다. 문득 공주의 모습이 떠오르자 봉익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찻잔을 든 봉익이 두 사람에게 차를 권했다. 갈순근이 입을 열었다.

    “자, 우리 헌원 부마를 위해 다시 한번 잔을 비웁시다. 일찍이 성공한 덕에 모진 고통 속에서 살게 된 것을 축하하며 말입니다. 하하, 하…….”

    멈칫한 갈순근은 더 이상 웃지 못한 채 헌원사사의 평안한 표정과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봉익의 눈빛을 마주했다.

    갈순근이 멋쩍은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들 형제 같은 사이였기에 그 앞에서 추태를 부리는 건 사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갈순근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물었다.

    “왜들 그래요? 내 말이 틀렸나? 사사야 곧 수렁으로 뛰어들어야 하니 그렇다 쳐도, 봉 형님은 어찌 웃지 않으세요?”

    봉익은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일에 대해 아는 체하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그 역시 황후의 딸이라면 분명 황후처럼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제멋대로 설칠 거라 여겨 온 터였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 본 공주는 놀랍게도 오히려 그 반대였다. 소녀는 부드럽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알았으며, 신중하면서도 영리했다. 누군가 애지중지 떠받들어 주어도 당연하다 여기기는커녕 그것이 자신을 위한 행동인 줄도 모를 듯했다.

    봉익이 갈순근의 정곡을 찔렀다.

    “너는 황후의 딸이라면 어머니의 용모를 닮아 보기 드문 미인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본 게냐?”

    이렇게 진지한 얼굴을 한 봉익은 처음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에 갈순근은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한 후 긴장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그런가요?”

    봉익의 말에 비로소 갈순근은 황후의 용모가 천하제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동시에 헌원사사를 바라본 그가 나오는 대로 생각 없이 지껄였다.

    “그렇다면 우리 헌원 공자께서 쾌락에 빠져 본분을 망각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순간 차를 마시던 헌원사사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레에 들려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나는 그녀를 만나 본 적도 없어. 그저 황후와 달리 성격이 좋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지.”

    봉익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본 적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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