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59)화 (359/449)

외전 구염상 1-8

그러나 과연 황궁은 황궁이었다. 깊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는 어린 궁녀는 어떻게든 손을 써서 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봉익과 헌원사책은 재산을 모두 바치고, 심지어 자신들이 심어 놓은 태감과 궁녀들에게 무릎을 끓는다 해도 결코 궁 안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히 두 남자는 구염상을 방 안까지 데려다주려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봉익은 두 번째 궁문 밖에서 구염상을 궁 안의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노마마에게 벽지원까지 공주를 평안하게 모시라고 분부했다.

구염상은 정문의 하인들이 놀라지 않은 건 순전히 두 은인이 힘을 쓴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소매 속 물건들을 죄다 봉익의 얼굴에 던져 버리려 했던 마음이 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헌원사책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언젠가 제가 두 분을 도울 일이 있다면 결코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순간 봉익이 구염상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깍듯한 말 한 마디뿐이라고? 우리와 분명히 선을 긋겠다는 건가.’

하지만 곧 봉익은 구염상의 신중함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공주로서 그녀는 이렇게 해야 마땅했다.

만약 봉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구염상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서, 또한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말에는 어떠한 부적절한 구석도 없었다. 진지한 생각 끝에 구염상은 이 말이 성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결론지었다.

노마마를 따라 몸을 돌려 떠나는 구염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헌원사책은 차분한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틈이 살짝 벌어졌다 닫히며 그나마 사라지는 뒷모습조차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자 헌원사책은 그제야 허탈한 듯 웃었다.

‘상이라면 구염상이겠지.’

구염상은 어머니가 큰며느리로 맞이하고자 미리 점찍어 놓은 장래의 형수님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에게 위협적이지 않으면서 구염예락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마음에 들어했다.

헌원사책은 순간 형님을 향한 질투에 휩싸였다. 심지어 어머니가 구염상을 이리저리 계산한 것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비록 짧은 시간 함께 길을 걸어온 것뿐이지만, 그녀가 신중한 사람임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공주들이 흔히 보이는 거만한 기색도, 다른 사람보다 한 수 위인 양 거들먹거리는 모습도 없었다. 헌원사책은 어머니가 당신의 사심을 채우고자 금비와의 소용돌이에 그녀를 끌어들이지 않길 바랐다.

봉익은 이미 문에서 시선을 거둔 상태였다. 멍하니 문을 바라보는 건 그의 품격에 어긋나는 일이었을 뿐더러, 넋을 잃으려 해도 어차피 마주볼 사람이 없는 탓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가자.”

헌원사책의 생각을 추측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봉익은 걱정하지 않았다. 교활한 황후가 자신과 헌원씨 가문의 둘째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할지는 자명했다.

이제 어머니께서 최대한 빨리 입궁하여 황후마마께 자신에 관한 소문을 해명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 * *

구염상은 벽지원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를 둘러본 그녀가 치마를 들고 빠르게 정전正殿으로 뛰어갔다. 입구에 도착해 헐떡거리며 그녀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것처럼 작은 손으로 가슴을 쳤다.

‘살았다. 드디어 살았어!’

숨을 한 번 고른 구염상이 문을 밀어젖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구염상은 엄숙하게 문을 닫고 장서열의 발밑에 꿇어앉았다.

긴장해 있던 장서열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눈가에 고였던 눈물을 다시 삼켰다. 이런 순간일수록 냉정해져야 했다. 딸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 감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황후가 아무리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다 한들 일이 벌어진 뒤라면 그까짓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설령 그녀가 나서서 딸을 데리고 돌아온다 해도 뜻대로 황제를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딸을 위해 다른 무언가를 계획할 능력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마당에 딸이 하인들의 시선에서 몇 시진이나 벗어나 있었다니! 이 사실은 장서열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다. 심복을 보내 구염상을 찾아보라고 지시한 장서열이 할 수 있는 일은 벽지원에 앉아 딸에게 올가미를 씌울 수 있는 이들을 제압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천만다행히도 상아는 무사히 돌아왔다.

비록 장서열이 아무리 무정하고 악독할지라도, 불쑥불쑥 나타나는 여인들을 한 명씩 처리하느라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그녀는 딸 상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아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녀의 핏줄이었다.

상아 외에 다른 아이를 가지지 않았던 건 아니다. 가장 오랜 기간 뱃속에 품고 있던 아이는 금용 그 천한 것이 품고 있던 황자와 함께 결국 세상 빛을 보지 못 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적은 모든 것을, 자신은 팔 할을 잃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계산하기도 귀찮았다.

어쨌든 장서열은 통쾌하지 않았다. 적 역시 통쾌할 리 없었다. 아무리 구염락이 싸고돈다 한들 어찌 하겠는가? 자신이 낳지 못한다면 당연히 금용 또한 아들을 낳지 못해야 했다. 아들이 없다면 아무리 높이 기어오른다 해도 금용이 하는 짓은 그저 헛수고에 불과했다.

장서열은 바보가 아니었다. 구염락은 무정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한계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딱히 관여하지 않았다. 내명부에서 수많은 여인들이 죽어 나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식들이 사라지는 동안 구염락은 단 한 번도 장서열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대주국의 황실이 그의 대에서 후사가 끊어질 게 분명한데도 그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세상에 태어난 아이라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그때는 장서열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태어난 황자를 건드린다면 구염락은 누구든 구족을 멸했을 터였다.

이는 구염락이 장서열이 다른 비빈들을 죽이는 건 허락해도, 유일하게 금용을 죽이는 것만큼은 허락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하지만 구염락은 장서열이 금용에 응징을 가하는 것도 저지하지 않았다. 금용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황후는 언제 어디서든 내명부를 통솔하는 고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구염락은 결코 누군가를 편애하지 않았다.

구염상은 그런 장서열이 유일하게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딸이었다. 성격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면이 만족스러운 딸이었다. 조금만 더 독하고 강경했다면 좋았을 텐데. 장서열은 그 점이 아쉽고 또 아쉬웠다.

“피곤할 텐데 가서 쉬거라.”

장서열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도도한 기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금과 옥, 비단으로 꾸민 미인은 여름에 핀 꽃처럼 화사했다.

활활 타는 듯한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볼 때마다 구염상은 매번 갈채를 보냈지만, 오히려 너무나 화사해서 눈이 부시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네, 어마마마.”

인사를 올린 구염상이 막 몸을 일으킬 때였다. 조잡한 옷소매에 구멍이 생기며 순간 댕그랑 하는 소리가 울렸다. 봉익이 넣어 준 접선의 구슬 장식이 바닥에 떨어지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일순간 애처로운 표정이 된 구염상이 차마 봉익의 얼굴에 던지지 못 한 그 물건을 주워 들고자 했다.

“어마마마…….”

장서열은 바닥에 떨어진 접선의 장식이 남자들이 사용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순간 손을 흔들어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그녀가 직접 아래로 내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딸을 검사했다. 광목으로 만든 옷을 억지로 벗기자 소매 안에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조용히 체념한 듯한 딸의 눈빛에 장서열의 분노가 수그러들었다.

“가서 쉬거라.”

긴장했던 구염상의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다. 하지만 이대로 떠날 순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장서열은 딸이 무엇인가 해명하려는 듯 떠나지 못하고 망설이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딸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자신과 구염락의 외모를 섞어 놓은 듯한 딸아이의 모습에 속으로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안심하고 가서 쉬어라.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배후에 숨은 자는 분명 재밌는 구경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상아를 위해 최대한 빨리 혼사를 결정해야 했다. 당장 오늘 밤이라도 결판을 내야 하리라.

구염상은 불같은 어머니가 갑자기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자 약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이렇게 오랜 기간 궁중의 약육강식 속에서 권력을 잃지 않을 수 있던 그만의 방식이 있었다.

구염상은 까치발을 든 채 어머니를 안고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저 어떤 남자가 억지로 넣어 준 것일 뿐이에요.”

장서열은 딸을 두드리며 강한 기세로 말했다.

“무슨 허튼 소리냐? 너는 그저 약을 먹고 잠을 잤다가 일어나서 흘린 땀을 씻었을 뿐이다. 어서 가거라.”

구염상이 미소를 지었다.

“네.”

그리고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딸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장서열은 무기력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딸의 어수룩함에 다시 한 번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저리 생각이 단순한데, 어찌 그 대단한 귀족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장서열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이 많지 않아 복잡할 일이 없는 헌원씨 가문 외 다른 선택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헌원사사는 문인 출신이었고, 또 그 어미 역시 주 태부의 딸이니 교육에 있어 나무랄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금용의 마음에 들었다는 건 그의 인품 역시 괜찮다는 걸 의미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서열은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

그날 밤은 혼인 이후 장서열이 처음으로 구염락 앞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한 모습을 보인 날이었다. 그녀는 황제를 찾아가 난생 처음으로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고, 황후라는 신분에 기대어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녀는 낮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로 어머니로서 아이의 아버지와 딸의 혼사를 논의했다.

기적을 느낀 구염락은 몇 차례나 장서열을 쳐다본 뒤, 이 자리에서 정해진 성지는 절대 번복되지 않을 거라고 확답했다. 이는 금비에게 말로 때웠던 승낙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장서열은 감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구염락을 몇 번 더 바라보았다.

그날 밤, 구염락은 예기치 않게 장서열 곁에 머물렀다. 장서열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성질이 급한 데다 난폭하기까지 해 결점이 많은 부인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구염락은 미색에 마음이 흐려지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부인의 약한 모습까지 포용하지 못할 정도로 무딘 사람도 아니었다.

게다가 고요한 장서열은 확실히 큰소리를 칠 때보다 매력적이었기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염락으로서는 굳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구염락은 황제로서 특권을 누린 뒤, 다음날 그녀가 황은을 무기로 기고만장하게 여기저기서 횡포를 부리고 다녀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황후가 있는 상황에서 내명부가 고요하기를 바라는 건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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